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연말 세미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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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세포를 배아줄기세포로 초기화시켰다는 말이야?”
배선미가 입을 딱 벌렸다.
“아니 잠깐만. 난 왜 방패 역할로 굳어져 있는 거야?”
천지명이 당혹스러운 듯 물었다.
“부장님 잘 하시잖아요. 좀 도와주십쇼.”
박동현이 말했다.
“물론이지. 내가 앞에서 노래도 부를 수 있어. 한 세 시간 정도 끌어줄까?”
“감사합니다. 만약 발표 시작되면 신입이 순열 씨랑 같이 도착할 때까지만 버텨주시면 돼요.”
“그럼. 류 박사랬나? 그 친구보고 데이터 완성하고 꼼꼼히 검토한 후에 커피도 한 잔 뽑아서 오라고 해.”
갑자기 청중들 사이에서 요란한 박수와 함성이 일었다.
“와아아아!”
무대 위에 사회자가 나타났다.
제 1 연구소의 연구소장, 김현택이었다.
그가 마이크 앞에 섰다.
“보통 이런 건 젊은 분들 시키는데······.”
김현택이 피식 웃자 과학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오늘 진행은 제가 맡기로 했습니다. 일단 CTO 인사 말씀이 있겠습니다. 박수로 맞이해주십시오.”
김현택이 소개하자 니콜라스 킴이 환호를 받으며 무대로 올라왔다.
“안녕하십니까. 니콜라스입니다. 길었던 한 해가 거의 다 갔습니다. 올해 초에 계획했던 목표들을 여러분은 모두 달성하셨나요?”
그가 말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올해는 술과 담배를 끊자고 목표를 잡았고, 하루에 한 시간 이상 운동을 하려고 했는데······. 셋 다 실패했습니다.”
그가 인자하게 웃었다.
맘씨 좋은 옆집 할아버지 같이 생겼지만 한 때 하버드에서 교수를 하던 사람이다.
재미 교포 중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한 손에 꼽힐 것이다. 이 시대 최고의 과학자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연말에 건강 검진을 해보니 다행히 아직까진 건강하더군요. 우리의 목표와 성과라는 게 이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분은 목표 달성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과학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요. 어두운 방 안에서 바닥을 더듬거리면서 빛을 찾아가는 작업이 아니겠습니까?”
니콜라스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우린 그래도 시간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과학자가 무려 천 명 가까이 모여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머리를 맞대면 해결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오늘의 세미나 역시 그걸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니콜라스의 연설에 집중했다.
“여러분. 성과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하면 아주 치열한 얘기가 오가게 될 겁니다. 그래도 서로 의가 상하지 않도록, 그리고 건설적인 다음 목표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수고해주시고, 그 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짝짝짝짝!
니콜라스가 연설을 마치자 과학자들이 박수를 쳤다.
“첫 발표는 제 1 연구소입니다.”
김현택이 말했다.
“항암신약 팀의 발표자, 올라오세요.”
그리고 김현택은 객석 가장 앞의 연구소장 좌석으로 이동했다.
항암신약 부서의 수석 과학자인 김주연이 단상에 올랐다.
그가 준비한 발표 자료를 열었다.
“저희 팀의 성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이번 연도에는 간암 신약 일로아의 매출을 방어했습니다. 경쟁사에서 셀리큐어라는 간암 신약을 개발해 매출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저희 부서의 직원이 빠르게 해당 사안을 발견하고 리포트하여 경영진 측에서 즉시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었으며······.”
류영준의 이름은 교묘하게 ‘저희 부서의 직원’으로 빠졌다. 경쟁사의 더 뛰어난 약을 제거해버린 정치술은 ‘경영진의 적절한 대처’로 변했다.
“이렇게 사게 된 신약 셀리큐어는 항암신약부서에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김주연이 말했다.
그 역시 거짓말이다. 벤처에서 개발된 초기 간암 치료제 셀리큐어는 앞으로 영원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속사정을 잘 모르는 다른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별 거부감 없이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이어지는 항암신약 부서의 성과는 과연 그 명성에 걸맞게 굉장했다.
김주연은 먼저 유방암을 절제한 후 환부를 처리하는 새로운 약품에 대한 발표를 했다.
그 다음에는 모바일진단기기 부서와 협업해서 개발한 아이템을 내놓았다.
중요한 무기였다.
“······ 해서 정확도 92퍼센트, 민감도 96퍼센트의 확률로 위암을 조기 진단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항암신약부서에서 찾아낸 위암의 표지자에 대한 분자 진단 단백질과 모바일 진단 기기의 시스템과 키트를 접목시킨 것으로 매우 진보한 기술이며······.”
과학자들과 기자들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과연 대단하긴 하다.”
최명준이 말했다.
“그러게요.”
서윤주가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성과를 모바일 진단 기기랑 절반씩 나누면 항암신약 부서가 최우수상은 못 받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러나 항암신약 부서의 무기는 아직도 더 있었다.
이건 모바일 진단기기 부서에서도 아직 모르는 것이었다.
“이어서 우리는 방금 말씀드린 위암 표지자를 이용한 새로운 항암 신약을 개발했습니다.”
김주연이 말했다.
“이 항암 신약은 위암 세포의 표지자를 정확히 추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환자에게 썼을 때, 건강한 위 세포는 절대 건드리지 않고 암세포만 정확히 찾아서 파괴할 수 있는 신기술입니다.”
“와아아!”
이번에는 과학자들 사이에서 육성으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암세포만 골라서 파괴하는 위암 신약.
이를 2세대 항암제라고 부른다. 표적을 정확히 찾아서 암세포만 특이적으로 제거하여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많은 제약 회사들이 목표로 잡고 있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이미 여러 종류의 약들이 개발되었지만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김주연이 실험 데이터를 발표하자 과학자들의 입이 벌어졌다.
항암신약 부서가 첫 번째로 발표를 했지만 이미 모든 과학자들이 최우수상을 수상할 부서로 항암신약을 점쳤다.
“저희 팀의 발표는 이상입니다. 혹시 질문 있습니까?”
침묵만 흘렀다.
너무 뛰어난 발표라서 오히려 조용했다.
잠시 후. 박수를 받으면서 퇴장한 김주연은 단상에서 내려가면서 모바일 진단기기 부서에 들렀다.
“핵무기 하나를 숨기고 있다가 늦게 발표해서 미안해요. 최우수상은 저희 겁니다.”
김주연이 웃으며 말했다.
“축하드려요. 확실히 그 정도면 최우수상이죠. 2세대 항암제를 하나 개발하셨다니. 저희는 우수상으로 만족하겠습니다.”
모바일 진단기기 부서의 송유라 수석 연구원이 생글거리며 대꾸했다.
다음의 발표자는 모바일 진단기기 부서였다. 마찬가지로 호평을 받으며 내려왔다.
하지만 두 부서는 모두 에이젠의 효자 부서다.
그 다음의 헬스케어 의료 기기 부서의 발표부터 연구소장들이 공격 기어를 넣었다.
“저걸 어디다 씁니까?”
“그래서 돈이 되긴 됩니까?”
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전문 용어들을 남발해가며 도대체 어떤 정신머리로 저딴 실험을 진행했느냐는 막말까지 나왔다.
항상 이런 식이다. 갈수록 분위기는 험악해진다.
“과학을 하는 데 기본이 없어요! 저 케미컬의 환부에 대한 정확도가 대체 왜 중요합니까? 딜리버리 방법을 국소적으로 제한하면 되잖아요!”
김현택 같은 사람은 소리도 질러댔다.
제 5 연구소의 태진성 박사가 발표를 마치고 내려갔다.
드디어 순서는 제 6 연구소로 넘어갔다.
류영준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6 연구소의 네 개 부서가 차례로 발표를 마친 후, 자칭 에이스인 건강식품 부서의 최명준이 발표를 시작했다.
“저희 부서는 호박즙과 도라지배즙을 믹스해서 만든 새로운 제품의 출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 제품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드리면······.”
최명준의 발표는 약 15분간 이어졌다. 꽤 괜찮은 성과였지만 연구소장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번에 화이자에서 호박즙과 도라지배즙 믹스한 제품 내놓지 않았습니까?”
김현택이 질문을 던졌다. 최명준이 약간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맞습니다.”
“그쪽이 시장을 선점했다고도 생각이 되는데, 똑같은 제품을 개발하는 게 효율성 측면에서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저희가 만든 제품이 영양성분이 더 뛰어납니다. 그리고 제조 공법상에서 차이가 있는 게, 저희는 저온 착즙 방식을 통해서 호박즙을 얻는데 화이자는 온도를 높이므로 영양소가 파괴됩니다. 저희 방법으로 만드는 게 더 건강한 영양 음료이기 때문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
“그건 당신 생각이고요.”
김현택이 지적했다.
“저온 착즙이든 뭐든 대중들은 제조 공법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항상 제가 여러 번 연말 세미나에서 얘기하는 것 같은데, 과학자들이 비즈니스에 대한 감각을 좀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
“여러분들은 대학에서 연구하는 연구원이 아니에요. 좋은 제품을 만드는 걸 목표로 두지 말고 ‘팔릴 제품’을 만드는 걸 목표로 두십시오. 저 호박즙 팔면 얼마나 매출 나갈 것 같아요? 화이자가 북미랑 유럽 시장에서는 우리보다 브랜드 인지도가 더 높아요! 저온 착즙으로 화이자를 이기겠다? 말이 됩니까?”
공포 분위기가 무겁게 흘렀다.
젊은 과학자들 앞에서 팀장들이 연구소장들에게 깨지는 모습은 꽤 충격적이고 상당히 불편했다.
김현택이 계속 공격했다.
“유산균 매출도 떨어졌죠? 로슈에서 새로운 프로바이오틱스를 만들어서 작년에 내놓은 이후로 시장 점유율을 야금야금 빼앗겼습니다. 그렇죠? 지금 몇 퍼센트입니까?”
“······. 22퍼센트입니다.”
“재작년에는요?”
“49퍼센트였습니다.”
“잘 알고는 있네요. 근데 신제품 개발은 안 했습니까?”
“개발중입니다······.”
“호박즙 저딴 거 만들 시간에 유산균 제품 혁신하는 데 힘쓰세요. 건강식품 미래 산업은 프로바이오틱스로 갈 겁니다.”
“염두에 두겠습니다.”
“발표할 거 더 있습니까?”
“······. 없습니다.”
“내려오세요. 수고했습니다. 다음. 6연구소. 누구죠?”
“생명창조 팀입니다.”
오준태 제 3 연구소장이 말했다.
“올라오세요. 생명창조 부서 발표자.”
“솔직히 이거 들어야 합니까?”
연구소장 중 누군가가 말했다.
소장들이 피식피식 웃었다.
천지명 수석 과학자가 천천히 단상을 향했다.
“당신들 때문에 우리도 깨졌어.”
그 옆을 지나친 최명준이 작게 속삭였다.
생명창조 팀이 발표하기 전에는 분위기가 항상 험악해지는 징크스 같은 게 있었다.
“생명창조 부서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천지명이 발표 자료를 열었다.
첫 화면에 세포 사진들이 잔뜩 나타났다.
“뭡니까 저게? 개구리 알인가요?”
오준태 제 3 연구소장이 말했다.
“하하하하.”
과학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인공세포 로잘린 4.8입니다.”
“그래요. 한 번 해보세요. 이번에는 또 얼마나 똥 같은 데이터들을 주절주절 늘어놓을지.”
고유성 제 2 연구소장이 말했다.
천지명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과 같은 맥락에서 로잘린 v4.80부터 v4.87까지 테스트를 했으며, v4.80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제작했습니다.”
천지명은 나름대로 발표를 잘 이어갔지만 내용을 보면 전부 다 ‘이랬는데 실패했습니다.’, ‘저랬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봤는데 실패했습니다.’ 하는 내용뿐이었다.
연구소장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천지명은 아랑곳 않고 발표를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여기, v4.87을 보시면 세포 내 소기관의 활성이 안정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근데 세포막이 불안정해서······.”
“막이 왜 불안정합니까?”
김현택이 물었다.
“그 이유를 추적하고 실험을 조정중인 상태입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삼투의 일종으로 추측하고 세포 안팎의 염 농도를 조절하려고 합니다.”
“그럼 그 실험까지 해서 완료된 데이터를 가지고 왔어야죠.”
고유성이 말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왜 그 실험을 안 했습니까?”
황수석이 물었다.
“이 업무를 진행할 때는 제가 GMO 부서 업무 지원으로 천안에 출장을 가서 한 달 동안 그곳에 있었······.”
“아니 그게 뭔 상관이냐고!”
제 2 연구소장 고유성이 소리를 질렀다.
GMO 부서는 제 2 연구소의 부서였다.
“당신이 자리에 없어도 전화나 이메일로 업무 지시할 수 있잖아! 부장급이 그걸 못해서 업무 지원 핑계를 대고 있어?”
천지명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 공격 자체가 억지스러운 것이다.
지금 얘기하는 실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또 물었을 것이다.
모르겠다고 하면 왜 모르냐고 까고,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면 그걸 왜 안 해봤냐고 또 공격했을 게 뻔하다.
“한 달씩 업무 1선에서 떨어져서 메일로 지시하다보면 프로그레스 진척에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천지명이 대답했다.
곧바로 연구소장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야?”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황수석이 소리쳤다.
“저희 팀원들 모두 최선을 다 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천지명 박사님. 당신 데이터 한 번 보세요.”
황수석이 말했다.
천지명이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천 박사님이 보시기에는 지금 이 데이터들이 연말 세미나에서 에이젠 과학자들을 다 모아놓고 발표할 만한 자료인 것 같습니까?”
“어떤 데이터도 헛되이 버려선 안 됩니다. 소장님. 쓸모없다고 생각한 데이터에서 중요한 발견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그딴 원론적인 얘기 집어 치우시고. 우리는 아웃풋을 보고 싶어요. 당신이 오늘 발표한 내용 중에서, ‘이랬는데 실패했습니다.’, ‘저랬는데 실패했습니다.’ 이거 빼면 뭐가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저희 능력이 좀 모자랐습니다.”
천지명이 공손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시계를 힐끔 보았다.
20분 째 방어중이다.
멀리서 박동현이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거의 도착했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