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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생명의 플레이어 (3) (198/301)

41화.  생명의 플레이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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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준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부모님 댁의 자기 방이었다. 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팠다.

“윽.”

지끈거리는 몸을 주무르며 시계를 보니 저녁 여섯 시다.

셔츠 여기저기에 피가 묻어 있었다.

-아직 회복중이니 무리하게 움직이지 마십시오.

로잘린이 보낸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에 치일 때부터 의식이 끊어졌지만 로잘린의 시야로 봤던 것들이 희미하게 기억났다.

“어떻게 된 거야? 애초에 차가 다니는 골목이 아니었는데.”

-고의적인 사고였습니다. 당신을 노리고요.

“말도 안 돼. 설마?”

-정말입니다. 지광만이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본인들 입으로 실토했습니다.

“하아.”

류영준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경영권이 직접 위협받는 상황이니 무슨 수를 쓰긴 쓸 거라고 생각했다.

몇 가지 반응을 예상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과격하게 막나갈 줄이야.

“세 명이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됐어?”

-살려뒀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압해서 차량 안에 묶어뒀습니다.

“······.”

-그 후에는 이 집에 와서 상처를 소독하고 회복시키면서 의식을 조절했습니다. 당신에게 통제권이 돌아가도록 말입니다.

“한 번 봐야겠어.”

류영준은 셔츠를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낡은 그레이스 차량 안.

세 사람이 청테이프로 포박돼있었다.

사실 그 포박이 굳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이미 뼈마디 곳곳이 부러지고 관절이 빠져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두 명은 의식도 없었고, 유일하게 정신을 차린 콧수염은 류영준을 보고 몸을 꿈틀댔다.

“흡!”

류영준이 그의 입에서 청테이프를 떼어주었다.

그는 공포에 질려서 곧장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왜 그랬죠?”

류영준이 물었다.

“저희도 안 된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이번에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진짭니다. 상대가 유명인인 만큼 부담스러워서 계속 안 된다고 했어요. 정말이에요. 근데 계속 설득하셔서······.”

“지광만이요?”

“······. 그게······. 아까 제가 본부장님이 지시하신 거라고 얘기하긴 했는데 사실 확실한 건 아닙니다. 중간에 사람을 몇 번 거친 거라서요······.”

“지시 내린 사람은 따로 있다는 거죠? 뭐라고 설득하던가요?”

“류 박사님은 유명인이긴 하지만 권력자는 아니라서 아직은 괜찮다고······.”

콧수염이 류영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류 박사님은 깐깐해서 정치인들하고 줄 같은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접대 강요받던 연예인이 리스트 쓰고 자살해도 잡혀 들어가는 놈 하나 없는 세상 아닙니까? 유명인이랑 권력자는 다르거든요. 일반인이 죽으면 세상은 관심이 없고, 유명인이 죽으면 세상은 관심은 갖지만 범인을 잡아내는 것은 권력 대결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절 죽여도 자기들이 은폐하려고 맘먹고 달려들면 할 수 있으니 괜찮다, 그런 식으로 설득한 겁니까? 전 유명인이고 자기들은 권력자니까?”

“네······. 류 박사님하고 얽혀서 뒤를 봐주는 정치인 같은 게 없기 때문에 묻어버릴 수 있다고 했어요.”

“······.”

“그리고 도, 돈을 많이 준다고 했습니다. 저희도 언제까지고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으니까요. 이게 마지막이니까 한 번만 하고 돈 많이 받아서 다른 나라로 뜨라고 했어요. 배편도 구해준다고 하셔서······.”

“그 말을 믿었습니까?”

“거짓말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저희하고 10년 넘게 거래한 사람이고 형 동생하는 사이······.”

“정말 멍청하군요. 당신들은 절 죽이면 이 나라에서 나갈 방법이 없어요. 당신들을 꼬리 자르는 데 쓸 겁니다.”

“그게······. 하지만 일수 형님은 저희하고 10년 넘게 봐와서······.”

“지광만한테 전화해보세요.”

“저희는 지광만 본부장님하고 연결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냥 추측만 한 거예요. 항상 일수 형님하고만 연락해서······.”

“중간 관리자 이름이 일수입니까?”

“김일수······.”

“그럼 그 사람한테 전화해보세요. 스피커폰 통화로 하세요. 녹음할 테니까.”

***

“너무 지나쳤던 거 아닙니까?”

방배동의 한 룸싸롱에서 김일수가 물었다.

그는 지광만 같은 고객들의 위탁을 받고 불법 조직들을 움직여주는 중간 브로커였다.

“좀 무리하게 움직이긴 했지. 하지만 시간이 촉박했어. 어쩔 수 없었다고.”

지광만이 말했다.

“지금은 그 놈이 권력이 없어. 명성만 엄청나게 들고 있을 뿐이지. 딱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해. 여기서 시간 더 주면 이제 정치인들이 엮이면서 언터쳐블이야. 근데 지금이라면 시끄럽긴 하겠지만 꼬리 좀 잘라내면서 처리할 수 있어.”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을까요?”

“누구를? 우릴?”

지광만이 큭큭 웃었다.

“이봐. 김 사장. 이게 중요한 부분인데 말이야.”

지광만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국민들은 류영준이 우리 회사와 사이가 나쁘다는 걸 몰라.”

에이젠은 대외적으로는 류영준에게 역분화 줄기세포 지분을 전부 밀어줄 정도로 적극 지지한 회사다.

사내의 고급 인력들을 동원하고 실험동물자원센터의 망막 변성 마우스를 모두 몰아주면서 시신경 분화와 임상 연구를 도왔다.

그리고 고작 주임 연구원이었던 류영준을 임원으로 고용한 회사다.

생판 남이었던 그에게 4 퍼센트나 되는 엄청난 지분을 준 회사다.

게다가 지금은 류영준의 계열사 창설로 인해 막대한 이익을 보기 직전이라 류영준을 적극 지지해야 마땅한 회사다.

과연 세상 그 누가 에이젠이 류영준 살해의 배후라고 짐작이나 하겠는가?

“흐흐흐흐.”

지광만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류영준 본인 외엔 그 누구도 에이젠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류영준은 죽고 없다.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럼 국민들의 분노는 절대 에이젠이나 경영진들을 향하지 않는다. 황금알 낳는 거위 배를 회사가 직접 쨀 리 없으니까.

정부에 대한 분노는 꽤 나올 것이다.

왜 저만한 인재를 보호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느냐고 말이다.

철저히 조사하고 범인을 잡아내라며 여론이 팔팔 끓을 것이다.

“그쯤에 사고 낸 떨거지 놈들을 잡아다가 국민들 앞에 딱 던져주면 돼. 교수형을 하든 능지처참을 하든 분노를 다 쏟아내라고 말이야.”

지광만이 말했다.

“신나서 그 놈들을 물어뜯겠지. 국민들은 개돼지야. 생각하는 게 다 고만고만하거든. 우리 쯤 되면 손바닥 위에 놓고 시뮬레이션 돌리면서 맞출 수 있는 법이야.”

지광만이 말했다.

“그 다음 것도 맞춰볼까? 그 다음엔 배후에 대한 음모론이 나와. 후보는 둘이야. 미국이랑 SG제약. 백 퍼 이 둘이 나온다.”

앞으로의 의학의 판도를 바꿀 인물이 한국인이니, 국제 과학의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미국이 암살했다는 시나리오다.

이휘소 박사가 죽었을 때도 비슷한 음모론이 떠돌지 않았던가. 사실인지 가짠지는 모르겠지만.

또는 에이젠의 성장을 두고 볼 수 없었던 SG제약이 암살했다는 시나리오다.

“그 둘이 치고받는 사이에 에이젠이 낄 틈은 없어. 그 동안 에이젠은 사원들 전체를 모아놓고 추모식 한 번 해주고 대표님 눈물 한 방울 흘려주면 아름답게 마무리될 거야. 오히려 그 모습에 개미들이 감동해서 주가가 오를 수도 있지.”

지광만이 말했다. 김일수의 어깨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군요······.”

“그 놈들 정도는 꼬리 자르는 데 써도 괜찮지?”

“네. 문제없습니다. 돈만 많이 주시면요.”

“물론이지. 내가 넉넉하게 넣어주겠네.”

지광만이 호쾌하게 술을 쭉 들이마셨다.

막장 인생 셋이 국민 분노를 다 받아내고 소멸하면 천천히 연예인 섹스 스캔들 같은 거나 한 번 터뜨려야겠다.

여론이 잦아들기를 기다린 후에 류영준 때문에 흔들린 에이젠의 경영을 천천히 정상화한다.

만약 류영준의 등 뒤에 심성열 같은 정치인이 있었다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만, 그 놈의 뒤엔 아무도 없다.

니콜라스? 과학자로서 류영준을 아꼈을 뿐이지 죽은 놈 위해 자기 회사랑 싸울 사람은 아니다.

류영준. 네 청렴함이 독이 됐다.

‘너무 깨끗한 고기는 큰 하천에서 살 수 없는 법이지.’

지광만이 피식 웃었다.

“근데 이번 일이 커서 저도 불안해서 그런데, 잘라낸다는 꼬리란 게 우리 애들까지죠? 전 아니죠?”

김일수가 물었다.

“그럼 설마 김 사장까지 포함되겠나. 왜 그렇게 불안해 해?”

“하하. 뭐, 아닙니다. 그 정도 유명 인사를 잘라내는 게 저도 걱정돼서 그렇죠.”

“쫄지 마. 할 수 있어. 그리고 우리 회사의 경영권을 지키는 방법이 이젠 이거밖에 없어.”

“네. 알겠습니다. 잘 될 겁니다.”

지이이잉!

김일수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일 끝났나보네요.”

김일수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혀, 형님?

“어. 끝났어?”

-그게······. 어······. 류영준이······.

“왜? 아직 처리 못했어?”

-당신이 김일수입니까?

류영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일수의 표정이 굳었다. 통화음이 큰 편이라 지광만도 들었다.

“어······. 그런데요. 누구십니까?”

-류영준입니다.

김일수가 침을 꼴깍 삼켰다. 지광만이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제, 제가 모르는 분 같은데, 혹시 저한테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

김일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방금 처리 못했냐고 물은 것 녹음했으니 편하게 얘기합시다.

“······.”

-당신이 보낸 사람들 실패했습니다. 경찰 불렀고, 곧 체포돼서 들어갈 겁니다. 당신 선까지는 확실히 잡혀 들어가겠죠. 10년 넘게 이 사람들하고 거래했다면서요? 이 사람들이 지광만은 몰라도 당신에 대해선 꽤 많이 알더군요.

“하······. 하하. 선생님, 무슨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당신한테 전화한 이유는 물어볼 게 있어섭니다.

“······. 물어볼 거요?”

-조사를 받으면 어디까지 터뜨릴 겁니까?

김일수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자꾸 헛소리 하시면 끊겠습니다.”

-배후 다 터뜨리세요. 지광만까지라면 지광만까지 터뜨리세요. 어차피 당신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봐요. 지금 무슨······.”

-잡아뗄 거면 그냥 말을 하지 말고 듣기만 하십시오.

류영준이 말했다.

-솔직히 이번엔 한 수 배웠습니다. 어떤 논리와 계획으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도 알겠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이 상황을 무마해줄 권력자들을 많이 알고 있겠죠. 돈으로 매수했든 약점을 잡았든.

“······.”

-하지만 당신들이 아무리 튼튼한 밧줄을 잡고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전 그걸 빼앗아올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돈이나 명예보다 더 간절히 원하는 걸 저만 줄 수 있거든요.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수명’이요.

위이이잉

경찰차와 구급차가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국민적인 분노는 물론이고 정치권 전반의 복수심도 그쪽에 쏠리도록 해주겠습니다. 혼자 받아내기 힘들 겁니다. 이 일의 뒤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토해내세요.

“저, 저기요. 잠깐만.”

-사실 그 동안 제가 지나치게 지광만과 경영진을 물어뜯은 게 아닌가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함정과 블러핑과 협잡으로 정치를 벌이고 경영진을 무너뜨린 것에 대해 인간적으로 좀 자책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하지만 이제 상관없습니다.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갈 데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 당신들이 이 정도로 쓰레기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상상 이상의 지옥이 펼쳐질 겁니다. 혼자 좆되고 싶지 않으면 뒤에 있는 사람들 전부 내놓으세요.

뚝.

전화가 끊겼다.

김일수가 얼어붙은 표정으로 지광만을 바라보았다.

지광만은 전자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눈을 꾹 감으며 한 모금 깊이 들이마셨다.

쾅!

그가 담배 째로 책상을 내리쳤다.

“무슨 일을 그렇게 해?”

“그게······.”

“자네 선에서 알아서 해결하게.”

“······. 저, 저는 꼬리 아니라면서요?”

“이제 난 모르는 일이니 꺼져. 오늘 만난 것도 비밀로 하지.”

지광만이 외투를 걸치며 나섰다.

***

국민 영웅, 스타 과학자 류영준을 향한 살인 미수.

전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매스컴에서 첫 속보가 뜬 이후 쉬지 않고 기사가 쏟아져 나왔고 에이젠의 주식은 급격히 떨어졌다.

정부와 건달들을 향해 엄청난 비난의 여론이 들끓었다.

류영준은 대학병원의 VIP 병실에서 텔레비전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아나운서가 류영준의 사고를 또 리포트하고 있었다.

-금일 오후 네 시경. 대전 도마동의 외진 주택가. 에이젠의 류영준 박사가 피습을 당해 큰 부상을 입고 인근 대학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범인은 세 명의 조직 폭력배로······.

삑.

류영준은 TV를 껐다.

그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부상은 로잘린을 이용하면 금방 회복할 수 있지만 류영준은 일부러 건드리지 않았다.

병원 신세를 진 것은 이 상황을 극단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다.

꽤 오래전, 임상에 성공한 손수영을 찾아간 심성열이 떠올랐다.

그들의 이미지 메이킹에는 병실보다 좋은 곳이 없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되었다.

“류영준 씨, 손님 오셨는데요.”

간호사가 다가오며 말했다.

“누군데요?”

“국회의원 김주철이라고······.”

“손님들 오시면 전부 다 받아주세요.”

류영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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