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독감 치료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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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려면 못하는 건 아니지만. 특허 등록하게?”
박주혁이 대답했다.
“어. 가능하면 지금. 내가 평일에는 회사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걸 못해.”
“지금 한다고?”
“어.”
“지금 신약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택배 보낸 거 같은데 내가 뭐 환각을 보고 있냐 혹시? 약도 없는데 특허 등록을 어떻게 해?”
“변호사님이 법 잘 모르시네”
류영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주혁아. 특허 출원한 다음에 1년 내에 한 번 수정할 수 있어.”
“그건 아는데, 말 그대로 수정하는 거잖아 그건?”
“출원 상태에서는 내용이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데이터가 없는 상태에서 컨셉만 써서 출원이 가능해.”
“미친······.”
“그래서 먼저 출원해놓은 다음 실험해서 얻은 데이터를 출원 수정으로 넣은 다음 심사 받고 등록하는 거야.”
“맙소사.”
“나쁜 짓이나 편법처럼 보이지만 그런 거 아냐. 이 바닥이 원래 컨셉 싸움부터 되게 치열하거든. 그리고 컨셉부터 공표해야 다른 연구자들이 연구 주제가 겹쳐서 헛우물 켜는데 힘 빼는 일이 없지.”
“그런가?”
“그리고 1년 안에 걸어놓은 특허 내용들을 못 챙기면 자동으로 다 잃어버리게 되니 괜찮아. 그래서 난 데이터 없어도 컨셉으로 출원 먼저 할 거야. 그래야 빨리 등록을 끝낼 수 있으니까.”
“좋아. 근데 변호사도 특허 출원을 할 수는 있는데 변리사랑 얘기하는 게 더 나을걸.”
“아는 변리사 있어?”
“잠깐 기다려봐.”
박주혁은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를 찾았다.
<법학과 12 이혜원>
***
변리사 이혜원은 정윤대에서 법학을 전공, 생물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한 여자였다.
그녀가 입학했을 때에 류영준은 대학원에서 학위 과정을 하고 있었고, 박주혁은 법학대학원 (로스쿨)에 있었다.
이 정도로 학번 차이가 많이 나면 사실 마주칠 일이 없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법대 전설의 고인물, 박주혁은 가끔 과방에 출몰해 후배들에게 밥을 사주며 어울렸다.
자기 나이와 학번을 생각 못하고 주책 떤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박주혁의 유머러스하고 쿨한 성격은 후배들한테도 꽤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그 후배들 중 하나가 이혜원이었다.
이혜원은 박주혁하고 꽤 친하게 지냈고, 관계를 의심하는 동기들이 있을 정도였지만 정말로 그냥 좋은 친구였다.
이혜원이 변리사 시험공부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고시원에 봉인해버린 후에는 잠깐 못 보게 되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변리사 자격증을 땄고, 이제는 박주혁도 변호사가 되었다. 둘 다 비슷한 시기다.
경험이 없는 초보 변리사가 선배들을 따라잡는 방법은 기존의 특허 관련 판례들을 죽어라 파는 것뿐이다.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이 그녀를 지독하다고 얘기할 정도가 되었을 때, 이혜원은 바이오 신약 관련 특허 판례 중 ‘모르는 게 없는’ 상태가 되었다.
지금은 특허 사무소를 열어서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데 솔직히 말하면 일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실력은 확실한데 왜 그럴까?
당신이 회사의 부장급 직위이고 예상 매출 3조 짜리 신약의 프로토타입 특허를 맡겨야 한다고 해보자.
50대 후반의 산전수전 다 겪은 아저씨 변리사와 20대 중후반의 새파란 아가씨 변리사 중 누구에게 일을 맡기겠는가?
보통 전자다.
대부분의 손님들이 들어와서 ‘더 경력 있는 남자 직원은 없냐?’고 물은 다음 이혜원이 고개를 저으면 그냥 나가버리는 게 다반사였다.
‘특허 법인에 들어가서 경력을 좀 쌓을까?’
그녀는 며칠 전부터 하던 고민을 오늘도 하고 있었다.
특허 사무소는 개인 사업이고, 특허 법인은 여러 명의 변리사들이 법인을 차려서 로펌처럼 활동하는 것이다.
지이잉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네 여보세요.”
이혜원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에이젠 연구원 류영준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박주혁 변호사님 소개 받고 전화 드렸습니다. 특허 출원 관련해서 간단히 미팅하고 싶은데요.
이혜원은 컴퓨터 화면에 떠있는 구글캘린더를 보았다.
거의 다 텅텅 비었다.
“언제든 괜찮긴 한데, 이번 주는 목요일이랑 금요일 오후 한 시부터 네 시 사이가 가장 좋아요.”
-죄송한데 제가 주말밖에 안 되어서 그런데 혹시 주말은 어떠신가요?
“주말이요?”
-가능하면 내일요.
이혜원은 좀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좋아요. 내일 미팅 잡아놓을게요. 오후 한 시 괜찮으세요?”
-좋습니다. 어디로 가면 되죠?
“관악구 인헌동 혜원국제변리사무소입니다.”
관악구 인헌동.
류영준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알겠습니다. 그 때 뵙겠습니다.
류영준이 전화를 끊었다.
굳이 날짜를 바짝 당기는 데는 이유가 둘 있다.
첫째는 당연히 빨리 할수록 돈을 버는 것도 빨라지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라도 리액션케미스트리나 셀바이오의 누군가가 나쁜 맘을 먹고 약을 훔쳐가는 걸 막기 위해서다.
특허 출원을 미리 해놓으면 안전하기 때문이다.
류영준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자 옆에서 박주혁이 물었다.
“뭐래?”
“내일 만나러 가기로 했어.”
“같이 가자.”
“왜?”
“이공계 촌놈이 못 알아듣는 용어들 나오면 번역해줘야지.”
“변리사님이 해주시겠지.”
“안 돼. 너랑 혜원이 둘이 얘기하면 재앙이야. 최소 중미 무역전쟁급이라고. 네가 설명충 시작하면 혜원이 성격에 끊지도 못하고, 속 터질 거 아니냐? 혜원이가 설명해주는 것도 네가 한 번에 못 알아들을 거고.”
“내가 언제 설명충 했어?”
“너 일학년 때 나랑 같이 미팅 나가서 세현대 여자애들한테 DNA 이중 나선 구조가 왜 RNA보다 더 튼튼한지 설명하고 같이 까였던 거······.”
“아니, 그 얘기가 왜 나와? 무려 10년 전 일인데 대체 언제까지 우려먹는 거야?”
“아무튼 같이 가자고.”
“야 솔직히 얘기해봐. 너 변호사 아니고 백수지? 변호사님이 대체 왜 이렇게 시간이 남아돌아?”
“나 대한변호사협회에서 6개월 실무 수습 끝난 지 이제 겨우 2주 됐다. 조금 더 놀 거야.”
“에이, 그래. 맘대로 해라.”
“대신 차 태워줄게.”
“그걸 먼저 얘기했어야지. 오후 한 시까지 가야한다. 오전 중에 픽업하러 오는 거지?”
“오케이.”
박주혁이 손가락을 딱 튕기며 흔쾌히 말했다.
***
일요일 오후 한 시.
“안녕하세요.”
류영준이 변리사무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야!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박주혁이 이혜원의 얼굴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어머! 주혁 오빠도 왔네.”
이혜원이 생글생글 웃으며 나왔다.
“오랜만에 혜원이 보고 싶어서 왔지. 혜원아. 이쪽은 류영준. 에이젠 주임연구원 박사님이야.”
“반가워요. 변리사 이혜원입니다.”
박주혁이 소개해주자 이혜원이 류영준과 악수를 나누었다.
“반갑습니다. 류영준입니다.”
“그럼 바로 특허 얘기 해볼까요? 신약을 출원하시는 건가요?”
“네. 독감 치료제 신약을 개발중입니다. 약물은 한 개고요. 특허 출원을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상담료부터 정하고 시작하지?”
박주혁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괜찮아요. 상담료는 무료로 해드릴게요. 오빠 소개 받고 오신 분인데요. 혹시 개발이 어느 단계에 있나요?”
이혜원이 물었다.
“신약 화합물을 합성 진행중입니다.”
“······.”
이혜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그 약물을 테스트한 결과는 아직 없는 건가요?”
“하지만 생물학적 제제로서 약효를 나타내는 분자생물학적 기작을 제시할 순 있죠. 그 컨셉을 먼저 등록하고 싶어요. 데이터는 나중에 수정할 때 추가하는 걸로.”
“음······. 가능하긴 한데.”
원래 이렇게 하긴 한다. 하지만 그건 약이 성공할 가능성이 확실히 보일 때의 얘기다.
세포 실험에서 괜찮은 데이터를 본 후에 특허 출원을 해놓고 동물 실험하고 데이터를 추가해서 등록하는 식이다.
아무런 데이터도 없는 상황이라면 실패할 확률이 거의 백 퍼센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신약 물질을 합성중이라고 함은, 세포 실험 데이터조차 없다는 뜻인데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된다고 생각하고 특허 출원까지 하려는 거지?
혼란스러운 표정의 이혜원에게 류영준이 재차 물었다.
“할 수 있죠?”
“네?”
“출원이요.”
이헤원이 말했다. 류영준이 재차 물었다.
“네······. 할 순 있어요. 하지만 박사님. 이렇게 컨셉만 등록하면 실험 데이터가 1년 안에 꼭 나와야 해요. 안 나오면 컨셉에 대해서도 페널티가 좀 생겨요. 그래서 신중하게 하셔야 되고요.”
“1년까지 안 갑니다. 데이터는 1개월 안에 나올 거예요.”
“1개월이요?”
이혜원이 경악했다.
“아직 약물 합성 중이라면서요?”
“굉장히 잘 먹히는 약물이거든요. 아마 모든 실험이 한 번에 쭉 성공할 겁니다. 그러니까 미리 서류를 전부 준비해놓은 다음, 데이터가 나오면 곧바로 특허 출원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 알겠습니다. 일단 제가 필요한 서류들을 드릴게요. 출원하실 의약품의 기작에 대해 간략하게 쓰셔야 하고, 그밖에도 채워야 할 항목들이 있습니다. 제가 표시해드릴게요.”
“여기서 좀 쓰고 가도 되나요?”
류영준이 물었다.
어차피 집에 가도 할 일도 없고, 여기서 쓰는 게 문항 중 모르는 게 있을 때 변리사에게 바로 물어볼 수 있으니까 더 낫다.
하지만 이혜원이 대답하기 전에 박주혁이 끼어들었다.
“변리사는 시간당 얼마씩 돈 받아. 너 여기 앉아서 쓰고 있으면 지갑 박살난다.”
박주혁이 말했다.
“하하, 상관없어요. 어차피 손님도 없는데요.”
이혜원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류영준이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확실히 책상이나 책장에 올라와있는 서류의 양 따위를 보면 고객이 붐비는 사무소는 아닌 것 같다.
“수임료는 얼마나 들까요?”
“150 정도로 할까요?”
이혜원이 물었다.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어쩝니까. 정해져있는 거 아니에요?”
이혜원이 당황했다.
“아, 그런가······. 사실 몇 번 안 해봐서.”
류영준이 박주혁을 힐끔 쳐다보았다.
믿어도 되는 거냐는 듯한 표정이다.
“걱정 마. 이 친구 실력 좋아.”
박주혁이 말했다.
“근데 일이 잘 안 들어오나보네. 이해가 안 되는구만.”
박주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어려서 그렇죠 뭐.”
이혜원이 말했다.
“어리다고 무시를 해? 젊으면 머리도 더 쌩쌩 돌아가고 기억력도 좋고, 그냥 더 좋지 뭐.”
“이런 거 맡기러 오는 사람들 대부분 회사에서 차장, 부장급이잖아요. 그 분들 나이대에서 보시기엔 좀 믿음직스럽지 않은가 봐요.”
이혜원이 설명했다.
“들어오시면 항상 저보고 좀 경험 많은 분 없냐고 물어보고 나가는 게 다반사에요.”
“이번 일 잘 되면, 제가 앞으로 일 계속 드리겠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계속 줄 일이 있긴 있냐?”
박주혁이 물었다.
“질병이 있는 한 새로 나오는 신약도 계속 있지.”
“그 신약이 네 거냐는 건데.”
“이번 일이 잘 되면 앞으로도 계속 생길걸. 아무튼 부탁드려요.”
“네! 맡겨주세요.”
이혜원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뚜르르르.
류영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그가 한 손으로 계속 서류를 작성하면서 받았다.
-류 박사님?
“네. 누구세요?”
-뭐야? 우리 번호 교환 안 했었나요? 난 번호 왜 있지? 저에요. 정혜림이에요.
“아! 네, 선배님. 무슨 일이에요?”
-어떻게 한 거예요?
“네?”
-연말 보고 자료 만들려고 일요일에 지금 출근했는데······. 혹시나 해서 봤는데······.
정혜림이 말을 더듬었다.
-박사님이 만든 세포가 배지에서 자랐어요. 이거 진짜 배아줄기세포 맞는 거 같은데······. 진짜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