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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독립 영역 (3) (193/301)

36화.  독립 영역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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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영과 그녀의 남편은 홍주희와 심각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실험 치료법이요······?”

손수영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질산 가스 치료는 실패했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계속 저항이 강해지고 있어요. 이제 곧 한계예요.”

“······.”

“베라텍스라는 신약이 있어요. 천연물 유래 신약이고 혈관을 확장시켜서 혈압을 낮춰줄 수 있어요. 아주 안정적인 약이라서 위험 부담은 적을 겁니다.”

“그것도 예상이 그렇다는 거죠?”

손수영의 남편이 물었다.

“네. 신생아에게 투여된 임상 기록은 없고, 5살 소아에게 사용된 기록만 있어요. 거기선 성공적이었고요.”

“다섯 살이면······. 우리 아기하고는 차이가 많이 나네요.”

손수영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본래 신생아의 몸에서도 생성되는 물질이기 때문에······.”

“선생님.”

손수영이 힘겨운 듯 남편의 손을 꽉 쥐고 간신히 말했다.

“전 오래 전부터 제 욕심 때문에 우리 딸을 괜히 붙잡고 오랫동안 아프게 하는 건 아닐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

“어쩌면 이제 놓아줘야할 때가 아닐까 싶어요. 더 괴롭히고 싶지 않아요.”

손수영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생님한테는 정말,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딸 봐주셔서······.”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홍주희가 말했다.

“제 입으로 이렇게 말하기 부끄럽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제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어제 류영준 박사님이 찾아와서 그러시더라고요.”

“류영준 박사님이요?”

손수영의 눈이 커졌다.

“류 박사님을 만나셨나요? 뭐라고 하셨죠? 혹시······. 베라텍스 쓰자는 것도 류 박사님 얘기였나요?”

손수영이 물었다.

그녀의 표정에서 미약한 기대감이 번지는 게 보였다.

신생아를 지금까지 치료해온 의사 홍주희가 당연히 신생아 폐동맥 고혈압증에 대해 제약 연구원인 류영준보다 더 잘 아는 게 정상이다.

홍주희의 손에서 해결되지 않은 걸 류영준이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손수영은 의학이나 제약을 잘 모르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리고 손수영에게 류영준은 의사나 연구원 이상의 특별한 존재다.

손수영은 줄기세포 시신경 치료를 받은 후 천천히 돌아오는 시력을 매 초마다 실시간으로 느낀 사람이다.

그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사방에서 그 위대한 업적을 칭송해대니 더욱 마음에 바람이 들었다.

어쩌면.

어쩌면 류영준이라면 뭔가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손수영의 눈빛에 간절함이 어렸다. 그녀는 베라텍스를 쓰자는 주장의 근원지가 류영준이길 바라고 있었다.

“류 박사님이 추천해주셨어요.”

홍주희가 말했다.

“그리고 의사로서 제가 그 약을 선택했습니다. 그 약은 지금 시판 허가된 고혈압 치료제 중에서 가장 안전한 약이에요.”

“그럼······.”

“우리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요. 파랑이도 지금까지 참고 버텼잖아요.”

***

꽤 오랜 시간 신중하게 고민한 끝에 역분화 줄기세포의 다음 타겟을 정했다.

‘알츠하이머.’

여덟 개 정도의 후보들 중에서 엄선한 목표다. 관절염과 척추손상도 많이 고민했는데 일단 알츠하이머로 결정했다.

많은 사람들이 치매와 알츠하이머를 혼동하지만 그 둘은 조금 다르다.

사람이나 사물을 잘 인지하지 못하거나 기억에 장애가 생기는 증상을 한 데 묶어서 치매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원인 중 하나가 알츠하이머라는 병이다.

전자는 증상이고 후자는 질병의 이름인 셈이다. 예를 들어, 치매는 ‘콧물이 나고 기침이 남.’ 같은 것이고, 알츠하이머는 ‘독감.’ 같은 느낌이다.

콧물 나고 기침이 나도 독감이 아니라 그냥 감기일 수 있듯이, 치매 증상이 있어도 알츠하이머는 아닐 수도 있다. 혈관성이나 노인성 치매 등도 있다.

하지만 치매 환자 중 절반은 알츠하이머병이기 때문에 무시못할 정도로 심각한 병이다.

그럼 알츠하이머란 정확히 어떤 것일까?

알츠하이머는 뇌 속에 축적된 베타 아밀로이드라는 물질이 신경독성을 유발하여 신경세포 사멸을 유도하는 질환이다.

신경세포들이 죽으면서 치매 증세가 오는 거다.

화이자를 비롯한 수많은 제약사들이 개발했고, 개발하고 있는 신약들은 베타 아밀로이드를 분해하는 것으로, 알츠하이머의 진행을 늦추고 예방한다.

하지만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에 의해서 이미 파괴된 신경세포를 복구하진 못한다.

즉, 한 번 알츠하이머의 진행을 막을 수는 있지만, 이미 치매 증세를 보인다면 그걸 되돌리진 못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얘기하면 그 신경세포들을 되살려주면 치매 증세를 없애고 알츠하이머를 치료할 수 있다.

이게 얼마나 고난이도의 일인지는 비전공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아무리 류영준이 역분화 줄기세포를 만들어서 줄기세포 재생의학을 닫힌 문을 뚫어버렸다 해도 그 너머가 첩첩산중이다.

일단 역분화 줄기세포를 뇌신경세포로 분화시키는 작업.

보통의 과학자들에게는 10년 치 연구 대상이지만, 어찌어찌 해냈다고 치자.

그러나 제작이 가능한 것과 양산이 가능한 것은 다른 문제다.

뇌의 신경세포는 1,000억 개 정도이므로, 그 중 1 퍼센트만 손상되었다고 쳐도 10억 개의 신경 세포를 채워줘야 한다.

의사가 넣어준 신경 세포 중에선 자리를 잡지 못하고 죽는 놈들도 있을 것이므로 실제로 들어가는 양은 10억 개 이상이 될 것이다.

기적적인 세포 배양 기술로 그 문제도 해결했다고 치자.

녹내장을 치료할 때 시신경은 망막 위치에 주사기로 찔러서 넣었다.

그럼 뇌의 신경세포는 비슷하게 하면 될까?

환자의 두개골을 톱으로 잘라서 열고 뇌 안의 조직이 괴사한 지역을 확인하고 주삿바늘을 찔러 넣고 새 신경세포를 쏟아 부으면 될까?

알츠하이머 환자 대부분의 나이가 60대 이후라는 걸 감안해야 한다.

체력과 회복력이 크게 떨어지는 노년의 환자가 그만한 스트레스의 수술을 견뎌내기는 쉽지 않다.

아마 로잘린이 아닌 보통의 과학자들에게 알츠하이머를 줄기세포로 치료하는 것은 화성을 테라포밍하는 것과 비슷한 난이도일 것이다.

따라서 알츠하이머 치료는 다른 루트를 취해야 한다.

그 방법은 로잘린이 알려주었다.

<조언 듣기 : 줄기세포의 조직 내 분화법에 대하여. 피트니스 소모량 : 2/1초>

<조언 듣기 : 줄기세포의 대량 생산에 대하여. 피트니스 소모량 2.3/1초>

<조언 듣기 : 줄기세포의 정맥 투여법에 대하여. 피트니스 소모량 : 1.8/1초>

‘소모량 실화?’

“류 박사님!”

박동현이 실험실 쪽에서 튀어나와 말을 걸었다.

“네?”

“시그마 알드리치에서 류 박사님이 주문한 물품 왔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근데 무슨 ATP를 대량으로 사셨어요? 3백만 원이나 쓰셨던데.”

“제가 개인적으로 좀 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하하.”

류영준은 둘러대며 복도로 나갔다.

ATP가 들어있는 커다란 아이스박스 두 통을 바닥에 둔 채, 영업 사원이 수첩에 뭔가를 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류영준이 인사하자 그가 반색했다.

“안녕하세요! 류 박사님. 주문하신 ATP입니다. 이건 명세서고요.”

“이건 제가 사비로 사는 거라서 예산으로 구매처리 안 할 거예요. 지금 카드로 계산해주세요.”

류영준이 카드를 내밀었다.

“사비로 사신다고요?”

“네.”

“알겠습니다.”

영업사원은 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카드리더기를 내밀었다.

결제하고 물품을 정리하려는 류영준에게 그가 수첩을 내밀었다.

“저기, 류 박사님.”

“네?”

“사인 좀 해주실래요?”

“······.”

“저도 생물학 석사까지 한 사람이에요. 지금은 세일즈를 하고 있지만 한 때는 연구도 했고요. 팬입니다.”

그가 쑥스럽게 웃었다.

***

제 6 연구소로 온 이후 류영준의 이미지는 하루가 다르게 변했지만 요즘의 상승세는 정말이지 너무 가파르다.

처음엔 구내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내려가면 사람들이 아예 누군지조차 몰랐다.

연말 세미나 이후에는 힐끔힐끔 눈여겨보기 시작했고, 사이언스 발표 이후엔 사방에서 찾아와 미팅과 협력 프로젝트를 요청했다.

그런데 그 후에 임상까지 성공해서 회사 주가를 상한으로 끌어올리면서 뉴스와 신문을 휩쓸어버렸다.

이제는 식당에 내려오면 줄 서있는 과학자들이 순간 조용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무슨 구경이라도 하는 듯 쳐다보면서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것이다.

‘진짜 적응 안 되네······.’

솔직히 부담스럽고 불편할 뿐이다. 그냥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스타덤에 올랐으니 이렇게 되는 거지. 어쩔 수 없어.”

점심을 먹으면서 천지명이 말했다.

“근데 진짜 부담스럽긴 하겠어요. 류 박사님. 솔직히 옆에서 같이 밥 먹는 제가 부담스러울 정도거든요?”

정혜림이 말했다.

“임원 되면 구내식당 잘 안 오니까 그 땐 괜찮겠죠.”

박동현이 말했다.

임원들은 보통 구내식당을 이용하기보단 자기들끼리 무리지어 나가서 먹는다.

“류 박사는 길형준이랑 같이 밥 먹으면 되겠네.”

천지명이 킥킥 웃으면서 말했다.

“윽. 저 불편한 사람들하고 밥 잘 못 먹어요.”

“길형준은 류 박사님하고 같이 밥 먹으면 체할걸요?”

박동현이 류영준의 말투를 흉내냈다.

“소장님! 동의 없이 함께 먹는 탕수육에 소스를 붓는 것은 식사 윤리 위반입니다. 탕수육은 우리 둘이 반씩 돈을 냈으니 소장님한텐 절반의 지분만 있습니다. 절반만 가져가서 소스도 절반만 부으십시오. 나머지 절반은 제가 찍먹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식당 고를 때 서로 번갈아가면서 정하기로 계약서 작성하시죠!”

“풉!”

정혜림이 마시던 물을 살짝 뱉었다.

“제 이미지 그 정도인가요?”

류영준의 귀가 붉어졌다.

“지옥에서 올라온 연구 윤리의 화신 같은 거랄까······.”

고순열이 안경코를 쓱 밀어 올리며 말했다.

“근데 류 박사, 이사 선임은 언제 되는 거야?”

“다음 번 주주총회 때 안건이 나올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어머머. 그럼 일주일밖에 안 남았네요?”

배선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제 류 박사 볼 시간이 일주일밖에 없다니 맘이 아프네. 임원 되면 개인 사무실 받아서 그리로 이동할 테니까.”

“그 부분 말인데요.”

천지명의 앓는 소리 끝에 류영준이 말했다.

“만약 제가 회사를 차리면 선배님들 저랑 같이 일하실 생각 있나요?”

“회사를 차린다니?”

천지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에이젠 CEO 하겠다며? 최대주주도 하고?”

“네. 물론이에요. 그 목표는 변함없습니다. 그리고 에이젠의 인프라를 떠나면 줄기세포의 후속 연구도 하기 어려우니 에이젠에는 붙어 있어야 해요.”

“그럼 회사 차린다는 게 무슨 소리에요?”

박동현이 물었다.

“시신경 치료가 임상에서 성공을 거뒀고 사방에서 투자가 들어오고 있어요. 이사회에서도 이걸 최대한 크게 만들어보려고 생각하고 있겠죠.”

“흠.”

“그렇게 커질 만한 아이템을 하나 준비했어요. 이걸 성공시키면 이번 녹내장 치료는 우습게 보일 정도의 파장이 일게 될 겁니다.”

“전 벌써 무섭네요.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를 내고 그걸 진행하실지.”

박동현이 표정에 설렘이 가득했다.

“알츠하이머를 치료할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

테이블에 적막이 흘렀다.

“이 정도면 더 이상 회사 내의 한 부서로 존재할 만한 일이 아니에요. 역분화 줄기세포 아래에 걸려있는 거대한 파이프라인이 두 개가 되죠. 그 중 알츠하이머 치료제는 웬만한 중견기업 수준의 가치가 있고요.”

“그렇지. 알츠하이머 정도면 그럴 만하지.”

천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문제는 그 모든 걸 이사 한 사람이 쥐게 된다는 겁니다. 본사 입장에서는 좋으면서 동시에 좀 난처할 겁니다. 저한테 너무 많은 권력이 집중되니까요. 절 이용해서 윤대성 대표님을 견제해보려는 사람들이 생길 테고, 반대로 윤 대표님도 제가 불편해지겠죠.”

“이사회에 분열이 생길 수 있다?”

“네. 그걸 이용해서 저는 에이젠을 그룹화하고 계열사를 만들자고 제안할 생각입니다. 일정 금액을 내고 에이젠의 인프라를 전부 쓸 수 있는 계열사요. 제가 그쪽 오너 겸 CEO로 빠지고요.”

“허······. 너무 꽃밭인데. 그게 쉽게 될까? 자회사라면 몰라도 지분 지배 구조가 없는 계열사는 보통 혈연 같은 걸로 묶인 로열 패밀리가 만드는 거라서······.”

천지명이 턱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류영준이 싱긋 웃었다.

“몇 가지 계획해둔 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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