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제 1 저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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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광만 본부장은 류영준을 가만히 주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부리부리한 눈빛이 굉장히 부담스럽고 강렬하다. 꼭 천 년 묵은 두꺼비가 먹잇감을 집어삼키기 직전의 표정 같았다.
하지만 묘하게도 공격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그건 계산기를 두들기는 표정이었다.
지광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머릿속에서 온갖 경우의 수를 셈하고 손익을 따지는 게 느껴졌다.
류영준의 손에 약간 땀이 찼다.
대답이 늦어지니 조바심이 났지만 숨을 꾹 눌러 참고 신중하게 기다렸다.
긴장감 어린 대치 상태가 이어지길 몇 분.
“재밌네요.”
지광만이 말했다.
“재밌는 얘기에요. 내가 근래에 만나본 사람 중에 제일 신비로워요. 류 박사님.”
“······.”
“하지만 류 박사님. 대리급 연구원이 화이자로 가겠다는 협박에 내가 쩔쩔 맬 만한 사람 같습니까?”
“글쎄요. 하지만 적어도 직급만으로 사람의 실력을 전부 평가하는 분 같진 않습니다.”
지광만이 피식 웃었다.
“한 마디를 안 지네요. 확실히 배짱 하나는 황 소장한테 욕도 할 만한데······. 하지만 그런 배짱은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부릴 수 있는 겁니다. 아시죠? 그게 없으면 허세에 지나지 않잖습니까.”
“물론입니다.”
“그 실력을 어떻게 증명할 겁니까? 세미나에서 좋은 성과를 보여줬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음 일은 다음 문제이지, 이전 성과와는 상관없습니다. 그렇죠?”
“역분화 줄기세포로 신경 치료를 하겠습니다. 동물 실험 모델에서 성공시킬 테니, 그 다음엔 임상을 준비해주십시오.”
“시간은 얼마나?”
“한 달이면 됩니다.”
“류 박사님. 저는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생물학도 따로 공부했습니다. 실험은 못해도 이론은 웬만한 햇병아리 박사들만큼 압니다. 류 박사님의 역분화 줄기세포가 얼마나 큰 기술인지도 압니다. 이제 막 시작 단계라는 것도요. 근데 겨우 한 달만에 전임상을 끝내겠다?”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과학자들 십수 년 걸려도 못할 일입니다. 아시죠?”
“네.”
“······. 흐음.”
지광만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창가로 이동했다.
팔짱을 끼고는 밖을 내다보며 또 생각에 잠겼다.
“류 박사님. 난 비즈니스맨입니다. 그래서 이익만 생각합니다. 손익을 따져서 이득이 되면 뭐든 합니다. 그게 대리급 직원한테 엄청난 결재권을 주는 일이든, 개인에게 대형 특허의 10 퍼센트 지분을 주는 일이든.”
“······.”
“하지만 류 박사님에게 그 권력을 주는 게 정말로 회사에 이익일지는 모르겠군요.”
지광만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류영준을 쏘아보았다.
“한 달만에 역분화 줄기세포로 신경 치료 전임상을 끝낼 수 있다고요? 그 정도 실력이 있으면 왜 우리 회사에 아직 남아있습니까? 나 같으면 창업을 할 텐데? 그 편이 훨씬 돈을 많이 벌고 대우도 잘 받을 수 있잖습니까?”
“그래봤자 조무래기 약들이나 만들겠죠. 역분화 줄기세포로 인공 장기를 배양하고 새로운 조직으로 분화시키는 연구를 할 수 있는 기반 인프라는 여기밖에 없습니다. 전 그 연구를 하고 싶고요.”
“그게 답니까?”
“답니다. 체내에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가진 채 힘들게 살아가는 환자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전 역분화 줄기세포를 발전시켜 그들을 치료해주고 싶습니다.”
“류 박사님 같은 인간 유형이 나는 잘 이해가 안 되는군요. 김현택 소장하고 그렇게 싸우고 회사에 정 다 떨어졌을 텐데, 고작 줄기세포를 연구하고 싶고, 그 인프라 때문에 여기 남는 것이다?”
“맞습니다.”
“순수하게 신약 개발에 대한 열정 때문이라는 겁니까?”
“제가 황 소장님하고 싸우고 좌천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지광만이 눈을 꾹 감았다.
“압니다.”
셀리제너가 개발한, 더 우수한 간암 신약을 없애버리면서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안 류영준이 그건 연구 윤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분노를 터뜨렸고, 김현택의 면전에 욕을 퍼붓고 싸웠다고 했다.
자, 류영준은 어떤 인물이지?
정치적인 계산이 티끌만큼이라도 있었다면 김현택 같은 권력자를 그렇게 들이받지는 못한다.
그건 정말로 순수하고 윤리적인, 손익 계산을 못하는 연구자이기 때문에 일으킨 사고다.
윤보현도 그렇게 리포트를 했지. 류 박사가 과학과 연구윤리에 미쳐있는 괴짜 천재라고.
저 실력으로 창업을 하면 작은 약들 만들어 팔면서 부자로 여생을 편히 보낼 것이다.
근데 그렇게 하지 않고 에이젠에 남는 이유가 줄기세포를 약으로 개발하고 싶어서라고 얘기하고 있다.
길형준 같은 구렁이들이 저딴 말을 했다면 단칼에 잘라버리고 믿지 않았을 거다.
그만한 예산의 결재권을 쥘 정도의 권력자가 혹여 경영권에 딴 마음을 품기라도 했다면 위험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 청년이 이전에 보여준 전례들은 어떤가?
“······.”
지광만이 눈을 떴다.
“좋습니다. 한 달. 시간을 드리죠.”
속는 셈 치고 좀 더 지켜보자.
“그 기간 안에 동물 실험 모델에서 성공시켜서 가져와보세요. 그 때까지 이 특허 출원은 가출원 상태로 넣어놓을 거고, 계약서도 보류하고 있겠습니다.”
“성공하면 그대로 진행해주시는 거라고 확답을 주십시오.”
“성공하면 류 박사님이 올린 이 특허출원신청서와 계약서. 둘 다 승인해주겠습니다. 내가 보증하죠. 그리고 한 가지 더.”
지광만이 덧붙였다.
“줄기세포 부서에도 같은 업무를 하달하겠습니다. 역분화 줄기세포 기술을 공유해주십시오. 그걸로 어떤 질병 모델을 치료하든 그건 상관지 않겠습니다. 류 박사님과 줄기세포 부서가 서로 결과물이 달라도 됩니다.”
“줄기세포 부서······. 본부장님도 말씀하셨듯이 한 달만에 동물 실험에서 질병 치료에 성공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 쪽 부서에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못한다고 징계를 내리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류 박사가 정말로 다른 과학자들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라는 걸, 그래서 우리가 90%에 이르는 특허 지분을 맡길 가치가 있다는 걸 증명하려면 대조군이 있어야하지 않습니까?”
“······. 좋습니다.”
대조군이란 말에 류영준의 입가가 올라갔다. 신약 후보의 효능을 입증할 때, 경쟁 물질만을 처리한 별개의 샘플을 일컫는 과학 용어다.
본부장 지광만. 미친개니 조폭이니 하는 소문들이 파다했는데, 실제로 보니까 철저하게 이성적인 사람이다.
극도의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판단이 역설적으로 괴물이나 광인처럼 보일 때가 있는 법이다. 지광만은 그런 타입의 인간이었다.
이익과 성공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소시오패스 같은 인물형 말이다.
확실히 사람들이 벌벌 떠는 데 이유가 있다.
아.
그러고 보니까 그런 쪽으로 끝판 왕이 머릿속에 있었지?
사람 목숨을 손익 분기점으로 계산한 후에 바이러스를 퍼뜨려서 독감을 뿌리 뽑자던 놈. 진짜 미치광이, 차원이 다른 싸이코패스 로잘린······.
맥락이 좀 이상하지만 어쩐지 묘하게 든든한 느낌이다.
“그럼 한 달 후에 뵙겠습니다.”
류영준이 인사하고 일어났다.
***
한 달이라.
직접 걸어놓은 조건이긴 하지만 줄기세포 부서에겐 정말이지 미안할 정도다.
역분화 줄기세포를 만드는 레시피를 전해준다 해도 재현하는 데 한 달은 걸릴 거다.
하물며 그 기간 안에 그걸로 질병 모델 동물을 치료까지 하라니.
‘그게 되면 줄기세포 부서 연구원들이 거기에 안 있지. 연구 소장이랑 자리 바꿨지······.’
하지만 어차피 경쟁하게 된 거, 이쪽도 전력을 다해서 확실하게 넘어선다.
류영준은 배선미 책임 연구원을 찾아갔다.
그녀는 컴퓨터로 누드마우스 모델 자료를 보고 있었다.
“책임님.”
류영준이 부르자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누드마우스 보고 계시네요.”
“하하. 우리 업무하고는 별로 관련은 없지. 딴 짓 하다가 걸렸네.”
배선미가 머쓱해하며 인터넷 창을 닫았다.
누드마우스는 실험용 생쥐의 일종으로 면역 능력이 없는 쥐다.
추가로 털도 한 올도 없는데, 그 때문에 누드마우스라고 불린다. 주로 면역 반응에 대해 연구할 때 쓴다.
그리고 배선미는 원래 실험동물자원 센터에서 근무하며 동물 실험을 주로 담당했던 연구자였다.
둘째를 낳았을 때 육아휴직과 관련한 이런저런 문제로 상사들과 마찰이 심해지면서 여기로 오게 됐다.
하지만 여기서 세포의 생합성 실험을 하면서도 배선미는 동물 실험에 미련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 때문에 가끔씩 새로운 동물 모델이나, 에이젠 또는 다른 회사들에서 상품으로 내놓는 동물 실험 서비스들을 뒤적이며 구경하곤 했던 것이다.
“혹시 동물 실험 좀 해볼 수 있을까요?”
류영준이 물었다.
“우리 부서에서요?”
“마우스 실험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 생각해둔 거 있어요?”
“시신경을 만들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배선미의 얼굴에 충격이 번졌다.
“시신경······이요?”
“네.”
“눈 안에 망막에 있는 그거 말하시는 거예요? 내가 아는 그 시신경?”
배선미가 물었다.
“네.”
“그게 줄기세포를 이용해서 만들 수가 있는 거예요?”
“줄기세포는 모든 세포로 분화 가능합니다. 신경 세포도 당연히 가능하죠.”
마치 ‘우주선은 우주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럼 당연히 화성이나 목성에도 갈 수 있잖아요? 우리 다음 야유회는 목성 어때요?’ 하는 것처럼 들린다.
역분화 줄기세포도 대단한 일인 것은 맞지만, 그걸로 시신경을 대체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거의 미개척된 오지나 다름없다. 거짓말 아니고 진짜로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류영준이 이렇게 어려운 타겟을 잡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건 의약에 새로운 바람을 예고하는 종소리다. 막대한 임팩트로 전 세계에 명성을 떨쳐야 한다.
그걸 위한 표적이 ‘시각’이다.
몇 년 전, 제약 회사 스파크가 룩스터나라는 약을 내놓아서 화제가 되었다.
이 약은 망막에서 작용하는 유전자 치료제다.
RPE65라는 유전자가 망가진 유전병 환자들의 망막 세포에, 인공 합성된 RPE65 유전자를 바이러스로 집어넣어주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될까?
환자들은 앞이 전혀 안 보이는 상태에서, 흑백 명암을 구별하는 정도로 시력이 개선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야말로 삶의 질이 무지막지하게 상승한다.
눈앞이 아예 검은 것과, 흑백 윤곽이 구별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천지차이 아닌가.
약의 가격은 눈 한 쪽에 1억.
어마어마한 가격이었지만 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다.
당연한 일이다.
좀 거칠게 말해서, 사는 데 지장 없다면 자기 간이나 신장을 일부 떼다 팔아서라도 하고 싶지 않을까?
그 정도로 인간은 시력이라는 감각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룩스터나가 그 엄청난 위용을 떨친 후, 제약 산업에는 신비한 바람이 불었다.
바로 유전자 치료제 시장의 붐이다.
장님의 눈을 뜨게 했다는 이야기의 임팩트가 너무 강력했던 것이다.
그 동안은 유전자 치료제가 위험할지도 모른다, 아직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았다, 하면서 반대하던 사람들의 명분이 없어졌다.
‘위험하고 자시고 집어 치워라, 당장 우리 애가 죽게 생겼는데! 룩스터나도 됐잖아!’ 하는 목소리들에 묻혀버린 것이다.
제약 시장의 분위기가 반전되어서 더 이상 유전자 치료제의 개발을 억제하기가 어려워졌다.
에이젠을 비롯한 수많은 제약사들이 유전자 치료제 개발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었고, 각국의 정부도 엄청난 돈을 퍼부어 지원해주었다.
그 결과 불과 몇 년 사이에 수십 종의 신약들이 임상 시험에 들어갔던 것이다.
줄기세포 치료제도 똑같다.
이것은 최초의 역분화 줄기세포 치료제다.
막강한 임팩트로 세상에 그 위용을 떨쳐야 한다. 단번에 의학계의 중심에 우뚝 서서 모두의 주목을 끌어 모아야 하는 것이다.
어디 한 번 해보세요, 했던 지광만이 ‘아이고 선생님 이 정도까지 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고 감동의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래야 역분화 줄기세포를 이용한 후발 주자 신약들이 그 바람을 타고 순항할 수 있다.
“시신경은 척수나 뇌 같은 것에 비해서는 훨씬 건드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환자의 삶의 질을 엄청나게 개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막중하죠.”
류영준이 말했다.
“그야 그렇지만 더 쉬운 모델들부터 파보는 게······.”
배선미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괜찮습니다. 할 수 있을 거예요. 배 책임님, 혹시 망막 변성 모델 쥐를 좀 구할 수 있을까요? 엔드 스테이지로요.”
망막 변성 모델, 엔드 스테이지.
이 정도면 망막 세포가 모두 맛이 가버려서 앞이 전혀 안 보이는 상태의 쥐다.
그에게 시신경을 새로 만들어줄 것이다.
평생 앞을 못 보고 살았을 그 쥐에게 시각이라는 감각을 새로 만들어준다.
룩스터나는 멀쩡한 시신경의 특정한 유전병 하나만을 간신히 조금 개선시키는 치료제였다.
그런데도 그 정도의 파도를 일으켰다. 하지만 이것은 아예 전부 괴사된 시신경을 통째로 재건하는 기술이다.
눈 뜨는 게 어디 쥐 몇 마리뿐일까. 전 세계 과학자들과 의사들이 의학의 새로운 미래에 대한 비전을 얻을 것이다.
“내가 구해볼게요. 어떻게든.”
배선미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