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연말 세미나 (4) (174/301)

17화. 연말 세미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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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이 모자라면 월급은 왜 다 받아요?”

김현택이 빈정거렸다.

“하하, 죄송합니다. 그 대신 성과급은 16년 째 못 받았죠.”

“웃음이 나와요?”

“죄송합니다.”

소장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천지명의 페이스대로다. 항상 그는 이런 식이었다.

썩은 말들이 날아와도 허허 웃으면서 능청스럽게 흘려버리는 식이다.

그 와중에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할 얘기는 전부 한다.

모욕적인 목적으로 월동 시금치 뽑기 같은 뜬금없는 업무를 맡겨도 군소리 없이 한다.

아무리 쪼고 갈구고 밀어내려고 해도 맞아주고 소심하게 막아내면서 버티는 것이다.

“천지명 박사님.”

제 6 연구소장 길형준이 말했다.

“당신 16년 동안 생명창조 팀에서 만든 프로그레스가 대체 뭐가 있죠?”

“매달 미팅 때 보고를 드렸습니다. 이번 같은 경우에는 인공 세포의 세포 소기관들을 안정시킨 게 하나의 프로그레스이며, 세포막이 깨지는 현상을 해결할 수 있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추측 말고 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를 가지고 와야 하지 않아요?”

“다음번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매번 그 소리야! 그리고 그게 당신의 문제야. 당신네 팀은 다 바보들이에요. 거기 박사가 몇 명입니까?”

“다섯······. 아니, 이젠 여섯 명입니다.”

“박사가 여섯 명이나 있는데, 16년 째 저거 하나를 못 해요?”

“솔직히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조물주나 할 수 있는 일이잖습니까.”

“그게 과학자가 할 말이야?”

“죄송합니다.”

“아니, 데이터를 봐봐! 뭐 나온 게 아무것도 없잖아. 16년 동안. 우리 입장에서 답답하지 않겠냐고!”

“원래 과학이라는 게 불 꺼진 방 안을 더듬거리면서 빛을 찾아가는 거라서 운이 나쁘면 성과를 못 낼 수 있지요.”

CTO 니콜라스의 말을 빌려왔다.

“허!”

김현택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원론적인 얘기 하지 말고. 우리는 당신들한테 월급을 주는 입장이에요. 당신도 박사고 연구직을 20년 훌쩍 넘게 해온 사람인데 저딴 데이터들만 매번 가지고 오는 거 창피하지 않아?”

“죄송하긴 합니다. 하지만 연구라는 게······.”

“좀! 입 좀 다물어!”

길형준이 책상을 쾅! 내리쳤다.

“당신들 데이터가 워낙 폐급이라 임원들한테 깨지는 마당에 무슨 혓바닥이 그렇게 길어서 계속 주절주절 변명을 해대!”

“그게······.”

철컥!

세미나홀 문이 열렸다.

청년 한 명이 나타났다. 달려와서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지만 호흡은 조금도 가쁘지 않았다.

<폐에 전이된 로잘린이 활성화됩니다.>

<로잘린이 호흡 과정을 최적화합니다.>

“아이고오!”

하지만 그 뒤를 쫓아 들어온 남자는 거의 죽을상이다.

약간 뚱뚱한 체격의 남자였다. 그가 안경을 고쳐 쓰면서 류영준에게 말했다.

“아직 발표 중이신 것 같달까. 저기 강단 위에 있는 분이 천 부장님이라는.”

“감사합니다.”

류영준은 단상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발표자, 천지명과 눈이 마주쳤다.

사진으로밖에 본 적 없는 팀장이다.

천지명은 싱긋 웃더니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지금 올라오라는 뜻이었다.

류영준이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 무대를 향했다.

“뭐야?”

“누구야?”

과학자들이 수군댔다.

“뭐하는 거야!”

길형준이 소리를 질렀다.

“당신 누구야!”

고유성도 외쳤다.

하지만 류영준은 아랑곳 않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내 파트 끝났어요. 류 박사. 부탁합니다.”

천지명이 류영준의 귓가에 속삭였다. 류영준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는 마이크를 잡았다.

“생명창조 부서 류영준 주임연구원입니다.”

그가 청중들을 향해 자신을 소개했다.

“주임?”

고유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주임이면 대리급 아닌가?”

과학자들이 술렁거렸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올라왔습니다. 사전에 협의되지 않은 돌발 행동으로 혼란을 드린 점 죄송합니다. 하지만 생명창조 부서의 중요한 데이터를 발표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무슨 짓인가?”

김현택이 말했다.

“내려오게. 류 박사. 말단이 올라갈 단상이 아니고, 지금 생명창조 팀 프로그레스에 대해서 미팅중이야.”

“제가 가져온 자료도 저희 팀의 프로그레스입니다.”

“어디 새파란 놈이 소장들 얘기하는 데 끼어들어!”

오준태가 소리를 질렀다.

“······.”

류영준은 시선을 천천히 내려 CTO 니콜라스를 바라보았다.

니콜라스는 다리 한 쪽을 꼬며 고쳐 앉았다.

“들어봅시다.”

니콜라스가 말했다.

CTO의 말은 절대적이다. 연구소장들은 여전히 짜증 섞인 표정이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감사합니다.”

류영준은 USB를 꽂았다.

파일을 열자 화면에 배아줄기세포 사진이 나타났다.

“뭡니까 저게?”

김현택이 물었다.

“배아줄기세포입니다.”

“그게 왜 나옵니까?”

“저희가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

연구소장들이 비딱한 자세로 고개를 갸웃했다.

“미쳤군. 이제 진짜 미쳤어. 저 부서는 다 미치광이들이야.”

고유성이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말했다.

류영준은 무시하고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 팀이 생명창조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 배경은 이렇게 해서 인공 세포를 만들어내면, 그것을 환자의 몸에 이식하거나 인공 장기를 배양하여 망가진 조직이나 기관을 복구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그리고 생명창조의 경쟁 기술은 배아줄기세포 기술입니다. 우리보다 완성도가 더 높고 성취율이 높은 기술입니다. 만약 우리가 배아줄기세포 기술을 이용할 수 있다면 굳이 생명창조라는 어려운 길을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겁니다.”

김현택이 손을 들었다.

“그래서 배아줄기세포를 연구했다는 겁니까? 정말이지 정신이 나갔군요. 수정란을 어디서 구했습니까? 이거 대답 잘 해야 할 겁니다. 기증받은 게 아닌 이상 업무 예산을 논의되지 않은 목적으로 당신들 멋대로 쓴 거예요. 그리고 돈을 주고 수정란을 샀다면 윤리적인 비난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회사 차원의 입장이 결정되어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 때문에 당신들 독단으로 행동하면 안 됩니다. 이거 중징계 감이에요.”

류영준이 김현택 쪽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수정란은 쓰지 않았습니다.”

연구소장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마술이라도 부렸다는 건가?”

오준태가 비아냥거렸다.

“이 세포는 원래 사람 유래 신장 세포였습니다. 저희는 그 세포에 다음 네 개의 유전자를 삽입하여 이 세포를 배아줄기세포 상태로 초기화시켰습니다.”

슬라이드가 넘어갔다.

SOX2, cMyc, OCT4, KTF4

네 개의 유전자 이름과 함께 최초의 신장 세포 사진이 나타났다.

유전자 넷을 도입한 후 1시간 간격으로 촬영된 세포의 형태학 사진이 한 장씩 나왔다.

시간이 뒤로 갈수록 점차 배아줄기세포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침묵.

순식간에 객석이 얼어붙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숨소리조차 안 들린다.

줄기세포를 좀 아는 과학자들의 얼굴에는 이미 경악이 번져 있었다.

‘과학의 진보는 이따금 압도적인 도약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전화기의 발명, 인터넷의 발명, 비행기의 발명.

또는 진화론의 정립, 지구가 사실 둥글다는 사실의 증명, 지동설의 확립.

가끔씩 세상은 그것이 확보되기 전후로 크게 변하곤 한다.

세미나 홀의 모든 과학자들이 류영준이 발표하는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땡강.

줄기세포 부서에서 손을 심하게 떨던 누군가가 텀블러를 떨어뜨려 적막을 깼다.

오준태가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 잠깐만. 저게 그러니까······. 그걸 지금 믿으라는 건가? 저게 일반 세포를 배아줄기세포로 만든 거라고?”

“확실합니다.”

“형태학적인 사진은 분명 배아줄기세포와 유사해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더 구체적인 증거가 있어야할 거 같은데.”

김현택이 말했다.

“저희는 DNA 메틸레이션 데이터와 전체 유전자 발현량 데이터도 가지고 있습니다. 보시죠.”

슬라이드가 넘어가면서 데이터 비교분석 자료가 나타났다.

수정란에서부터 만든 진짜 배아줄기세포와, 인체 신장 세포로부터 만들어낸 류영준표 배아줄기세포의 데이터가 정확히 똑같았다.

“······.”

“으음!”

연구소장들의 머릿속에선 이게 앞으로 의학계에 어떤 파란을 일으킬지에 대한 상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물론 임상까지 들어가기에는 아직 갈 길이 매우 멀다.

인공 장기를 만들거나, 환부에 이식해서 분화시키는 것. 뭐 하나 간단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중요한 건 지금 엄청난 크기의 장애물 하나를 넘어버렸다는 거다.

이건 미래 의학의 트렌드 세터다.

대형 병원들에서 근미래에 어떤 시술들을 하게 될지에 대해, 거대한 청사진이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류영준이 말했다.

“배아줄기세포 기술은 수정란을 필요로 한다는 너무나 큰 단점 때문에 그 동안 사장되다시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한계를 저희가 파괴했습니다.”

“······.”

“내년부터 생명창조 부서는 생명창조를 하나의 메인 업무로 두고, 사이드로 배아줄기세포를 연구할까 합니다.”

“저게 다른 조직으로 분화할 수 있다는 증거는 아직 없는 것 아닌가?”

김현택이 지적했다.

“있습니다. 그 데이터를 만드느라 약간 늦었죠.”

류영준이 슬라이드를 넘겼다.

이제 배아줄기세포가 근육 세포로 분화하고 있었다.

“심근섬유세포입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이 세포를 배양하면 심장 근육을 만들 수 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이론적으로는 ‘인공 심장’을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저희가 만든 배아줄기세포는 수정란을 이용해서 만드는 기존의 배아줄기세포와 완전히 동일하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세포로든 분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설명할 수 있나?”

세미나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니콜라스가 질문을 던졌다.

근처의 과학자들이 니콜라스를 쳐다보았다.

그가 말했다.

“저 네 개의 유전자를 집어넣으면 왜 배아줄기세포로 변하는지.”

“물론입니다.”

예상 질문이었다.

류영준이 슬라이드를 넘겼다. 네 개의 유전자에 대한 설명이 차례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c-Myc 유전자는 세포의 프로리퍼레이션과 피노티픽 체인지를 촉진시하는 역할을 하면서 히스톤 아세틸 트랜스퍼레이즈에 바인딩해······.”

갑자기 강의가 시작됐다.

난무하는 전문 용어들 중 일부는 같은 필드의 과학자들에게도 생소한 것이었다.

연구소장들도 간신히 따라가며 이해했다.

세미나 홀의 천 명에 이르는 과학자들이 류영준을 보고 있었다.

류영준은 그들을 하나씩 훑어보면서 강의를 이어갔다.

‘박소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헤어진 후에 머리를 잘랐는지 단발이다.

그녀는 많이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류영준은 시선을 돌렸다.

“······이처럼 엔도지너스하게 발현된 Nanog와 Oct4 유전자에 의해서 세포의 미분화 통제가 완료되며 수정란과 같은 배아줄기세포 상태로 초기화됩니다. 이상입니다.”

“······.”

세미나 홀에 적막이 흘렀다.

모든 과학자들이 얼어붙어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같은 과학자들이기 때문에 그 충격이 더 강렬하다.

줄기세포 부서원들은 아예 얼이 빠져버린 표정이었다.

그 난폭한 연구소장들조차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항암신약 부서가 내놓았던 훌륭한 성과는 그들의 입을 벌어지게 했지만, 더 압도적인, 마술적인 연구 성과는 그 입을 닥치게 만들었다.

그 적막 한 가운데.

짝.

짝. 짝.

누군가가 나지막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CTO 니콜라스였다.

과학자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몰렸다.

“그야말로 미래 기술이군요.”

니콜라스가 말했다.

“혁신이란 이런 겁니다. 이게 바로 기술의 진보고 과학이지요. 제가 죽기 전까지 우리 회사에서 이 정도로 훌륭한 연구를 보게 될 줄 몰랐습니다. 당신 이름이 뭐라고 했죠?”

“류영준 주임연구원입니다.”

류영준이 답했다.

니콜라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류영준 연구원님. 요즘은 이런 문화가 없어진 모양이지만, 제가 젊을 때만 해도 학회에서 멋진 강연이나 발표가 나오면 참석자들이 기립 박수를 쳤답니다. 올드하고 촌스럽긴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군요.”

그가 말했다.

“CTO나 주임 같은 직급 관계를 떠나 생물학을 연구하는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류영준 연구원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니콜라스가 박수를 쳤다.

화들짝 놀란 과학자들이 황급히 뒤따라 우르르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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