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연말 세미나 (6) (176/301)

19화. 연말 세미나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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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류영준이 박소연을 돌아보았다.

얼굴을 보니 또 온갖 감정들이 한꺼번에 솟아올랐다.

사랑의 찌꺼기와 배신감과 분노 같은 것들.

놀랍게도 반갑거나 그리운 마음은 별로 없었다.

류영준은 꽉 찬 쓰레기봉투를 압축하듯이 그것들을 가슴 아래로 꾹 눌렀다.

“오랜만이네.”

류영준이 말했다.

“그러게. 한 달 좀 넘었나······. 그 동안 잘 지냈어?”

박소연이 말했다.

“잘 지냈겠어?”

“······. 미안해.”

“됐어.”

“오빠 뭔가 좀 바뀐 것 같다.”

“뭐가?”

“전엔 순하고, 착하고, 강아지 같았는데.”

“내가?”

류영준이 황당한 듯 반응했다.

“김현택 소장한테 욕도 했던 내가?”

“그건 많이 화가 났을 때였고. 보통은 이런 성격 아니었잖아? 에이젠이 그 벤처에서 초기 간암 신약 샀다는 얘기 처음 들었을 때도 신나서 여기저기 꼬리 살랑살랑 흔들고 다니면서 그 얘기 하곤 그랬는데.”

박소연이 슬며시 웃었다.

“그럼 지금도 화가 났나보지.”

“응. 황 소장님한테 욕했을 때랑 비슷한 것 같아.”

“그래?”

“아직 화나있어? 나한테?”

그녀가 물었다.

“용건이 뭐야?”

“헤어지고 나서 나도 힘들었어.”

“······.”

“오빠 이번에 많이 성공했지만, 그래도 회사에서 성공하려면 김현택 소장님하고 화해해야 할 거야.”

“글쎄.”

“나랑 선배들이 중간에서 중재해줄 수 있어.”

“그래서?”

“내가 많이 도와줄게. 오빠. 우리 다시 시작하자.”

“······.”

류영준은 박소연을 가만히 쏘아보았다.

매달리는 것처럼 붙잡았지만 박소연의 표정에는 조금의 불안이나 두려움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감이 넘쳤다.

류영준이 그녀를 많이 좋아했기 때문이다. 박소연은 항상 사랑받는 쪽으로 자라온 여자였다

자신이 붙잡는 상황이 낯선 만큼 실패할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역분화 줄기세포 가지고 부서 협력 프로젝트 같은 걸 하고 싶은 거면 우리 부서 부장님한테 얘기해.”

류영준이 말했다.

“그런 거 아냐!”

박소연이 화들짝 놀랐다.

“진짜야. 나도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많이 후회했어.”

“그럼 왜 그렇게 헤어지자고 했어? 얼굴 한 번 보지도 않고.”

“······. 얼굴 보면 더 힘들 것 같아서. 나도 회사에서 꿈이 있는데 오빠가 연구소장님하고 부딪히고 1 연구소에서도 쫓겨나니까 나도 고민이 많았어. 다른 선택지도 없었고.”

류영준은 말없이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박소연은 시선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고개 숙인 그녀는 자기 허리 뒤로 깍지 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나 이제 너 못 믿어.”

류영준이 말했다.

“······.”

“그리고 나한테 성질 좀 죽이고 살라고 했지? 반대야. 내가 과한 게 아니라 네가 모자란 거야.”

류영준이 말했다.

“좀 올바르고 치열하게 살아. 너도 과학자잖아.”

“······.”

“이제 시상식 시작하겠다. 먼저 들어갈게.”

류영준이 박소연을 지나쳐 세미나홀 안으로 들어갔다.

***

연말 세미나는 총 다섯 개의 상을 시상한다.

첫째. 1개 부서에만 주는 최우수 성과 상.

둘째. 3개의 부서에 주는 우수상.

셋째. 5개의 부서에 주는 연구상.

이 셋은 부서 단위로 나오는 상이다. 각각 차년도 예산으로 나오는 막대한 연구비와, 직급에 따른 상금이 주어진다.

그 다음 두 개는 개인에게 주는 상이다.

하나는 에이젠 연구자 상인데, 총 10명의 과학자들에게 시상하고 작은 상금이 있다.

보통 젊은 과학자들에게 주어진다. 일 열심히 하라고 독려하는 것에 가깝다.

두 번째는 혁신 과학자 상이다. 개인 퍼포먼스 차원에서 가장 혁신적인 성과를 만들어낸 1명의 과학자에게 주는 상이다.

사실 에이젠 연말 세미나에서 개인에겐 가장 명예로운 상이다.

보통은 책임 과학자 이상의 중간 관리직들에게 주어지지만 이번엔 아니다.

너무 압도적인 결과물을 뽑아온 사람이 있으니까.

“혁신 연구자 상, 발표하겠습니다.”

니콜라스가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이미 잡다한 상들은 앞서 모두 시상했고, 이것과 최우수 성과 부서 상만 남았다.

“류영준 주임 연구원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단상으로 올라오세요.”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류영준은 단상에 올랐다.

“주임 연구원 류영준. 귀하는 가장 혁신적인 연구로 에이젠 연구소의 발전을 이끌고 위상을 높였으므로 이 상을 수여합니다. 에이젠 최고기술책임자 니콜라스 킴.”

니콜라스가 상패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류영준이 인사하고 내려가려던 찰나, 니콜라스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나 더 받고 들어가시죠.”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이어서 올해의 최우수 성과 상을 시상하겠습니다. 올해 가장 위대한 성과를 만들어 에이젠 연구소의 미래 기술을 개척한 부서입니다. 배아줄기세포를 쉽게 제작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앞으로 제약 및 의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팀입니다. 제 6 연구소의 생명창조 부서. 위로 올라오세요.”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류영준이 단상에 올라왔을 때보다는 훨씬 덜하다.

류영준은 각 부서의 과학자들의 얼굴을 차분히 관찰했다.

진심으로 축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류영준이 한 달 전에 김현택에게 덤벼드는 대형 사고를 쳤다곤 해도 들어온 지 1년 된 신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류영준이라는 인물 자체를 거의 모른다.

그 때문에 별 부담감 없이 혁신 과학자 상을 수상하는 걸 축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명창조 부서는 다르다.

모든 이들이 ‘저 부서는 우리보단 아래인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운 좋게 똑똑한 놈 하나 받아서 얻어 걸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전히 생명창조 부서는 무시당하는 상태였다.

‘······.’

아닌데.

류영준이 본 생명창조 팀원들은 모두 명석하고 솜씨 좋은 실력자들이었다.

애초에 도전하던 프로젝트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성과가 없었던 것일 뿐.

그리고 사고치고 넘어온 류영준을 조금도 편견 없이 따뜻하게 받아준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훌륭한 과학자들을 혐오하는 시선들이라니.

‘앞으로 저 표정들을 존경심과 부러움으로 바꿔줘야겠다.’

류영준이 속으로 다짐했다.

어차피 그는 생명창조 부서를 이용해서 에이젠을 전부 집어삼킬 계획이었기 때문에, 한 배를 탄 생명창조 팀원들은 자동으로 대성하게 되어 있었다.

“······하여 이 상을 수여합니다. 에이젠 최고기술책임자 니콜라스 킴.”

니콜라스가 내미는 상패를 천지명과 배선미 책임이 같이 안아들었다.

다시 한 번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카메라 플래시도 터졌다. 회사 공식 홈페이지에 게재될 사진이다.

박동현은 감동에 벅찬 얼굴로 상패를 연신 손가락으로 쓰다듬었고, 고순열은 검지손가락으로 코 아래를 쓱 훑었다.

정혜림이 안 보여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더니 류영준의 뒤에 숨어 있었다.

“왜 그렇게 뒤에 있어요?”

류영준이 그녀를 앞으로 당기려 하자 필사적으로 위치를 사수하려 애썼다.

“아, 안 돼······. 흑······. 사진 찍힌단 말이야······. 흐으어······.”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고 있었다.

이제 보니 천지명 수석 과학자도 눈가가 젖어 있다.

16년을 갈굼만 받다가 갑자기 사내 최고의 영예를 얻으면 눈물이 날 만도 하겠지.

‘사실 별 거 아닌데.’

이까짓 기술의 개발.

로잘린에겐 애들 숫자놀이처럼 간단한 작업이다.

상금으로 편성될 예산 15억. 그것도 뭐 대수인가.

지금 법률사무소에서 작성중인 역분화 줄기세포 기술의 제 1 특허권자는 류영준이다.

좀 있으면 난리가 나겠지만 생각해둔 게 있다.

***

세미나가 거의 마무리되었다.

사람들이 하나씩 해산하고 있었다.

연구소로 복귀하는 사람들은 소수고, 대부분은 이 자리에서 바로 퇴근한다.

생명창조 팀은 회식을 하기로 했다.

류영준의 환영식에 더해서 최우수 성과 상을 수상한 기념이다.

“어디 가서 뭐 먹을까요?”

배선미가 물었다.

“당연히 고기 아닙니까? 고기? 어······. 소고기?”

박동현이 동의를 구하는 듯 정혜림을 쳐다보았다.

“고기는 괜찮은데 소는 좀 비싸잖아요. 그리고 전 중식도 괜찮은데. 깐풍기 같은 거 시키면······.”

정혜림이 눈가의 화장을 고치면서 말했다.

“이런 경사날에 깐풍기가 뭐니?”

배선미가 기겁하며 말했다. 그러자 정혜림이 순열에게 바통을 넘겼다.

“순열 씨는 뭐 먹을래요?”

“햄버거······?”

“하이고, 돈도 써본 놈이 쓸 줄 안다더니.”

배선미가 코웃음을 쳤다. 천지명이 끼어들어 말했다.

“우리 주인공이 고르셔야지. 류 박사. 뭐 먹고 싶어요?”

“글쎄요. 근데 우리 상금을 회식비로 써도 되나요?”

“그건 안 되지.”

천지명이 큰일 날 소리라는 듯 재빨리 반응했다.

“그럼 우리 회식비 따로 있나요?”

“있긴 한데 얼마 없어. 하지만 오늘은 그냥 내가 살 테니까 다들 먹고 싶은 거 골라.”

“그럼 저기서 좀 뜯어올까요?”

“저기?”

류영준이 에이젠 본사 입구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건강식품 부서의 최명준과 서윤주가 서있었다.

“흐음.”

최명준이 팔짱을 꼈다.

“얘긴 들었다만. 그래도 류 박사가 이렇게 우리 부서 면을 살려준 상황에서 곧바로 타부서랑 마찰을 만들기는 좀 그런데.”

“저쪽이 먼저 시비 건 사건이라니까요.”

박동현이 말했다.

“우리 팀 전부 다 무시했어요.”

정혜림도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박동현이 동의했다.

“솔직히 순열 씨 그 티셔츠는 내가 직접 버려주고 싶었던 거였거든요? 하지만 저 사람들 말하는 게 너무 괘씸했어요.”

“돈은 아니어도 사과는 받아야죠.”

류영준이 말했다.

“좋아, 그럼 내가······.”

천지명이 나서자 박동현이 재빨리 막았다.

“부장, 차장급이 가면 분위기가 좀 그렇잖아요. 저희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하지만 저쪽에도 부장이 있는데. 내가 싸워줘야 하는 거 아냐?”

천지명이 최준명을 가리켰다.

“우리 중에 전성기 때 부장급이랑 싸워본 적 없는 사람 없어요. 심지어 차기 CTO로 예정된 연구소장이랑 싸운 사람도 있는데요.”

박동현이 류영준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 그래. 그렇지. 우리 애들은 다 사이어인이었지.”

천지명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 저기.”

고순열이 갑자기 손을 들었다.

“하하. 사실 아까 시상식 하기 전에 화장실 앞에서 저 여자분 만났었달까.”

“서윤주 씨요? 뭐라던가요?”

박동현이 물었다.

“그게.”

고순열이 머리를 긁적였다.

약 세 시간 전.

류영준이 셀바이오에 실험 위탁 관련 전화를 하고 있을 때였다.

화장실로 들어가던 고순열을 입구에서 서윤주가 불러 세웠다.

“고순열 씨!”

“에? 오레?”

고순열이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무슨 일이냐는 듯 물었다.

“당신네 부서가 최우수상 받으면 정말 40만 원 달라고 할 거예요?”

“음······.”

“솔직히 그거 류영준 박사가 혼자 다 한 거잖아요! 당신들이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런 상을 받고 저한테 돈도 뜯어가요?”

“에또······. 발표 자료 끝에 나왔던 심근 세포로 분화하는 부분은 내가 만든 데이터랄까.”

고순열이 안경을 바로세우며 말했다. 서윤주가 미간을 구겼다.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그 걸레 같은 게 어떻게 꼼데가르송이에요!”

“야레야레. 포인또는 약속을 해버렸다는 부분이라는.”

“아니, 난 몰라. 그놈의 CCTV를 까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요. 내가 엎은 거면 민사라도 거세요. 내 잘못이고 재물 손괴여도 그만큼 많이 배상하라고 판결 나오지는 않을 테니까. 그 헝겊 떼기 같은 옷에 40만 원은 진짜 너무 말도 안 되는 거잖아요. 이건 사기야. 고소를 하세요, 그냥. 난 못 주니까.”

박동현과 정혜림이 경악했다.

“그렇게 말했다고요?”

“사과도 안 하고?”

배선미도 충격 받은 듯 입을 가리며 놀랐다.

“사과하는 게 우선이지 고소를 하라니?”

천지명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해가 안 되네. 아무리 그래도 최우수 성과 상을 받은 부서인데······.”

배선미가 중얼거렸다.

“받아봤자 생명창조라 생각하는 거지.”

천지명이 골치 아픈 듯 말했다.

뚝. 뚝.

박동현이 뼛소리를 내며 목을 움직여 풀었다.

“아, 나······. 또 봉인해놓은 전성기 인성 나오게 만드네.”

그가 당장이라도 박살낼 듯한 기세로 나서는 순간, 류영준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어쩌시려고요?”

정혜림이 물었다.

“지금 저쪽이랑 부서 단위로 싸우면 안 돼요. 프로바이오틱스는 차년도에 제가 연구하고 싶은 분야라 건강식품 부서를 많이 이용해먹어야 합니다.”

“음······.”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수도 없죠. 곧 데리고 와서 사과시킬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

류영준은 네 사람을 진정시켜놓고 최명준과 서윤주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차라리 박소연처럼 알아서 사과하고 엎드리는 게 편하군.’

<로잘린 Lv.2>

류영준이 상태창을 띄웠다.

메시지창을 눌러서 프로바이오틱스 데이터 화면을 열었다.

로슈의 프로바이오틱스 제품 ‘액티브유산균’을 동기화 모드로 분석한 자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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