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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연말 세미나 (2) (172/301)

15화. 연말 세미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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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보고 세미나는 그 특성상 소집이 좀 자유로운 편이다.

연구소 사람들이 통째로 서로 많이 친하다면 연구소 단위에서 버스를 대절해서 과학자들이 한꺼번에 온다.

그리고 부서들이 각자 일하고 서로 협업하는 일이 잘 없다면 팀별로 알아서 오기도 한다.

제 6 연구소는 후자였다.

컨퍼런스에 들어온 건강식품 부서의 최명준이 서윤주와 함께 커피 내리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현미주에게 인사했다.

“아이고~ 현 책임님. 오랜만입니다.”

그가 현미주와 악수를 나누었다.

“반가워요. 잘 지내셨죠?”

“그럼요. 제 1 연구소에서는 이번에 뭐 좋은 성과 있습니까?”

“후후후 두고 보세요. 굉장한 걸 하나 가져왔으니까. 여기 박 주임네 팀이랑 같이 중요한 일 하나 했거든요.”

현미주가 박소연의 어깨를 슬쩍 끌어안으며 말했다.

“우리도 여기 서윤주 주임이랑 같이 좋은 성과들 만들었는데요.”

최명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양 쪽 부서 모두 미래가 창창하네요. 젊은 과학자들끼리 서로 친하게 잘 지내요. 두 분 모두 나중에 회사를 이끌어가야 할 인재들이니까.”

“하하. 여기 윤주 씨는 벌써 우리 팀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번 년도 성과를 만드는 데 아주 크게 공헌했거든요.”

“그래요? 뭐 좋은 성과 있어요?”

“작년이랑 비슷한 정도죠. 항암신약 팀은 중요한 거 만들었다고요? 지금 미리 좀 알려주면 안 됩니까?”

“후후. 이따가 세미나 때 발표하는 거 보세요. 이번 최우수상은 제 1 연구소에서 받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저희 연구소에서도 이번에 입사 1년 쯤 된 유명인 한 분이 자기네가 최우수상 받을 거라고 하시던데.”

“유명인?”

“김현택 소장님 면전에서 욕한 분이요.”

“······.”

“류영준?”

“네.”

“아하하하!”

현미주가 폭소를 터뜨렸다.

박소연도 고개를 숙이고 입을 틀어막고 큭큭 웃었다.

“영준 씨가 그래요?”

현미주가 물었다.

“네.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풋······. 아니, 물론 영준 씨는 잘 하는 사람이긴 한데. 큭큭······. 아, 어쩌나, 그 왈가닥이 정말. 웃기고 안쓰럽네.”

“그 사람 항암신약에서는 어땠나요?”

최명준이 물었다.

“똑똑하고 일 잘 하고. 괜찮았어요. 근데 사람이 너무 강직해서 문제지. 사내에 비리 같은 게 있을 때 남들은 뭐 못돼먹어서 입 닫고 있는 거 아니잖아요? 자기 혼자 잘 난 줄 아는 게 좀 눈꼴 시렸죠. 그 놈의 연구 윤리, 연구 윤리, 어휴. 대단한 과학자 나셨어요, 정말.”

“하하. 6 연구소 와서도 좀 그러더군요. 여기 윤주 씨랑 사소한 트러블이 있었는데 좀 어이없게 상황이 전개됐었거든요.”

“그리고 자기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생명창조 부서에요. 거기서 최우수상을 어떻게 받아.”

“저희도 어찌나 웃었던지. 이쯤 되면 그 분 건강이 좀 걱정되더라고요.”

“하하하!”

세 사람이 웃음기를 가라앉히느라 고생하고 있을 때였다.

대문이 열리면서 생명창조 부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박동현과 정혜림이 홀 안쪽으로 들어와 커피를 뽑았다.

“안녕하세요.”

현미주와 최명준, 박소연이 슬쩍 그들에게 다가가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박동현이 인사했다.

“류영준 박사는요?”

최명준이 물었다.

“오고 있습니다.”

“세미나 이제 곧 시작하는데.”

“곧 도착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고순열 씨도 안 계시네요? 제 옷 세탁비 받아야 하는데.”

서윤주가 말했다. 최명준이 큭큭 웃었다.

“안에서 봅시다.”

박동현이 짧게 말했다. 그는 커피를 뽑아서 정혜림과 함께 세미나홀 내부로 들어갔다.

생명창조 부서의 자리는 맨 끝이었다.

심지어 사람이 여섯인데 의자는 다섯이다. 그마저도 한 개는 낚시터에서나 쓸 것 같은, 등받이도 없는 싸구려 의자였다.

노골적으로 골탕 먹이려는 모양새였지만 별로 화가 나지는 않았다.

“먼저 와 계셨네요.”

생명창조 팀에는 두 명의 상급자가 더 있다.

천지명 수석 연구원과 배선미 책임 연구원이다.

두 사람은 천안에 출장을 가있었는데, 사실 생명창조 부서의 업무와는 완전히 무관한 일이었다.

‘GMO 개발 부서의 업무 지원.’

개량된 월동 시금치를 재배하는 일이었다.

말이 업무 지원이지, 사실 모멸감을 주는 데 목표가 있는 일이었다.

평생을 논문 읽고 실험만 해온 경력 20년 된 박사들에게 갑자기 한겨울 농촌에서 시금치를 수확하라고 하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일의 귀천 같은 걸 얘기하는 게 아니다. 한 분야의 프로페셔널이라는 사람한테 완전히 다른 업종의 일을 갑자기 시키면 얼마나 모욕감이 들겠냐는 것이다.

추위에 시달리며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야외에서 작업한다. 게다가 처음 하는 그 일에서 ‘굼뜨다.’거나, ‘멍청하다.’거나 욕까지 먹고 있으면 회사에 계속 남으려고 할 리가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견뎌냈다.

“고생하셨어요.”

박동현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천지명과 배선미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갑자기 빠져서 업무에 공백이 많이 생겼지? 박 박사가 수고했어. 혹시 오늘 발표 준비는 어떻게 되었는가?”

“일단 슬라이드는 다 만들어 뒀습니다.”

박동현이 USB를 내밀었다.

각 팀의 발표는 수석 과학자가 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천지명 수석 과학자는 아직까지 발표 자료를 보지도 못했다.

보안 시스템 때문에 오늘 아침이 되기 전에는 외부 반출이 안 되었고, 천지명은 지난날 새벽 한 시까지 시금치를 캐고 있었기 때문이다.

“휴우······.”

박동현이 전화로 설명을 해주긴 했지만 자신이 없다.

게다가 박동현이 더 안 좋은 소식까지 전했다.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 USB 안에 있는 슬라이드가 2주 전 자료라는 겁니다.”

“무슨 소리야?”

천지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2주 동안 다른 업무 때문에 굉장히 바빴거든요.”

“아이고. 너희도 어디서 시금치 뽑았니?”

배선미가 안타깝다는 듯 물었다.

“그게 아니고요. 우리 팀 신입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혼자 시작했는데 그게 대박이 터져서 데이터를 뽑느라 정신없었습니다.”

“대박?”

“미리 얘기 못해서 죄송합니다. 불과 1, 2주 사이에 나온 데이터인지라······. 처음엔 저도 반신반의 했었고, 확실해진 후에는 너무 바빴고요.”

“대체 무슨 소리야? 그 신입이란 사람이 어디에 있는데?”

“그게······.”

박동현이 머뭇거렸다.

세미나홀로 가기 전, 오전 8시.

박동현과 정혜림, 류영준은 사무실에서 발표 자료를 최종 정리하고 있었다.

우선 박동현이 만든 생명창조 프로젝트 데이터를 넣고, 그 뒤에 류영준이 만든 배아줄기세포 데이터를 넣었다.

앞부분은 공격받기 좋으니 최대한 빠르게 넘어가고 뒷부분에서 힘을 줘서 박수 받으며 내려오는 게 목표다.

그러나 슬라이드 수정이 끝났을 무렵이었다.

“키세키요!”

고순열이 숨을 헐떡거리며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뭡니까?”

박동현이 홱 돌아보며 물었다.

“근육 세포로 분화했는데!”

“분화했다고요?”

류영준과 정혜림이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잠깐.”

박동현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들겼다.

저 데이터를 지금 추가하면 너무 늦는다.

하지만 포기하기엔 너무나 막강한 증거물이다.

지금 가진 발표 자료에는 일반 세포를 배아줄기세포로 초기화시켰다는 내용만 들어가 있는 상태다.

하지만 그걸 다시 심장근육세포로 분화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하면?

연구 자료의 스토리라인이 완성된다.

이제부터 심장 이식이 필요한 환자를 치료할 때 이 기술을 쓰면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장기 기증자를 찾아 헤매고 기다리는 대신, 환자의 뺨 안쪽을 면봉으로 쓱 훑어다가 심장을 배양해서 이식하겠다는 것이다.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그 기술이 가시권에 들어온다.

“선배님들. 심근세포로 분화한 데이터가 빠지면 이 발표는 반쪽짜리가 돼요.”

류영준이 말했다.

“맞습니다.”

박동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합시다. 류 박사. 여기 남아서 순열 씨랑 같이 데이터 정리해서 배아줄기세포 파트 새로 만들어요.”

정혜림이 기겁했다.

“미쳤어요? 지금 당장 나가서 택시 타야할 시간이에요.”

“나도 알아. 하지만 저 데이터를 포기할 순 없어요. 그리고 아마 우리 연구소의 발표가 가장 마지막 차례일 거예요.”

정혜림이 더욱 충격을 받았다.

“그럼 세미나 진행 중에 들어가자는 거예요?”

“그게 최선이에요.”

“영준 씨가 오기 전에 우리 차례가 되면요?”

“그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 나와 혜림 씨가 먼저 가는 겁니다.”

박동현이 말했다.

“······.”

“천지명 부장님한테 생명창조 실험 데이터만 먼저 드릴 겁니다. 만약 혜림 씨가 얘기한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천지명 부장님이 생명창조 데이터 꺼내면서 시간을 좀 끌어주실 거예요. 그 때 내가 류 박사한테 전화해서 알려줄게요. 그럼 데이터 정리가 어디까지 됐든 멈추고 그 상태 그대로 들고 택시 타고 날아오세요. 여기서 택시 타고 20분이면 갈 수 있고. 천 부장님은 30분 이상 혼자 디펜스할 수 있습니다.”

네 사람 사이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박동현이 다시 물었다.

“어때요?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심근세포 분화 데이터를 빼더라도 이건 훌륭한 발표가 될 수는 있어요.”

“그럼 뺍시다.”

류영준이 딱 잘랐다.

박동현은 놀란 얼굴이 됐다. 좀 뜻밖이었다. 류영준의 성격상 못 먹어도 올인 하자고 나올 줄 알았기 때문이다.

“왜요?”

“만약 동현 선배가 얘기한 것처럼 상황이 전개된다면, 천 부장님이 발표하시는 중에 제가 단상에 난입해야 합니다.”

“하면 되죠. 김현택 얼굴에다가 쓰레기라고 욕도 박은 사람이 그걸 못해요?”

“그건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천 부장님이 뭐가 돼요?”

“······.”

“이 큰 성과 데이터를 신입인 제가 무대에 난입해서 발표하고, 천 부장님은 앞에서 깨지기만 하면 얼마나 괴로우시겠어요.”

“······.”

박동현과 정혜림, 고순열이 몇 초간 입을 벌리고 류영준을 바라보았다.

“풋.”

갑자기 박동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그리고는 세 사람 모두 일제히 폭소하기 시작했다.

“아악! 대박!”

정혜림은 류영준의 어깨를 손으로 찰싹찰싹 두들겼고 박동현은 눈물까지 닦아냈다.

“왜, 왜 그래요?”

“류 박사님은······. 정말 배려심 많은 분이에요.”

박동현이 말했다. 정혜림도 눈물을 찍어내면서 덧붙였다.

“큭큭큭······. 아, 눈물 나······. 천 부장님 성공했어······. 걱정해주는 후배도 생기고.”

“감사한 일이지만 영준 씨. 천 부장님은 걱정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저, 박동현이 제 6 연구소 고인물이라고 했죠? 천 부장님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어요.”

박동현이 말했다. 고순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그 분은 고이다 못해 이제 썩기 시작했다는······. 4급수 정도······.”

“영준 씨. 천 부장님 이래 봬도 생명창조 부서에서 16년을 방어한 사람이에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정혜림이 덧붙였다.

“일종의 만렙 탱커랄까. 닝겐노 멘탈와 튼튼데스······.”

고순열이 다시 거들었다. 박동현이 웃으면서 정리를 했다.

“그리고 어차피 영준 씨가 세미나실에 일찍 도착한다고 하더라도 천 부장님한테 배아줄기세포 프로젝트를 설명 해줄 여건은 안 될 거예요. 결국 류 박사가 올라가서 직접 강의해야 할 겁니다. 우리도 설명할 자신 없고요. 물론 원칙상 안 되는 거지만 그런 문제쯤 가볍게 눌러버릴 정도로 성과가 압도적이니 괜찮아요.”

“음······.”

“그리고 천 부장님도 16년을 회사에서 닦였는데, 후배가 소장들한테 한 방 먹여 준다고 하면 오히려 기분 좋죠. 난 그 분이 앞에서 발표하다 욕먹을 때 배아줄기세포 생각하고 히죽히죽 웃을까봐 겁나는데.”

“······. 알겠어요. 하죠.”

류영준이 말했다.

“잘 생각했어요.”

“두 분 먼저 출발하세요. 순열 선배랑 같이 데이터 정리해서 최대한 빨리 뒤따라가겠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박동현은 씨익 웃더니 발표 자료에서 배아줄기세포 파트를 통째로 제거하고 다른 이름으로 저장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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