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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독립 영역 (4) (194/301)

37화.  독립 영역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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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젠 경영진은 경영 승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대표 윤대성은 경영권과 그 막대한 재산을 아들 윤보현에게 넘겨줄 방법을 오랫동안 고민했다.

일반적으로 대기업 총수 일가가 경영권을 승계하는 방법은 다음 세 절차를 따른다.

첫째. 자회사를 설립한다. 이 때 경영권을 승계 받을 왕자가 이 자회사의 지분을 상당 부분 보유하게 한다.

둘째. 고수익 알짜배기 일감을 자회사에 몰아줘서 회사를 비정상적인 속도로 성장시킨다.

셋째. 덩치가 커진 자회사를 합병시켜 왕자가 모회사의 지분을 대량 쥐게끔 한다. 그럼 경영권과 재산이 안전하게 승계된 것이다.

이 거대한 경영 승계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은 경영본부장 지광만이다.

그는 윤대성과 형, 동생 하는 사이로 아주 옛날부터 알고 지냈고 윤대성에게 충성을 다하는 인물이다. 그는 진심으로 윤대성을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럼 류영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제멋대로 날뛰는 고집 센, 세계 최고의 명마.’

지광만의 냉정한 평가였다.

류영준의 기세를 이쯤에서 꺾어야 한다는 윤보현한테 지광만은 ‘내게 맡기라.’고 했다.

부러뜨리기 힘든 상대다.

그리고 내버려두면 자꾸 충돌하는 적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 아군으로 만드는 게 최선책이 아니겠는가?

지광만은 이사회에서 류영준의 비등기이사 선임을 강력히 주장했다. 지분도 주자고 밀어붙였다.

이사회에선 그의 뜻대로 해냈다. 그곳에서 결정된 사안이 그대로 주주총회에서 확정될 것이다.

이제 다음 문제는 류영준을 아군으로 만드는 것이다.

때는 류영준이 홍주희에게 고혈압 치료제 베라텍스를 권유하기로부터 약 2주 전.

지광만은 제 6 연구소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있었다.

-여덟시 뉴스입니다. 오늘 오후 세 시. 에이젠에서 개발된 역분화 줄기세포 유래 시신경 치료제가 첫 임상에 들어갔습니다. 시험자 손 씨는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은 환자입니다.

차량 라디오에서 SBS 뉴스가 흘러나왔다.

달칵.

지광만은 라디오를 끄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

같은 시각.

정혜림 앞에서 여덟시 뉴스 인터뷰를 아웃팅 당한 류영준은 수치스러운 얼굴로 가방을 싸고 있었다.

정혜림이 옆에서 말했다.

“아. 그리고 영준 씨. 다음에는 인터뷰할 때 카메라 자꾸 힐끔거리지 마요. 방송 보면 의사나 과학자들 가운 입고 나왔을 때 카메라 방향에서 45도 각도를 꼭 유지한다고요. 그게 클래식이에요.”

“······. 옛날부터 궁금했는데 대체 왜 뉴스나 예능에서 전문가랑 인터뷰하면 항상 그런 구도로 하는 걸까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듯한 구도를 취해야 인터뷰에 신뢰도가 더해지잖아요. 그 전문가가 좀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얘기하는 듯한 느낌? 방송은 디테일이니까.”

“아니, 어차피 카메라 너머의 국민들한테 설명하려고 인터뷰하는 건데 왜 그렇게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돼요.”

“혹시 그거 기자들한테 따졌어요?”

“따지진 않았는데 카메라 자꾸 쳐다보니까 기자들이 뭐라고 했어요. 근데 제가 계속 봐서 나중엔 포기하시더라고요.”

“캬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것은 티끌만한 것도 용납하지 못하시는군요.”

류영준의 귀가 붉어졌다.

“그게 비합리적이거나 부조리하다고까지 생각하진 않아요······. 일부러 본 것도 아니고요. 저 그렇게 전투민족 아닙니다. 그냥 신경 쓰여서 나도 모르게 자꾸 힐끔거린 거지.”

류영준이 멋쩍은 듯 웃었다.

“근데 이건 뭐예요?”

정혜림이 류영준의 책상 한 쪽에 세워져있는 책을 가리켰다.

“사업가가 아닌 과학자로 살았다. 지은이 윤대성? 이거 우리 대표님 책이잖아요?”

“맞아요.”

“임원 될 사람이라서 이런 것도 보시는구나······.”

“그런 건 아니에요. 역분화 줄기세포의 다음 타겟을 정하는 데 참고하려고 본 거예요.”

땡!

사무실 입구의 벨이 울렸다.

“누구지?”

정혜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갤 돌렸다.

보통 사무실 벨을 누르는 사람들은 실험 소모품을 납품하러 온 영업사원들이다.

하지만 지금 시각은 저녁 일곱 시. 영업사원이 올 때는 지났다.

“제가 나가볼게요.”

정혜림이 사무실 밖으로 나가더니 곧 썩은 표정이 되어서 지광만을 데리고 돌아왔다.

“본부장님?”

류영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퇴근 안 하셨네요. 다행입니다. 안 계시면 길형준 소장님이나 한 번 뵙고 가려고 했는데.”

지광만은 작위적인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다가 류영준 책상에서 대표의 책을 발견했다.

“아니, 류 박사님이 우리 대표님 책도 읽으시네요?”

“네. 대표님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요. 임원이 되면 볼 일도 더 자주 있을 것 같고요.”

“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정혜림이 가방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녀가 류영준에게 손을 흔들어주면서 “화이팅!” 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근데 무슨 일로 오셨나요?”

류영준이 물었다.

“허허. 별 것 아닙니다. 그냥 류 박사님하고 얘길 좀 하고 싶어서요. 술 한 잔 하시겠습니까?”

***

지광만은 비즈니스맨이다.

그리고 본부장이 되기 전, 에이젠이 아직 작은 중소기업이었을 때 지광만은 로비스트 역할을 주로 수행했다.

SG그룹의 투자를 따낸 것이 지광만이다. 제약회사라는 특성상 정부에서 가해지는 온갖 종류의 답답한 규제들을 풀어온 것도 지광만이다.

그의 로비는 단순하지만 강력했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엮는다. 옆자리에 미인을 붙여준 다음, 그녀의 손을 빌려 비싼 술을 위장에 부어준다. 함께 가장 날것 상태의 인간의 모습을 찾아간다.

그리고 상대방의 성향에 맞추어 금품이나 비밀 정보, 특정 인물과의 만남 등의 카드를 쓴다. 여기에 적절한 논리와 손익 계산을 덧붙이면 성공이다.

하지만 지광만은 류영준을 그런 방식으로 이끌지 않았다.

“여깁니다. 여기가 조용하고 분위기도 있고, 딱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그런 술집이죠.”

그가 안내한 곳은 고급 스카이라운지 바.

“전 본부장님 나이대의 분들은 룸싸롱 같은 데 가시는 줄 알았어요.”

류영준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하하. 그런 사람들도 많지요. 하지만 전 여자 끼고 술 먹고 그런 자리는 질색이라서요. 술 어떤 거 좋아하십니까?”

“글쎄요. 술을 잘 안 먹어서요.”

“와인 어떻습니까? 여기 세트 메뉴가 있네요.”

비싼 양주 시켜봤자 류영준이 알아볼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역효과만 날 수 있다.

“좋아요.”

지광만은 바텐더를 불러 와인 한 병과 카나페를 주문했다.

몇 잔의 술을 나눈 후에 지광만이 본론을 꺼냈다.

“류 박사님. 혹시 에이젠의 자회사를 만들어보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회사요?”

“류 박사님이 직접 사장이 되어 회사를 이끌면 훨씬 자유롭게 연구를 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분도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류영준이 대답 없이 와인을 조금 마셨다.

지광만이 속으로 미소 지었다.

‘됐다.’

의표를 찔렀다. 류영준이 원하는 건 돈도 명예도 아니다. 그런 게 필요했으면 한참 옛날에 퇴사하고 벤처 하나 차렸을 것이다.

류영준의 목표는 ‘연구’다.

회사 지분을 놓고 싸우면서 경영권에 기어올라 사업가 같은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착각해선 안 된다.

경영에 간섭하려고 했던 이유는 김현택과 있었던 마찰 때문.

류영준이 종교처럼 떠받드는 연구윤리를 지키기 위해서 경영진이 손대지 못하는 권력을 완성하려 했던 것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 연구의 자치권을 확보시켜주면 아군으로 구슬릴 수 있다.

아주 천재적인 아이디어다.

경영권 승계를 위한 자회사를 설립하고 윤보현은 법적으로 허용되는 선에서 자회사의 최대 지분을 가진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못한 지분과 함께 그곳 CEO 자리를 류영준에게 준다.

남은 지분은 에이젠 본사가 차지하면 끝이다.

본사에서 일감 몰아주기 같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천재 과학자 류영준이 알아서 그 회사를 거대하게 만들어놓을 테니까.

그리고 그건 윤보현의 힘을 키우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윤보현이 할 일은 류영준과 친해지는 것뿐.

나이도 비슷하니 적당히 맞춰주면서 같이 취미 생활이라도 하면 쉽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엔 에이젠 본사와 병합하면서 류영준을 윤보현의 오른팔로 만들어준다.

완벽한 그림.

윤대성 옆에 니콜라스가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광만이 씨익 웃으며 류영준을 바라보았다.

‘거절 못하겠지? 너무 달콤하고 완벽한 제안이니까.’

톡.

류영준이 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지광만을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자회사 말고, 저는 에이젠의 계열사를 차릴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억!”

지광만은 하마터면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육성으로 비명이 나왔다.

“뭘······. 뭘 만든다고요?”

지광만의 목소리가 떨렸다.

“에이젠의 계열사요.”

“······.”

자회사와 계열사는 다르다. 전자는 모회사인 에이젠이 지분 50%이상을 보유해서 완전한 지배권을 갖고 있는 회사다.

하지만 계열사는 기본적으로 경영이 독립된 회사다.

같은 집단에 속하는 기업과 지분율을 얼마나 공유하느냐가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지만 별개의 회사라고 봐야한다.

“그리고 그 계열사는 제가 지분을 100 퍼센트 소유하고 시작했으면 합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갈수록 태산이다.

“류 박사 혹시 오늘 나 만나기 전에 이미 술 마셨습니까?”

“아뇨. 진지하게 하는 얘깁니다. 본부장님이 이 안건 통과되도록 좀 도와주십사 하고요.”

“······. 왜 계열사를 만들려고 하는 겁니까?”

“본부장님이 방금 말씀하셨잖아요. 제가 직접 사장이 되어 회사를 이끌면 훨씬 자유롭게 할 수 있지 않겠냐고? 그걸 안전하게 하려면 제가 그 회사의 지분을 독점하고 있는 편이 가장 확실하죠. 뭐, 나중엔 절세 같은 이유로 지분을 좀 나눌 수도 있지만 일단은 그렇게 할 거예요.”

류영준이 말했다.

“아니, 그 정도로 보수적으로 접근할 거면 창업을 하시는 게 나은 것 아닙니까?”

“에이젠과 한 그룹에 있어야 이곳의 막대한 인프라를 쓸 수 있잖아요.”

“······.”

“제가 에이젠의 이사가 되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 계열사 창설 때문입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계열사라는 개념이 성립하려면, 동일인이 특수관계인과 합쳐서 두 회사의 지분을 30 퍼센트 이상 보유해야 하거든요. 제 변호사 친구가 알려줬습니다.”

“그게······. 그렇긴 한데······.”

“저는 에이젠의 임원이 되는 순간부터 대표님의 특수관계인이죠. 계열사 성립 요건에 맞아떨어집니다.”

“말도 안 됩니다. 법적으로 그렇다곤 해도 회사가 큰 돈 출자해서 계열사를 만든 다음 류 박사한테 통째 줄 것 같습니까? 상식적으로 그럴 것 같아요?”

“에이젠에 비하면 조그만 회삽니다. 200억 정도 규모로 만들 거고요. 그리고 에이젠이 출자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100 퍼센트 금액을 다 낼 테니까요.”

“뭐라고요?”

지금 200억이라고 했나? 이 새끼 진짜 돌아버린 거 아냐?

아니지. 잠깐만.

보통 류영준이 제 정신이 아니라는 감상이 들 때면 항상 뒤통수가 박살나도록 후려 맞았다.

이 놈이 뭔가 좀 허세 같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릴 해대면 그건 진짜다. 이것도 진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니 그래도 200억?

이게 뭐 어디 동네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아직도 주임 연구원 직급에 있는 놈이 200억이 어디서 나와?

“······. 류 박사 아직 에이젠 지분 받은 거 아닙니다. 그걸 팔거나 하려는 거 아니죠? 그리고 그 지분 함부로 팔면 안 됩니다. 당신이 지분 받을 때는 임원이 될 거고, 그러면 1주만 팔아도 공시해야 해요.”

지광만이 경고하듯 말했다.

“압니다. 그리고 에이젠 지분을 팔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피 같은 역분화 줄기세포 지분을 양도해가며 산 건데 왜 팔아요?”

“······. 그럼 류 박사가 혼자서 200억을 대체 어떻게?”

“하하. 제가 수퍼볼 당첨돼서요.”

“농담하지 마십시오.”

“비밀입니다.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

지광만은 술자리가 끝나자마자 그가 아는 모든 연줄에 전화를 돌렸다.

류영준의 계좌 입출금 내역을 조사하기 위해서다.

물론 강력한 보안이 걸린 개인의 금융거래 정보를 쉽게 알아낼 수는 없다.

하지만 지광만은 국세청 같은 정부 내의 돈을 다루는 핵심 기관에도 손이 미친다.

금융거래정보요구권을 발동시켜서 류영준의 계좌를 추적케 했다.

류영준은 태평하게도 전부 동의하고 오픈해주었다.

시간이 계속 흘러 이제 뉴스에서는 손수영의 임상이 성공했다는 얘길 떠들고 있었다.

에이젠 전체가 축제 분위기가 되었을 때, 지광만은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정말이지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다.

녹내장을 정복했다는 뉴스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나왔다.

“X발 그만 좀 방송했음 좋겠네. 그 놈의 녹내장!”

지광만은 아침 출근길에 신경질적으로 라디오를 껐다. 류영준의 이사 선임이 확정되는 주주 총회를 이틀 앞둔 시점이었다.

지금 에이젠 내부에서 류영준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다 못해 다 찢어버리고 우주로 치솟는 중이었다.

이 분위기에 그 놈이 정말로 어디선가 200억을 들고 나타나서 계열사를 만들겠다고 하면 상황이 진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

뚜르르르르.

국세청의 연줄로부터 온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본부장님. 류영준 가난합니다. 빚만 몇 천만 원 있던데요. 제 3 금융권에. 학자금 대출도 있고.

“재산은 아무것도 없고?”

지광만이 통화하며 물었다.

-없어요. 집도 없고 차도 없고. 반지하 월세 살고. 저보다도 가난해요. 어디서 펀딩 받은 것도 없고요.

“당연하지. 그 놈이 개인적으로 펀딩을 몰래 받진 못해. 회사 임원될 사람인데. 하아······. 미쳐버리겠네 진짜.”

이제 이틀 남았다. 이틀.

이틀 만에 200억을 만든다고? 세상에 일당이 100억 짜리인 일도 있나? 이 새끼 대체 뭘 하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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