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야심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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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류영준이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최명준과 서윤주 모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제야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이쪽을 쏘아보고 있는 천지명과 배선미, 박동현과 정혜림이 보였다.
서윤주가 침을 꼴깍 삼켰다. 바짝 긴장했다.
류영준은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말했다.
“전에 식당에서 있었던 일. 서 주임님이 잘못하신 거죠?”
그가 물었다.
“······. 네. 맞아요······. 죄송해요.”
서윤주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뭐, 전 생명창조 팀에 들어온 지 일주일 된 신입이었고. 서 주임님이랑 마찰이 있었던 건 사실 우리 팀 선배들이니까. 저한테 죄송하실 건 없어요. 선배들하고 직접 얘기하시면 돼요.”
“······.”
“제가 찾아온 건 그걸 따지려는 건 아니고요. 알려드릴 게 좀 있어서요.”
“알려주실 거요?”
최명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국내의 한 벤처 회사가 프로바이오틱스를 연구 중인데 곧 좋은 제품이 나올 것 같아요.”
셀리제너 얘기였다. 곧 좋은 제품이 나온다는 건 거짓말이었지만.
“어느 회사인데요?”
“그걸 알려드릴 순 없고요. 아마 제품이 나오면 로슈의 액티브유산균보다 더 좋은 게 될 겁니다.”
“네?”
최명준의 얼굴에 충격이 번졌다.
“최 부장님. 에이젠에서 프로바이오틱스를 연구하고 있는 부서는 건강식품이죠?”
류영준이 물었다.
“······. 맞습니다.”
“이번에도 로슈한테 점유율 빼앗긴 걸로 한 소리 들으셨다고 하던데요.”
“네······. 그랬죠.”
“로슈가 에이젠을 제쳤다고 해도 국내와 아시아권의 점유율은 에이젠이 좀 앞서 있는 상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의 벤처 기업이 좋은 제품을 만들면 그 경쟁 대상이 로슈보다는 에이젠이 되겠죠? 국내 시장부터 시작할 테니까요.”
“······.”
“가만히 있으면 다음 연말 세미나 때는 피를 좀 보실 지도 모르겠는데요. 혹시 해결책이 있나요?”
“준비 중입니다.”
“그렇게 여유 부리고 계시면 에이젠이 프로바이오틱스 점유율을 계속 빼앗길 겁니다. 효자 종목이고 미래 산업인데 그대로 잃어버릴 수는 없죠. 저희 부서가 최우수 성과 상도 받았으니 제가 프로바이오틱스를 좀 파볼까 합니다.”
“그건 우리 부서 일이에요!”
놀란 서윤주가 소리쳤다.
“압니다. 하지만 최우수 성과 상을 가지고 있는 부서는 1년 동안 어떤 연구를 하든 자율로 두는 관례가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예산이 있죠. 그리고 일단 우리 모두 에이젠 직원이잖아요? 에이젠이 프로바이오틱스 시장을 넘겨주는 건 우리 모두의 손실 아닙니까? 어느 부서든 막을 수 있다면 막아야죠. 저는 그 벤처보다 더 좋은 아이템도 있거든요.”
“그게······뭡니까?”
최명준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비밀입니다.”
“허, 허세 부리지 마세요. 생명창조 팀에서 동물 세포만 다루신 분이 프로바이오틱스를 어떻게 알아요? 그건 박테리아고 미생물이에요!”
서윤주가 말했다.
“락토바실루스 아시도필루스, 락토바실루스 카세이, 락토바실루스 불가리쿠스, 락토바실루스 람소서스, 비피도박테리움 비피덤, 비피도박테리움 브레베, 비피도박테리움 락티스, 락토코커스 락티스, 엔터로코커스 페칼리스.”
류영준이 갑자기 주문이라도 외는 것처럼 프로바이오틱스 제품의 성분을 줄줄 읊었다.
최명준이나 서윤주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류영준의 눈앞에는 옛날에 봤던 로슈 제품의 성분창이 떠있었다.
“로슈 제품의 성분입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이 박테리아들의 생물학적 작동 메카니즘도 설명해드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락토바실루스 아시도필루스는 락토스를 주로 이용하는 박테리아로, 20여 종의 케미컬을 생산하고 그걸 천연 항생제처럼 사용해서 유해균의 성장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장에 분포시켰을 때 면역 체계의 활성에도 도움이 되고 배변 활동 강화에도 좋습니다.”
“······.”
“다른 균들도 설명해드려요?”
“아니요······.”
서윤주가 침을 꼴깍 삼켰다.
“좋은 아이템이 있다는 말이 안 믿어지시나요? 동물세포 하던 사람이 프로바이오틱스를 잘 아는 건 이상하니까? 하지만 그 만큼 이상한 게 항암제 개발하던 놈이 줄기세포 하는 거였잖아요.”
“······.”
“프로바이오틱스를 시작하면 제가 건강식품 부서의 장비들을 좀 빌려 쓰고 싶은데요. 서로 업무 협조 가능하겠죠? 아니면 프로바이오틱스 태스크포스 팀을 만들거나. 물론 보상도 좀 나눠드릴 겁니다.”
“물론입니다.”
최명준이 반색하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안 된다고 하시면 그 벤처랑 같이 하려고 했거든요.”
최명준과 서윤주가 움찔했다.
류영준이 계속 말했다.
“사실 그 벤처에서 프로바이오틱스 개발한단 얘길 해준 사람이 제가 아는 친구라서요. 하하. 저한테 같이 하자고 그랬거든요. 에이젠이 벤처 회사와 기술 제휴를 맺으면 밖에서 보기에 그림도 좋고. 그렇잖아요? 그래서 그 벤처랑 같이 기술 제휴를 맺고 일을 할까 생각했었죠.”
최명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가, 같은 연구소에 프로바이오틱스를 하는 부서가 있는데 다른 회사랑 손을 잡으실 필요가 있나요······.”
서윤주가 중얼거렸다.
“그쵸? 그럴 이유는 없죠. 하하. 제 친구한텐 좀 미안하게 됐지만. 제 아이템은 건강식품 부서에서 풀고, 그 친구 회사에는 다른 일들을 외주로 주는 게 아무래도 좋겠죠?”
류영준이 말했다.
“그럼요······.”
“근데 서 주임님. 아까 시상식 전에 휴식 시간에 화장실 앞에서 순열 선배를 만나셨다고 하던데.”
“네? 어······. 네. 만났어요.”
서윤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잠깐 얘기 나눴다고 하던데? 사과하셨나 봐요?”
“······.”
류영준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면 더 다투셨어요?”
류영준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게······. 저기······.”
“죄송합니다.”
최명준이 재빨리 튀어나왔다.
“저희가 경황이 없어서 아직 사과를 못 드렸군요. 지금 바로 사과드리고 배상도 하겠습니다.”
최명준은 과학자이기 이전에 부서의 부서장. 중간 관리자다.
오랫동안 회사 생활을 해오면서 사람 보는 눈은 꽤 많이 날카로워졌다고 생각했다.
그가 볼 때 류영준은 적으로 두면 안 될 사람이었다.
이제 겨우 서른 남짓한 젊은 박사가 어떤 결과물을 만들었나.
연구 성과에 대한 압박 앞에 불모지와 같은 생명창조 팀에서 거의 불가능할 것 같은 프로젝트를 설정하는 대담함.
그리고 분명 반대했을 게 뻔한 팀원들을 설득해서 그 일을 밀어붙인 추진력과 기어코 성과를 만들어내는 천재성.
김현택 앞에서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들이받았던 패기와 혈기.
이건 위험한 놈이다.
최우수 성과 상을 받았으니 한 동안 연구의 자율성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 예산도 준다.
그 천재가 이다음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것이다.
아주 가파른 속도로 승진할 것이다.
실력이 있는데다 니콜라스의 눈에도 들었으니 머지않아 임원 승진도 할 것이다.
어쩌면 최명준 나이 대에는 CTO가 될지도 모른다.
에이젠은 연구 중심 회사니, 그 때는 회사가 류영준의 뜻대로 움직일 것이다.
비록 아직은 주임연구원 급이니까 최명준이 겁낼 필요까진 없지만 적으로 돌려선 안 될 사람임은 분명하다.
“갑시다. 윤주 씨.”
최명준이 얼른 서윤주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가죠.”
류영준이 빙긋 웃더니 기다렸다는 듯 앞장섰다.
‘애초에 다 알고 이런 전개를 만들려고 온 거였군.’
최명준이 침을 꼴깍 삼켰다. 앞서 가는 류영준의 뒷모습이 그의 눈에는 꼭 악마처럼 보였다.
그리고 고순열을 비롯한 생명창조 팀의 시각에서는 무슨 마법사 같았다.
마인드컨트롤 같은 마법을 쓰는 게 아니면 저 상황이 설명이 안 된다.
“진짜 데려오네?”
박동현이 황당한 듯 말했다.
“고순열 박사님.”
잠시 후 이쪽에 도착한 최명준이 고순열에게 고개를 숙였다.
“지난번에 저희가 실언을 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딪혔습니다. 배상하겠습니다.”
서윤주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혜림 박사님, 박동현 박사님께도 정말 죄송했습니다.”
두 사람이 또 고개를 숙였다.
박동현이 팔짱을 끼며 그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래요. 다음에는 이렇게 소모적으로 충돌할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세탁비 계좌로 보내드릴게요. 진짜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조심할게요······.”
서윤주가 울상이 되어서 휴대폰에 고순열의 계좌번호를 받아 찍었다.
***
“그럼 우리 회식 정할까요?”
최명준과 서윤주가 떠난 후, 배선미가 말했다.
생명창조 프로젝트의 팀원들은 모두 다른 부서에서 섞이지 못했던 싸이코들이다.
하지만 권위적인 꼰대 문화에서 눈치 보고 비위 맞춰주는 걸 하지 않았을 뿐이다.
상식적인 사람들이기도 하다.
“소고기 먹자. 9시 전에 끝내고 2차는 원하는 사람들만. 술도 원하는 사람들만 알아서 먹는 걸로.”
천지명이 말했다.
“여기 근처에 소고기 먹을 데가 있나?”
박동현이 휴대폰을 꺼내 검색하기 시작했다.
“나 알아. 이 근처에 소고기 맛집 있어.”
배선미가 말했다.
“오! 역시 책임님, 맛집 블로그 하신다더니······. 어딘데요?”
정혜림이 반색했다.
“제주도에 검은소 있는 거 알아? 제주흑우라고 부르는데 그거 전문적으로 요리하는 곳이야. 고기도 다 구워주고, 맛이 아주······.”
배선미가 상상 속에서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빨리 가죠. 현기증 나니까.”
박동현이 말했다.
“따라와요, 여러분.”
배선미가 신나서 일행을 이끌었다.
그녀가 데려간 곳은 에이젠 본사 뒤의 먹자골목을 지나 길 끝에 있는 소고기집이었다.
<아직안들어온흑우없제>
“······.”
가게 이름 참 강렬하다.
배선미가 자신한 대로 정말 고기는 맛있었다.
직원이 두툼한 고기를 버섯과 양파와 함께 구워주었다.
한 점 집어먹은 고순열이 화들짝 놀랐다.
“핫? 오이시? 마치 와규 그 이상이랄까.”
“진짜 감동적이야. 저 책임님 블로그 구독 할래요······.”
정혜림도 울컥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짜 맛있네요. 다음에 와이프랑 같이 와야겠어요.”
박동현이 말했다.
“동현이랑 혜림이 술 먹을 거지? 순열이는 안 먹을 거고.”
천지명이 물었다.
“그럼요!”
정혜림이 환한 표정으로 외쳤다.
“배선미 책임은 애 보러 가야하니까 안 드실 거고.”
“아니요, 저도 오늘은 조금 먹으려고요. 오늘 남편 연차라서 집에서 애 봐주고 있거든요.”
“아하. 좋아. 류 박사는 술 좀 하는가?”
사실 류영준은 술을 거의 못 먹는 편이었다.
항암신약 부서에서 쫓겨난 후에는 한 달 동안 달고 살았지만, 그 전에는 회식 때마다 정신을 안 놓으려고 무진장 애를 썼던 것이다.
“조금만 먹겠습니다.”
“우리 강권하고 그런 사람들 아냐.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
“하하, 네. 감사합니다. 조금만 주세요.”
“좋아. 순열이는 콜라?”
“사이다로 주시면 좋겠다는. 역시 고구마 뒤에는 사이다가 제격이랄까.”
“이모, 여기 참이슬 두 병이랑 사이다 하나요.”
천지명이 주문하고는 다시 류영준에게 관심을 돌렸다.
“류 박사는 주량이 어떻게 되나?”
“반 병 정도 마십니다.”
“아니지. 주량을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지.”
천지명이 말했다.
“동현아, 과학자는 주량을 어떻게 써야하지?”
“그야 리터퍼아워(Liter/Hour, 1시간당 마신 술의 양)죠.”
“하하. 그럼 모르겠네요. 동현 선배는요?”
“제 주량은 한 시간에 한 병 정도인데 와이프 때문에 반병밖에 못 먹어요.”
“반병 넘게 드시면 혼나나요?”
뜬금없는 아내 얘기에 류영준이 물었다.
“아뇨. 뭐 그렇다기보다는······.”
“하하. 류 박사, 동현이 제수씨한테 꽉 잡혀 살아. 류 박사는 그런 결혼 하지 마.”
천지명이 웃으면서 말했다.
“에이, 저는 우리 와이프를 사랑하는 거지, 잡혀 사는 건 아니에요.”
박동현이 절대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라고 얘기하시지만 가끔 우리 팀 회식하면 한 시간마다 나가서 전화 걸고 공손한 목소리로 상황 보고해요. 오늘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정혜림이 웃으면서 말했다.
류영준이 따라 웃었다.
“뭐, 이유가 어찌되었든 주량을 절제하시는 건 좋죠.”
술이 나오자 천지명이 한 잔씩 따라주었다.
겨울밤은 빠르게 깊어갔다.
생명창조 팀원들은 계속 먹고 마셨다.
고순열은 중간에 애니메이션을 한 시간 봤고, 박동현은 중간중간 화장실 간다며 나가서는 아내와 통화했다.
그 누구도 강제하지 않았는데, 아무도 이탈하지 않았다.
다들 오늘의 기분을 더 만끽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3차로 온 어느 바에서 와인을 몇 병 비운 후.
“류 박사. 내가 류 박사의 부서장이 아니라 그냥 십몇 년 더 리서치를 한 선배 과학자로서 얘기해주는 건데. 정말 진심으로. 류 박사를 위해서.”
천지명이 꼬부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난 류 박사가 에이젠을 떠났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