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제 1 저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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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면체 쯤 되는 듯한 구형의 물질. 표면에 오돌토돌한 수용체가 솟아있다.
연녹색의 바이러스는 이 골든리트리버의 입을 통해 들어갔다. 백혈구를 감소시키고 구토와 탈수를 유발했다.
그리고 지금은 증세가 매우 나쁘다. 치료가 없으면 앞으로 6 시간.
그 시간 안에 죽는다.
동물 병원은 문을 닫았지만 방법이 없지 않다.
류영준은 바이러스의 표면과 감염된 세포들에 작용하는 화학물질의 구조를 추적했다.
다섯 종류의 치료제가 떠올랐다.
“약국으로 갑시다.”
류영준이 말했다.
“네?”
“약국 지금 여실 수 있죠? 빨리요. 서둘러요.”
류영준은 리트리버를 번쩍 안아들고 송지현의 약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같이 가요!”
송지현은 황급히 그 뒤를 쫓았지만, 30 킬로그램의 리트리버를 안은 류영준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물론 로잘린 때문이다.
이윽고 약국 앞.
송지현은 열쇠로 문을 열면서도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워낙 경황이 없는 와중에 약국으로 가자고 힘주어 말하니 휘둘려서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동물 병원이 문을 닫았다고 약국으로 오는 게 맞는 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지?
송지현의 손이 떨렸다.
열쇠가 자꾸 어긋났다.
“침착해요. 괜찮을 거예요.”
류영준이 말했다.
마침내 문을 열고 약국에 들어간 류영준은 리트리버를 한 쪽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동기화 모드를 켜놓은 상태다. 기성품으로 나오는 약들은 상자를 뜯자마자 화학 구조가 보였다.
카운터 위를 약간 어지럽힌 후.
<클레오>
류영준이 찾던 약을 발견했다.
정확히는 그 구성 성분의 일종인 하이드로 코르티손 아세테이트를 찾아낸 것이다.
부신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에 해당하는 물질이고 강력한 항 염증제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세상 그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파보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류영준이 클레오의 길쭉한 끝을 눌렀다. 두 통 정도를 모두 짜서 리트리버에게 먹였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뭘 먹이시는 거예요?”
송지현이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클레오라고 적혔군요.”
“사람 피부 찢어진 데 바르는 연고잖아요!”
그녀가 경악해서 소리를 질렀다.
“맞습니다.”
류영준이 짧게 대답했다.
“안 돼! 미쳤어요?”
놀란 송지현이 달려들어서 류영준을 밀어내고 리트리버를 끌어안았다.
“브라우니!”
그녀가 리트리버의 뺨을 흔들면서 약을 토해내게 하려고 했다.
“이름이 브라우니에요? 작명 센스참······.”
송지현은 대꾸하지 않고 화가 난 표정으로 찬장에서 과산화수소수를 꺼냈다.
그리고는 얼른 정수기로 달려가서 찬물을 받아왔다.
과산화수소수와 1대 1 비율로 섞으려는데 류영준이 팔을 붙잡았다.
“토하게 하려는 거죠? 그럴 필요 없어요.”
“이거 놔요! 당신 지금 우리 개한테······.”
“당신 강아지 살았어요. 보세요.”
류영준이 브라우니를 가리켰다.
여전히 일어나지는 못했지만 의식을 차렸다. 눈을 뜨고 송지현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
송지현의 얼굴에 충격이 번졌다.
“끙. 끙.”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자 브라우니는 신음소릴 내면서 송지현의 손가락을 핥았다.
“그래봤자 임시방편입니다. 이따 아홉시에 동물병원 열리면 바로 데려가요. 파보바이러스 감염으로 보이니까. 특별한 약이 존재하지 않는 질병이에요.”
정확히는 지금 시점부로 약이 존재하게 되었지만.
“개가 혼자 이겨낼 수 있도록 징후들을 잡아주면서 잘 보살펴줘야 할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클레오를 더 투여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동기화 모드로 관찰한 브라우니는 빠르게 호전되고 있었다.
큰 개니까 충분히 쉬고 잘 먹는 것만으로 자가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 뭘 어떻게 하신 거예요?”
송지현이 당혹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 피부에 바르는 연고가 개한테 약효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죠?”
로잘린이 알려줘서 알았지.
그러나 사실 송지현이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판되고 있는 약이라도 다른 특정한 환자, 특정한 질병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약효나 독성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약사나 의사, 과학자들은 그걸 모른다.
수천 년 동안 먹어온 토마토 같은 채소도 갑자기 항암 효과며 항산화 효과며 하는 것들이 뜬금없이 발견되곤 하지 않는가.
시판되고 있는 약들도 똑같다. 그걸 연구하고 제품화한 연구원들도 모르는 특성이 있을 수 있다.
최근에는 미노사이클린이라는 항생제가 치매를 지연시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서 꽤 이슈가 됐었다.
미노사이클린은 이미 제품으로 시판되고 있었지만 그 동안 그 누구도 그게 치매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당연한 거 아닌가? 장내의 박테리아 따위를 죽이는 데 쓰는 독극물이 사람의 뇌세포가 파괴되는 걸 방지할 거라고 대체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못 하니까 실험해볼 일도 없다.
실험해본 사람이 없으니 그 효과도 알려지지 않는다.
그것과 똑같다.
사람의 피부가 찢어진 데 바르는 연고를 개한테 먹이면 파보바이러스의 증식과 염증을 억제할 수 있다는 걸 누가 뭐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진짜로 로잘린이 아니면 한 100년 동안은 아무도 몰랐을 거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약사인 송지현의 눈에는 무슨 마술이라도 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로잘린이 알려준 거라 얘기할 수도 없지.’
류영준이 둘러댔다.
“최근에 저희 회사 내부에서 나온 데이터 중에서 관련 자료가 있었어요. 그 쪽 강아지 상태가 위급해 보여서 쓴 거지만, 저희 사내 기밀이니 어디 가서 얘기하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상황이 급하고 하니 믿고 알려준 거예요. 강아지 죽일 순 없잖아요.”
“······.”
송지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류영준을 쳐다보았다. 아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것 같았다.
류영준이 말했다.
“뭐, 아무튼 이따가 동물병원 문 열면 꼭 가보시고요. 이만 가볼게요. 운동하다 왔더니 씻고 싶어서.”
“잠깐만요!”
류영준이 나가려는데 송지현이 황급히 붙잡았다.
“그······.”
그녀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감사해요. 제가 다음에 식사라도 한 번 살게요. 괜찮으면 연락처 좀······.”
그녀가 우물쭈물하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와, 서른 살 먹도록 여태 번호를 따여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류영준은 그녀의 휴대폰에 연락처를 찍어주었다.
“성함이 류영준이라고 하셨나요?”
그녀가 물었다.
“네.”
“저는 송지현이에요.”
“알아요. 전에 가운 입고 계실 때 명찰을 봤거든요.”
“아, 그랬군요. 저희 브라우니 상태 좀 괜찮아지면 제가 연락드릴게요. 정말 고맙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류영준은 고개를 꾸뻑하며 약국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놀라운 아이디어가 떠올라 흥분감으로 심장이 쾅쾅거렸다.
류영준은 조깅할 때보다 더 빠르게 달려 집으로 이동했다.
샤워를 하는 대신 컴퓨터와 로잘린의 상태창부터 켰다.
‘동물용 신약을 만든다.’
이건 모든 임상 시험을 건너뛸 수 있다.
임상 자체를 할 필요가 없으니까. 동물 실험이 곧 약 개발의 알파고 오메가다.
동물 실험에서 약효를 입증하면 그대로 제품화할 수 있다.
전에는 매출 3조 짜리 독감 신약의 후보를 만들었는데, 갑자기 강아지 질병 치료제로 가니까 급이 좀 떨어지는 느낌은 있지만.
상관없다.
이쪽은 양치기다.
동물들의 질병 치료제는 연구가 잘 안 되었던 만큼, 기존에 발견된 약도 별로 없었다.
예컨대, 파보바이러스를 통찰할 때 튀어나온 치료제는 총 다섯 종이었다. 그리고 그걸 전부 다 특허로 걸 수 있다. 아무것도 기존에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수십 개 이상의 신약 후보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어려운 질병을 잡는 고급스런 약 한 개도 좋지만, 지금처럼 기반이 없을 때는 단기간에 뽑을 수 있는 대량의 신약으로 특허를 쓸어버리는 것도 괜찮다.
게다가 요즘은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약 하나하나의 가치도 그리 낮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축산업으로 범위를 확대하면 스케일이 달라진다.
조류 독감이나 콜레라가 유행할 때마다 폐사되는 개체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 의미 없는 죽음들의 허무함과 막대한 경제적 손실.
비교적 축산업의 규모가 작은 한국도 그렇다. 하물며 미국 같은 나라에선?
상상 이상의 메리트를 낳을 것이다.
***
“끝났다! 프리덤!”
월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변리사 이혜원은 독감 치료제의 특허 출원 서류 작성을 마쳤다.
일주일에 걸친 빡센 작업이었다. 사실 목요일에 초안을 다 완성했지만 좀 더 공을 들여서 봐주었다.
변리사무소를 연 후에 맞이하는 손님으로 사실상 처음이나 다름없었고, 박주혁의 소개를 받고 온 사람이니 열정을 불태웠던 것이다.
이제 본 문서와 자료들을 제출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 전에 류영준에게 서류를 보내줘야 한다. 특허권자도 한 번 크로스체크를 해야 하니까.
띠링.
특허출원신청 관련 서류들을 메일로 보내준 후.
“이제 좀 놀아볼까.”
이혜원은 쿠팡에 들어가서 웹 쇼핑을 시작했다.
키티 캐릭터 디자인의 휴대용 손난로 겸 보조배터리가 19,800원이었다.
이혜원은 그것을 주말에 야근한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삼았다.
‘그리고 집에 생수도 다 떨어졌지.’
2L 생수 6병도 주문했다.
뉴스 기사 몇 개를 떠돈 후 셀카를 찍고 인스타에 올렸다.
<일요일이지만 혼자 출근해서 빡일!! #야근#변리사#특허#혜원국제변리사무소#······.>
‘#신약’을 쓰는데 갑자기 문자가 와서 휴대폰 화면 위에 떠올랐다.
<류영준입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실 때 전화 주세요. 안 주무시면 지금도 괜찮습니다.>
이혜원은 전화를 걸었다.
-네, 변리사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밤늦게 연락 드려 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마침 특허 출원 서류 다 끝난 참이에요. 메일 드렸는데 보셨나요?”
-네. 그거 보고 문자 드린 겁니다.
“예. 괜찮으시면 진행할 거예요. 실험 데이터는 1년 안에만 나오면 되고요. 괜찮으시죠?”
-세포 실험 데이터는 아마 다음 주 중에 나올 것 같습니다. 동물 실험 데이터까지 포함하면 조금 더 걸릴 테고요.
“정말요?”
이혜원이 화들짝 놀랐다.
남들 1년씩 걸리는 작업을 이렇게 빨리 처리하다니.
“정말 잘 되는 약이었나 보네요. 데이터 나오면 알려주세요. 같이 데이터 보면서 특허에서 어떤 부분들 가져갈지 얘기 좀 해요.”
-네. 그렇게 하죠. 그리고 특허 출원할 약이 좀 더 있는데요.
“더 있어요?”
-네. 애완용 및 축산용 동물들의 질병을 다루는 신약입니다. 전부 변리사님께 맡기고 싶습니다.
이혜원이 보내준 특허출원신청서를 검토해보았는데 썩 잘 썼다. 박주혁은 정말로 괜찮은 실력자를 추천해준 것이다.
류영준은 반려동물 신약 시리즈를 모조리 맡기기로 했다.
“몇 개인데요?”
이혜원이 물었다.
-122 개입니다.
“네?”
이혜원이 잘못 들었다는 듯 반응했다.
-총 34개 질병에 대한 122개의 신약을 특허 출원할 겁니다. 지금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충격에 빠진 이혜원이 순간 말을 잃었다.
“······.”
122개?
분명 제대로 들었는데 저 문장이 이해가 안 된다.
어떤 느낌이냐면, 먹방 BJ가 “오늘은 가볍게 빅맥 30개랑 감자튀김 200개. 그리고 콜라 3리터를 먹어보겠습니다.” 라고 얘기하는 걸 듣는 기분.
“백이십이 개라는 게 제가 아는 아라비아 숫자로 백 개 하고 거기 더해서 스물두 개 말씀하시는 거예요?”
-맞습니다. 좀 많죠?
“······.”
이혜원은 잠깐 멍 때리다가 다시 물었다.
“122개라고요? 아니 어떻게······?”
-진정해요. 제대로 들으신 거 맞아요. 메일로 전부 보내드릴 테니까 쭉 검토해주세요.
“약 개발이 어떤 단계인가요?”
-아직 합성 의뢰를 맡기기 전입니다.
“아. 그럼 그 중에서 약효가 있는 걸 골라서 특허 가시는 거죠?”
-아뇨. 전부 다 약효가 있을 겁니다.
“······.”
-리액션케미스트리와 셀바이오를 좀 쥐어짜면 아마 3개월 안에는 나올 겁니다. 돈은 좀 써야겠지만요. 변리사님께는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제가 이 정도로 큰일을 맡아본 적 없어서······.”
-그럼 안 되나요?
“아니요! 하겠습니다! 맡겨주세요!”
이혜원이 힘차게 소리쳤다.
***
월요일 아침.
제 6 연구소장 길형준은 법률 사무소에서 넘어온 서류를 보고 경악했다.
류영준이 쓴 특허 출원 신청서와 전자 기안으로 올린 계약서 때문이다.
“이거 미친 새끼 아냐!”
길형준은 서류를 집어던지고는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렸다.
옆에선 비서가 놀라서 쳐다보고 있었다.
“이 새끼 뭐라고 써놨는지 좀 봐! 자기가 지분을 10퍼센트나 먹고 80퍼센트를 부서 예산으로 쓰겠다는데, X발 회사가 지 놀이터도 아니고!”
그가 책상을 쾅 내리쳤다.
“당장 이 새끼한테 전화 걸어. 아니, 아니다. 그냥 내가 할게. 황 소장한테 욕할 때 알아봤어. 이 회사의 종양 같은 새끼.”
길형준이 거친 동작으로 내선 전화를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