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연말 세미나 (5)
===============
에이젠의 기립박수는 약 3분간 이어졌다.
니콜라스가 손을 내린 후에도 한 동안은 잦아들지 않았다.
분위기가 좀 진정되자 니콜라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로서는 사실 서있어도 상관없었지만, 발표를 하느라 지친 다른 과학자들을 앉을 수 있게 하려는 배려였다.
니콜라스가 물었다.
“그 동안 생명창조 부서가 하던 것과 전혀 다른 프로젝트입니다. 솔직히 말해보세요. 이 일은 류 박사님, 당신의 독단으로 시작한 거지요? 당신이 혼자서 만든 성과입니까?”
“제가 시작한 건 맞지만, 저희 부서 팀원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혼자라면 못해냈을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이 정도로 높은 퀄리티의 중요한 데이터를 모조리 뽑아내는 것은 로잘린의 힘을 써도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생명창조 부서의 팀원들을 평가해보자면, 함께 일했던 박동현, 정혜림, 고순열 세 사람 모두 정말로 굉장한 실력자들이다.
연구 발표의 논리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데이터들이 필요한지 얘기하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었고, 그걸 불과 이삼일 사이에 완벽하게 정리된 포맷으로 뽑아왔다.
이 정도로 일을 잘 하는 사람들은 에이스만 모여 있다는 항암신약 부서에도 몇 명 없다.
니콜라스는 흡족한 듯 웃었다.
“에이젠에 이런 인재가 있을 줄 몰랐군요. 이런 프로젝트를 설정하는 대담함과 통찰력이라니. 정말 대단합니다. 류영준 박사. 젊어 보이는데 미안하지만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서른입니다.”
“젊어서 더 기대가 되는군요. 그거 아십니까? 노벨상 수상자들 대부분이, 노벨상을 받은 연구를 40대에 진행했다고 합니다.”
노벨상 얘기가 나오자 류영준이 머쓱하게 웃었다. 박동현은 이게 노벨상 감의 일이라고 했었다.
물론 류영준 같은 젊은 박사에게 상을 주진 않을 것이다. 노벨상은 은근히 ‘짬’을 따진다.
하지만 좀 더 연구 경력이 쌓이면 누군가 노벨상 후보로 추천할 수도 있다.
만약 그러면 역분화 줄기세포는 아주 막강한 업적이 되어 그의 뒤를 받쳐줄 것이다.
솔직히 행복회로가 과열돼 김이 나는 수준의 이야기다.
하지만 류영준의 젊은 나이까지 고려하면 가능성이 그렇게 희박한 것도 아니다. 일단 30대 중에서는 노벨상 수상 가능성 1위 아니겠는가.
니콜라스 역시 그 미래를 보고 있었기에 노벨상 얘길 꺼낸 것이다.
“본래 소장들과 함께 논의를 해야 하지만, 이건 솔직히 의심의 여지가 없군요. 이번 연도 최우수 성과 상은 생명창조 부서입니다. 류영준 박사. 당신 덕분입니다.”
“잠깐만요.”
니콜라스의 말끝에 김현택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죄송하지만 부서 이동한 지 2주 정도 지난 류영준 박사가 독단으로 시작한 일입니다. 그리고 생명창조 부서의 부서장인 천지명 박사는 아예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요.”
“모르시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니콜라스가 물었다.
“자기가 본래 하던 업무에 대해서도 모르시지 않았습니까?”
김현택이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가 류영준을 쏘아보며 니콜라스에게 다시 말했다.
“이건 사실상 개인에 의한 일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류 박사의 공로를 치하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최우수 성과 상은 부서 단위로 시상하는 겁니다. 저는 생명창조 부서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연구원들이 저 데이터를 뽑는 데 공헌한 거야 물론 조금씩 있겠죠. 하지만 연구자는 데이터를 뽑는 것 이상을 해야 합니다.”
“흠.”
“개인에게 주는 상이라면 혁신 과학자 상이 있습니다. 류 박사에게 그걸 주고 최우수 성과 상은 다른 부서에게 시상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천지명 박사님께 직접 물어보시죠. 본인이 부서장으로서 수상 자격이 있다 생각하시는지 말입니다.”
니콜라스는 흥미롭다는 듯 턱을 살짝 괴면서 천지명을 쳐다보았다.
“천지명 박사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부서장으로서 본인이 최우수 성과 부서의 수장이라는 명예와 특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류영준이 걱정스러운 듯 천지명을 힐끔거렸다.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발표 직전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부장이기 때문에 서류상에선 자동으로 프로젝트의 임시 팀장 직위가 되어 있었다.
프로젝트 기획안을 제출할 때 팀장이 공란이었기 때문이다. 류영준의 이름은 직급이 낮아서 시스템상 아예 선택할 수가 없게 돼있었다.
전혀 모르는 줄기 세포 프로젝트의 팀장이라는 부담감과 아무런 보탬도 못 되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천지명이 수상을 거부해버릴 수도 있었다.
김현택 역시 그걸 노리고 들어갔던 것이다.
“······. 존경하는 임원님들 모두 이 성과에서 류영준 박사님의 공헌이 얼마나 컸을지는 짐작하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때문에 류영준 박사님의 개인 공로는 아주 높게 평가해주셔야 합니다. 혁신 과학자 상을 주셔야 됩니다.”
천지명이 말했다.
그 말에 김현택이 피식 웃었다.
“그럼 최우수 성과 상은······.”
“그리고 최우수 성과 상은 생명창조 부서가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지명이 단호하게 말했다.
김현택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면서 류영준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러고 보니 천지명, 이 사람도 꼴통들만 모여 있다는 생명창조 부서의 부서장을 16년간 한 사람이다.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는 최우수 성과 상을 어느 부서가 받느냐는 것은 공로의 크기와 적절함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그 쪽은 이미 끝났다.
지금은 김현택과 정치적인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다.
천지명은 그걸 알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부장이 할 일은 프로젝트를 몰랐고 관리하지 못했다는 책임감 때문에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팀원들을 위해서 그 상을 쟁취해서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김현택이 직접 압박하는 상황에서, 얼굴에 철판 깔고 받을 자격이 있다고 당당하게 질러버릴 정도로 천지명은 멘탈이 튼튼했다.
니콜라스도 고개 숙여 웃고 있었다.
“천지명 박사님. 저 배아줄기세포 프로젝트에 대해서 뭐 아시는 게 단 하나라도 있습니까?”
김현택이 공격적으로 쏘아붙였다.
“네. 물론입니다.”
천지명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는 팀장으로서 이 프로젝트의 차후 진행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아마 이 기술을 좀 더 발전시키면 많이 진행된 위암을 치료할 때 암세포를 특이적으로 제거하는 항암 신약을 사용하는 대신, 위를 절제하고 그 자리에 배아줄기세포를 심어서 복구시키는 방법이 더 편하고 효과적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포상으로 나오게 될 특별 연구 예산을 그 쪽에 역점을 두어 편성하고, 최우수 성과상의 특혜를 토대로 제 6 연구소의 여러 부서들의 협조를 구해 태스크포스 팀을 꾸릴까 생각중입니다.”
별 의미는 없는 얘기였지만 줄줄 읊어댔다.
그리고 김현택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 1 연구소에서 가장 싸고 도는 항암신약 팀의 최고 성과가 암세포에 특이적인 위암 치료제였다.
천지명은 은근한 말투로 ‘우리 팀 성과가 그거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면서 공격한 것이었다.
“으흠.”
니콜라스가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그는 이미 류영준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해서 이것저것 얹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저 천재 청년 과학자가 최우수 성과 상에 뒤따르는 특혜들을 쥐게 되면 어떤 일을 해낼지 보고 싶었다.
게다가 실제로 류영준의 팀원들이 줄기세포를 증명하는 데이터를 생산했으니 연구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도 아니다.
“확실히 부장급의 업무가 파이펫 쥐고 세포 키우는 일은 아니지요. 천지명 박사님은 지금 얘기하신 것처럼 팀과 예산 편성을 해주시고, 프로젝트의 진행 방향을 잘 잡아주시길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천지명이 고개를 꾸뻑 숙였다.
“다른 이의 있으신 분 계십니까?”
니콜라스가 소장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조용했다.
잠깐 기다린 후에 니콜라스가 말했다.
“그럼 최우수상은 정해졌고, 다른 상들 받을 부서들을 정해야겠네요.”
그는 싱긋 웃으면서 단상 위로 올라갔다.
“아, 아.”
그가 마이크를 쥐고 말했다.
“에이젠의 과학자 여러분. 고생하셨습니다. 오늘 세미나는 여기까지입니다. 다들 30분간 휴식하시고, 그 후에 다시 이곳에서 시상식을 진행하겠습니다.”
***
“대박! 미쳤어! 어떡해! 꺄아아! 우리 진짜 상 받나봐!”
정혜림은 흥분을 주체 못해 팔짝팔짝 뛰고 있었다.
“수고 많았어요. 류 박사님.”
박동현이 류영준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고생하셨어요. 다들.”
류영준은 팀원들에게 인사하다가 배선미와 마주쳤다.
천지명도 그렇지만 배선미 책임 연구원도 처음 보는 사람이다.
40대의 인상 푸근한 아주머니 같았다.
“안녕하세요. 영준 씨. 배선미 책임이에요.”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잠시 후, 다른 부서의 팀장들과 인사를 나누던 천지명 수석 과학자가 돌아왔다.
“어디 갔어? 우리 막내?”
그가 류영준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류 박사!”
그리고는 이윽고 류영준을 발견하고 양 팔을 활짝 벌리고 달려들었다.
“너무 고생 많았어요!”
그가 류영준을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는 떨어지면서 물었다.
“아니 대체 어디서 이런 복덩이가 들어왔지? 어디 부서 출신이에요?”
“항암신약 부서입니다.”
“김현택이 거대한 실수를 했구만! 이런 과학자를 잃어버리다니! 하하핫. 정말 너~무 잘해주셨습니다.”
“하하. 부장님도 수고하셨습니다.”
“김현택 표정 일그러지는 거 봤어요? 제 1 연구소가 받을 줄 알았는데 못 받아서 빡 도는 거? 으하하하!”
“제 생각엔 그건 부장님이 위암 신약 들먹여서 그런 것 같은데요.”
박동현이 뒤에서 킬킬거리며 말했다.
“근데 최우수 성과 상을 받으면 명예 말고 실질적인 이익은 얼마나 있나요?”
류영준이 물었다.
“엄청나게 있지! 그러니까 김현택이 저렇게 기를 쓰고 막으려고 하는 거지.”
천지명이 말했다.
“최우수 성과 상을 받은 부서에는 일단 15억의 예산이 추가 편성돼요. 그리고 웬만하면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든 상부에서 터치하지 않아요. 일종의 독립 부서처럼 자율 활동할 수 있는 거지. 게다가 다른 부서에 업무 지원을 요청했을 때 그쪽이 거부할 수가 없어.”
“정말요?”
“15억 말고는 사내 규칙으로 정해져있는 건 아닌데, 일종의 오래된 전통 같은 거예요.”
정혜림이 설명했다.
“물론 우리 부서는 어떨지 모릅니다. 그 동안 워낙 이미지가 똥이었으니까 앞으로도 무시당할지도.”
박동현이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군요.”
류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 하나 있다.
“근데 순열 선배는 어디 갔어요? 같이 세탁비 받으러 가야 하는데. 그 꼼데가르송······.”
배선미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정혜림을 쳐다보았다.
고순열과 꼼데가르송 티셔츠가 한 문단에 들어가는 게 어색하다는 듯한 표정이다.
정혜림은 깔깔 웃으며 그녀에게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해주었다.
“아까 화장실 간다고 나갔는데.”
박동현이 말했다.
“그래요? 저도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류영준이 세미나홀을 빠져나오면서 휴대폰을 열었다.
사실 화장실은 핑계고 전화 한 통을 쓰기 위해서였다.
류영준이 좀 전에 온 문자를 읽었다.
<셀바이오입니다. 리액션케미스트리에서 선생님 이름으로 온 시약을 받았습니다. 실험 진행 전에 확인 차 통화를 하고 싶습니다. 10분 정도 시간 나실 때 전화 부탁드립니다.>
류영준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셀바이오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실험 의뢰한 류영준이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전에 한 번 이메일로 실험 내용을 짜주셨는데 한 번 확인하고 들어가려고 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게 독감 신약 맞지요?
“네.”
-바이러스는 조류독감 바이러스 H9N2 바이러스를 쓰고 MDCK 세포를 감염시킨 다음, 보내주신 신약 후보 물질을 처리해서 바이러스의 증식이 억제되는지 보면 되는 것이지요?
“네, 맞습니다. 보내드린 신약 후보 물질은 DMSO에 녹여서 처리해주세요. DMSO 1 밀리리터당 10 밀리그램까지 상온에서 녹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실험 결과는 언제쯤 받을 수 있을까요?”
-이미 저희가 후보 물질이 도착하기 전에 세포를 풀어놓고 바이러스를 감염시키는 기초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후보 물질을 바로 처리하면 되는 상태라서 아마 다음 주 중에 데이터가 나올 것 같습니다.
다음 주.
이래서 셀바이오가 좋다.
실력 없는 어정쩡한 회사에 위탁했었다면, 류영준이 보낸 신약이 도착한 다음에야 세포를 준비하고 풀어서 증식시키고 바이러스를 감염시키는 식으로 천천히 진행했을 것이다.
그럼 3주 정도 걸렸겠지.
셀바이오에 맡기길 잘했다.
“고맙습니다. 결과 나오면 알려주세요.”
전화를 끊었다.
됐다.
이제 이혜원 변리사가 출원해놓았을 특허 자료에 실험 데이터를 첨부하고 심사받아서 등록하면 끝이다.
그리고 이 신약을 제약 회사에 판다. 에이젠에 파는 것도 안 될 것은 없지만 생각 좀 해보기로 하자.
아무튼 거기까지만 해내면 그놈의 지긋지긋한 가난을 완전히 청산할 수 있다.
로잘린의 힘을 이후에 어떻게 쓸지는 그 다음에 생각하자.
아파트에서 경비 일을 하고 계신 아버지도, 무릎 연골을 다쳐서 절뚝거리면서 식당 일을 하는 어머니도 모두 쉬어도 된다.
류지원도 과외며 알바며 그만하고 공부나 하라고 해야지.
대출금도 전부 갚고, 박주혁한테 빌린 것도 갚고, 반지하 원룸 생활도 청산하고, 차도 한 대 뽑을까?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
원래 이런 장밋빛 미래를 그리면 항상 들어있는 여자가 있었다.
박소연.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중에 눈이 마주쳤던 그녀는 한 달 사이에 더 예뻐져 있었다.
‘난 술 먹느라 더 망가졌는데.’
물론 로잘린이 전부 다시 고쳐줬지만 어쩐지 억울하다.
톡톡.
뒤에서 누가 류영준의 어깨를 쳤다.
“오빠.”
박소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