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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연말 세미나 (1) (171/301)

14화. 연말 세미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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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림이 스포일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월요일 아침에 배아줄기세포 실험 성공 소식이 생명창조 부서에 전해준 충격은 상당했다.

배아줄기세포가 자란 배지를 본 박동현은 눈과 입이 모두 O자 모양이 되어서는 “어? 어? 어!”만 반복했다. 처음 불을 발견한 원시인 같았다..

고순열은?

배지를 보고 얼굴이 굳어서 어디론가 나가더니 코하쿠 피규어를 들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한 시간 쯤 후에 류영준과 마주치자 조심스럽게 귓속말로 이렇게 물었다.

“그, 류영준 쿤 혹시 회귀자입니까?”

“뭐요?”

“미래에서 과거로 회귀해서 왔냐는. 그러니까 원래 100년 쯤 후의 사람인데 절벽 같은 데서 구르거나 해서 이 시대로 오신 게 아닌가 의심된달까······.”

“······. 아닙니다.”

미래 지식 정도가 아니라 분자생물학에 대해 전지(全知)한 정답 사전 같은 게 머릿속에 들어있긴 하지만.

류영준은 배아줄기세포의 콜로니의 사진들을 모았다.

지난 주말 동안 컴퓨터에 의해서 1시간 간격으로 자동 촬영된 데이터다.

세포의 형태학적 변화 양상에 대한 좋은 증거물이 되었다.

하지만 이게 일반세포 상태에서 수정란 방향으로 역분화된 ‘배아줄기세포’임을 증명하는 증거는 좀 더 필요하다.

“지금부터 진짜 바빠질 겁니다. 세 분 다 좀 도와주세요. 금요일에 발표죠? 그 전까지 이게 배아줄기세포가 맞다는 걸 뒷받침하는 데이터를 완성해야 해요.”

류영준이 말했다.

“뭐······ 뭘 하면 되지? 알티 피씨알(RT-PCR)?”

박동현이 물었다.

“네. 일단 제가 세포에서 RNA를 모두 추출할 테니까 그거 역전사해서 엑솜 시퀀싱 해주세요.”

“그럼 전 DNA 메틸레이션 분석할게요.”

정혜림이 말했다.

전문 용어들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착착 호흡이 맞아 떨어졌다.

이 사람들은 아무런 성과도 못 만들고 몇 년째 삽질만 하고 있었지만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모두가 전문가다.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다들 정확히 알고 있고 그걸 할 실력이 있다.

류영준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두 분 모두 부탁드릴게요. 그럼 저는 이 배아줄기세포를 근육 세포로 다시 분화시키는 작업을 해보겠습니다. 거기까지 성공하면 완벽한 거니까요.”

지금은 배아줄기세포 상태가 되어 있지만, 이것은 원래 신장 세포였다.

신장 세포를 배아줄기세포로 만들었고, 전혀 다른 종류인 근육 세포로 다시 분화시킨다.

여기까지 성공하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완벽 무결한 데이터다.

그러나 실험에 들어가려는 류영준을 박동현이 즉시 가로막았다.

“아닙니다. 류 박사님은 발표 자료 만들어주세요. 그리고 특허 등록도 해야 합니다. 변리사랑 상담 을 해주세요. 순열 씨!”

“예.”

고순열이 고개를 들었다.

“순열 씨가 이 배아줄기세포를 근육 세포로 분화시켜주세요. 그거까지 성공하면 이제 아무도 뭐라고 못합니다.”

“오레니 마카세요!”

“무슨 뜻입니까?”

“나만 믿으라는!”

“······. 감사합니다. 우리 이거 데이터 완성시켜서 이번에 최우수상 받자고요.”

류영준은 고순열에게 맡기고 발표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실험이 완벽하게 잘 되었더라도 그것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배아줄기세포 초기화를 위해서 왜 하필 ‘SOX2, cMyc, OCT4, KTF4’ 네 개의 유전자를 골랐는지, 그들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따위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떠한 메카니즘으로 배아줄기세포가 된 것인지 밝혀낸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필수적인 건 아니다.

사람들이 먹는 항암제 중에서도 그 기작이 불분명한 것도 있다.

그냥 그렇게 해보니까 효과가 있어서 계속 쓰는 것이다.

하지만 기작에 대한 설명이 명백하면 더 좋은 것은 당연하다.

류영준은 네 유전자에 대한 설명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로잘린의 상태창을 켜놓고 피트니스를 써가면서 그대로 받아쓰기를 하는 것이다.

Sox2 유전자는, DKK1이라는 유전자의 발현을 좌우하여 윈트 신호를 조절함으로써 성체줄기세포의 다분화 능력을 유지하며······.

아직 나오지 않은 데이터들은 빈 칸으로 비워두고 설명만 미리 썼다.

세포 콜로니 사진들을 넣고 슬라이드를 하나씩 완성시켜나갔다.

***

3일 동안 박동현과 정혜림, 고순열은 자진해서 야근했다.

성공한 실험의 데이터를 완성시키는 과정이다.

힘들기는 하지만 이 폭탄 같은 성과를 연말 세미나에서 터뜨렸을 때 연구소장들과, 그 동안 무시하던 다른 부서의 부장들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생각하면 절로 힘이 났다.

“메틸레이션 데이터 뽑았어요.”

가장 먼저 온 건 정혜림이었다.

그녀는 엑셀 파일을 하나 보내놓고는 류영준의 자리로 달려와서 옆에 앉아서 하나하나 설명했다.

“DNA 상에서 메틸레이션 처리된 곳을 비교한 거예요. 1번 데이터는 6년 전에 일본에서 리포트 된 진짜 수정란에서 만들어진 배아줄기세포의 데이터고, 2번 데이터는 류영준 씨가 이번에 만든 ‘역분화 줄기세포’의 데이터에요.”

한 마디로 이번에 류영준이 만든 게 정말로 기존의 기술로 만들던 것과 동일한 ‘배아줄기세포’가 맞는지를 검증하는 데이터 비교분석이다.

“똑같네요.”

“그쵸? 류 박사님! 진짜 대박 아니에요? 단 한 곳도 틀린 거 없이 완벽하게 다 똑같아요! 미쳤어 진짜!”

정혜림이 한껏 고조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류 박사님!”

그 타이밍에 박동현이 뛰어 들어왔다.

“RT-PCR 데이터 가지고 왔습니다. 유전자들 발현 레벨 정리한 거예요. 2만 종류 유전자에서부터 만들어지는 10만 종류의 RNA를 전체 분석한 겁니다.”

“어때요?”

“엑셀 보냈는데 한 번 열어보시죠.”

류영준이 파일을 열자 정혜림이 보낸 것처럼 그래프 파일이 나타났다.

“토탈 RNA 데이터베이스에 맵핑해서 봤는데. 보세요, 1번 데이터는 진짜 수정란으로 만든 배아줄기세포의 데이터고, 2번은 류 박사님이 만드신 건데요. 똑같죠?”

“똑같네요.”

“성공이네.”

“진짜······.”

세 사람 사이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박동현이 침을 꼴깍 삼켰다.

“류 박사님. 이거 특허 출원은 어떻게 됐나요?”

지난 며칠 동안 류영준은 발표 자료를 만들면서 특허 출원을 준비했다.

제 6 연구소를 담당하는 특허법률사무소에 의뢰해서 이미 서류상의 업무를 모두 마친 상태다.

“이미 했습니다. 제 손에서는 지금 당장 더 할 일은 없고요. 특허법률사무소에서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에요.”

“좋아요. 류 박사. 이거 어떻게 할 거예요?”

“네?”

“이 정도 아이템을 발표하면 그냥 성과 최우수상 이런 걸로 안 끝날 겁니다. 승진하거나 다른 부서로 이동되거나, 아마 줄기세포 부서로 가지 않을까 싶은데.”

“부서 이동은 안 할 거예요. 여기 온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옮기기 싫어요. 개인적으론 승진도 됐고, 성과급으로 주면 좋겠네요. 우리 회식이나 한 번 하게.”

“에이젠이 나쁜 짓 많이 해도 성과 만드는 연구원들한테 성과급은 잘 퍼줘요. 근데 내가 볼 때 이 기술은 10년 쯤 후엔 의학의 트렌드를 바꿔버릴 수도 있는 기술입니다. 에이젠 경영진이랑 연구소장들이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연봉 수준의 성과급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와아아······.”

정혜림이 감탄했다.

“나오면 N분 할까요?”

류영준이 말했다.

정혜림이 그를 홱 돌아보았다.

“무슨 N분이에요. 류 박사님이 다 하신 건데.”

“세 분이 데이터 만들어주시니까 발표도 할 수 있는 거죠.”

“안 그러셔도 됩니다.”

박동현이 설명했다.

“류 박사님 개인 몫으로만 나오는 게 아까 얘기한 성과급이고. 그 외에 우리 팀한테도 따로 성과급이 떨어질 거예요.”

“정말요?”

“물론이죠. 일단 데이터 정리만 잘 해주세요. 필요한 거 있으면 도와줄 테니까 뭐든 얘기하시고.”

박동현이 말했다.

“근데 근육 세포로 분화하는 건 어떻게 됐죠?”

“음······. 고순열 씨가 계속 세포 실험실에서 살다시피 하던데.”

박동현이 말했다.

“아직 안 된 것 같아요.”

“그게 쐐기를 박는 데이터인데······.”

***

금요일 오전.

에이젠 본사의 제 1 연구소 대회의장은 세미나 준비로 바빴다.

과학자는 보통 출퇴근할 때 자유로운 복장을 착용한다.

정장 입고 실험을 어떻게 하겠는가?

반바지나 스타킹은 혹시나 위험한 시약이 튀었을 때 보호할 수 없으므로 금지되어있지만 보통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오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오늘은 모두 정중한 차림이다.

연말 보고 세미나.

에이젠의 과학자에겐 가장 중요한 날이면서 가장 피곤한 날이기도 하다.

철컥.

김현택 연구소장과 제 1 연구소 과학자들이 홀에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다른 연구소의 과학자들도 그에게 앞 다퉈 몰려와 인사했다.

김현택은 명실공이 에이젠 최고의 과학자이며 실세다.

현재 CTO인 니콜라스 킴이 은퇴하면 다음 CTO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금은 다른 연구소의 소장 정도지만 몇 년 내에 전체 연구소를 총괄하는 지위에 오를 거라는 걸 모두가 예측하고 있었다.

물론 김현택이 그처럼 잘 나가게 된 배경에는 에이젠 최고의 효자 부서인 항암신약 부서가 있었다.

에이젠의 키플레이어, 메시 호날두 같은 부서다.

제 1 연구소에서는 그야말로 연구소 전체의 성과를 책임지며 모든 부서를 끌어안고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는 팀이었다.

이번에도 그들이 개발해낸 아이템은 엄청난 것이다.

모바일 진단기기 개발 부서와 함께 협업하면서 위암을 조기 진단하는 진단 시스템을 만들었다.

혈액 한 방울만 있으면 거기서 DNA를 분석해서 위암이 있는지 없는지 찾아낸다.

정확도는 92퍼센트.

민감도는 96퍼센트.

좀 더 정교하게 개발할 필요가 있지만 지금의 효율도 나쁘지 않은 편이다.

아직 발표를 안했는데도 여기저기 소문이 샜다.

항암신약 부서와 모바일 진단기기 개발 부서는 모두의 관심과 부러움을 몽땅 받고 있었다.

“어? 커피 어디서 받았어요?”

약간 늦게 들어온 항암신약 부서의 현미주 책임 연구원이 김형석 선임 연구원에게 물었다.

“입구에 있어요.”

“맛있어요?”

“스타벅스에서 가져왔다는 거 같은데. 스벅 맛입니다.”

“썩 좋아하는 데는 아니지만 한 잔 가져와야겠네. 아직 세미나 시작하려면 좀 남았죠?”

“6 연구소는 아직 오지도 않았어요. 다녀와요.”

현미주는 복도로 나가다가 박소연을 마주쳤다.

그녀는 류영준과 사귀었던 모바일 진단기기 개발 부서의 주임 연구원이었다.

작고 예쁜 얼굴이다. 입사했을 때부터 모바일 진단기기 부서의 비주얼 담당이라고 소문이 돌았던 여자다.

일을 할 때는 거의 민낯으로 출근했는데, 오늘은 공들여 화장을 하고 향수도 뿌렸다.

“소연 씨. 세미나 한다고 꽃단장 하고 왔네?”

“하하. 오랜만에 치마 입을 수 있는 기회니까요.”

“이번에 위암 진단 시스템 개발할 때 소연 씨 공이 컸어요. 분명 이번에 소연 씨한테 보상이 많이 갈 거예요.”

“진짜 그랬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책임님이랑 항암신약 부서에서 암 유전자 표지 물질을 잘 잡아줘서 된 거죠 뭐.”

현미주는 커피를 뽑았다.

“근데 소연 씨. 제 6 연구소 혹시 왔는지 알아요?”

“글쎄요.”

“영준 씨가 거기 있지 않나?”

“······.”

“얼굴 보면 어색하거나 하지 않아요?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괜찮아요. 뭐. 제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요.”

“생명창조 부서······. 오늘은 또 얼마나 깨지려나. 걱정되네.”

현미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된다고 말은 했지만 은근히 즐기는 눈치다.

“분위기 험악해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네요. 근데 제 6 연구소에 잘하는 팀도 있지 않아요?”

“건강식품 부서? 그쪽이 6 연구소의 희망이나 다름없지.”

“거기서 무슨 일 해요?”

“프로바이오틱스라든지 영양제라든지 이것저것 해요. 하지만 괜찮아요. 뭘 들고 오든 위암 진단 시스템보단 못하거든. 항암신약이랑 모바일진단기기 두 부서 중 하나가 최우수상 받을 거예요.”

“흐응. 항암신약 부서에는 위암 조기 진단 기술 말고 다른 비장의 무기도 하나 더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요.”

박소연의 말에 현미주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글쎄요. 난 모르겠는데.”

철컥!

컨퍼런스 정문이 열리면서 한 무리의 과학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제 6 연구소에서 온 과학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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