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독감 치료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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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최명준이 크게 웃었다.
“아니 뭐, 진짜 생명 창조라도 했습니까?”
“하하하하!”
구경하러 몰려든 과학자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진짜로 하긴 했지만 증명할 수 없으니까 일단 논외로 치고.’
“그건 나중에 해드리죠.”
류영준이 말했다.
“생명창조 부서에서 생명창조를 한 것도 아니면, 대체 뭐 어떤 것이기에 그렇게 자신만만하십니까?”
“이번 연말 세미나에서 전체 최우수 성과 상을 받을 겁니다.”
“······.”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사방이 조용해졌다.
이 정도까지 세게 나가니 최명준도 당황했다.
제 6 연구소 내부에서 수상을 한다고 해도 놀랄 일인데 전체 최우수 성과?
국내의 모든 에이젠 연구소를 통틀어서 제일 큰 성과를 발표하겠다는 건가?
“진심입니까?”
최명준이 물었다.
“그럼 2주 후에 까볼 패인데 허세를 부리나요?”
“당신, 혹시 항암신약 부서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정신에 문제 생긴 거 아닙니까?”
“2주 후에 세미나에서 직접 보시면 알 거예요.”
“하! 좋아요. 기대하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로 끝내면 안 되죠. 씨씨티비 까서 보고 사과하시라고요.”
“이게 이미 음식 엎지른 문제가 아니란 거 아시잖습니까. 2주 후에 봅시다. 정말 상을 받으시면 저희가 사과도 드리고, 여기 고순열 씨 티셔츠의 세탁비도 드리겠습니다.”
류영준은 고순열의 티셔츠를 힐끔 보았다.
솔직히 시장에서 5천원 주고 샀을 것 같은 옷이다.
“순열 씨. 이거 꼼데가르송에서 산 거죠?”
류영준이 물었다.
서윤주가 황당한 듯 눈이 커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저게 뭐가 꼼데가르송이야? 헌옷수거함에서 방금 꺼낸 것처럼 생겼는데! 아니, 그리고 일단 브랜드 마크도 없잖아요!”
“빈티지한 느낌으로 한정판 만든 거라 마크도 달랑달랑하게 붙여놨는데 떨어진 거예요. 이거 중고라도 20만 원 쯤 하죠?”
류영준이 개소리를 마구 지껄였다.
“불쌍한 순열 씨. 한정이라 같은 건 또 못 사실 테고. 비슷한 거라도 사려면 부지런히 발품 팔아야할 텐데. 비싼 인력인 고순열 주임님이 옷 산다고 힘을 빼면 우리 팀 손해도 막심하고요. 순열 씨, 한 40 받으셔야겠네요?”
“하하하!”
최명준이 다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말했다.
“생명창조 부서 특이하다고는 들었지만 진짜 황당한 사람이 들어왔구만.”
“뭐, 평범하면 김현택한테 욕도 안 했겠죠. 제가 좀 비범합니다.”
“류영준 박사랬나요? 이름 기억해놓을게요. 당신 말대로 하죠. 생명창조 팀이 대상 받으면 저희가 40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해요.”
“그 때 가서 봅시다. 가죠, 윤주 씨.”
최명준이 서윤주를 데리고 사라졌다.
사람들이 주위에서 물러가자 박동현이 거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한 기세로 류영준을 와락 붙들었다.
“미쳤어요? 대체 왜 그런 거야?”
정혜림도 외쳤다.
“영준 씨 어쩌려고 그래요!”
류영준은 씨익 웃기만 했다.
“저 믿고 조금만 지켜보세요.”
“아니, 류 박사가 잘하고 말고를 떠나서 온 지 일주일 된 사람이 무슨 성과를 만든다고요! 대체 뭘 믿어요!”
박동현이 답답한 듯 말했다.
“노벨상.”
“예?”
“노벨상감이라고 하셨죠.”
류영준이 말했다.
“그 정도 성과를 발표하면 연말 세미나 최우수상 정도는 쉽게 받겠죠.”
***
토요일 아침.
류영준은 로잘린의 상태창을 두들기고 있었다.
주중에는 배아줄기세포 실험을 한다고 피트니스를 꾸준히 썼지만 할 일도 다 했고, 주말에는 따로 쓸 일이 없다.
하지만 피트니스가 가득 찬 상태로 시간만 보내 허비하는 것은 절대 사양이다.
ATP를 정맥 주사해서 2.1까지 올라갔지만 로잘린의 피트니스는 기본적으로 1.5가 최댓값이다.
류영준은 1.5의 범위 내에서 주말 동안 각종 질병들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기로 했다.
주말 동안 에이젠과 무관하게 중요한 약을 하나 개발할 생각이었다.
에이젠과 무관하게 하려는 이유는 물론 에이젠에게 특허권을 떼어주고 싶지 않아서다.
4평짜리 자취방에 실험 기구는커녕 TV도 없는데 에이젠 손을 빌리지 않고 신약을 개발하는 방법?
실험 대행업체에 의뢰하면 된다.
화학 회사에 의뢰해서 약을 만들고 동물 실험을 시켜서 효과를 본 다음 특허를 등록한다.
그리고 그걸 다른 제약회사에 팔아버릴 생각이다. 못해도 수십억을 받을 수 있다.
단타로 돈을 벌기 위해서다. 줄기세포는 돈이 나올 때까지 너무 오래 걸리니까.
줄기세포는 그렇게 써버리기 아까운 데다가, 연구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춘 회사가 국내에선 에이젠이 유일하기 때문에 이런 선택지가 없었지만.
‘이번 주말 안에 이 가난에 끝장을 본다.’
주말로 한정한 이유는 물론 월요일부턴 줄기세포 실험과 발표 준비로 바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간암의 치료법을 알려줘.”
류영준이 로잘린의 상태창에 명령을 내렸다.
-피트니스가 모자랍니다.
-간암은 한 번에 분석하기엔 너무 복잡한 질병입니다.
“쳇. 그럼 폐암.”
-피트니스가 모자랍니다.
-폐암은 한 번에 분석하기엔 너무 복잡한 질병입니다.
‘암을 표적으로 잡는 게 좀 오바인가?’
암은 너무나 복잡한 질병이다. 수많은 요인과 변수가 어지럽게 얽혀 있어서 수수께끼와 같다.
암을 제외한 모든 질병을 정복하는 것과, 모든 암을 정복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어려울까?
개인적으론 후자다.
로잘린의 레벨이 높아져서 피트니스의 총량이 늘어난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힘으로 덤벼들 만한 것은 아닌 듯하다.
‘로잘린의 레벨을 좀 높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띠링!
갑자기 로잘린의 상태창이 알림을 울렸다.
<로잘린이 다음 영양소를 필요로 합니다. 비타민 B6 0.7 mg, 아연 3 mg 보상 : 피트니스 0.8>
피트니스는 지금 1.5로 꽉 차있는 상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호기심이 일었다.
‘피트니스를 소모하지 않고 지금 먹어보면 어떻게 될까?’
비타민 B6와 아연.
음식을 먹어서 섭취할 수도 있겠지만 정량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언제 또 이런 메시지가 뜰지 모른다.
‘약국에서 종합 영양제를 하나 살까.’
***
딸랑.
약국 현관문의 종이 울렸다.
“어서 오세요!”
송지현이 친절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류영준이 다가가자 그녀가 얼굴을 알아보았다.
“지난주에 오셨던 분이시죠? 프로바이오틱스?”
“어, 네. 맞습니다. 비타민 B군이랑 아연 들어있는 종합 영양제 주세요.”
류영준이 말했다.
“잠시만요.”
송지현은 서랍장으로 이동해서 까다로운 시선으로 여러 종류의 영양제들을 검토했다.
이윽고 그 중 하나를 꺼내어 가져오면서 말했다.
“근데 전에 얘기하셨던 프로바이오틱스요. 그런 내용은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제약 회사에서 일하거든요.”
“사실 지난번에 말씀해주신 걸 듣고 나서 우리 회사 연구원들한테 한 번 물어봤어요. 제가 휴직한 동안 진전이 하나도 없었다더군요. 비피도박테리움이 잘 안 되는 것 같다면서 말이에요.”
“그래요?”
예상했던 바다.
“근데 여전히 비피도박테리움을 공략하는 제약회사들은 많아요. 그게 안 된다는 건 꽤 중요한 정보 같은데, 저한테 왜 얘기해주신 거예요? 사내 기밀 아니에요?”
“뭐, 중요한 정보인지 사내 기밀인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일단 프로바이오틱스를 하는 부서가 아니라서.”
“그럼요?”
“음······. 줄기세포 쪽이요.”
생명창조 부서요, 라고 얘기하는 건 좀 황당하게 들리거나 회사까지 추측될 수 있을 듯해 돌려 말했다.
“줄기세포면 미생물하고는 완전 다른 분야네요?”
“네, 그렇죠.”
“근데 어떻게 프로바이오틱스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아세요?”
류영준은 카드를 내밀고 계산하면서 대충 둘러댔다.
“뭐, 논문들 읽다가 그냥 생각해본 거였어요.”
류영준은 종합영양제를 한 알 꺼내어 입에 넣었다.
<비타민 B6, 아연 보충 완료.>
<로잘린 동기화 +1%>
<로잘린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세포 피트니스 최댓값이 올랐습니다. (1.8)>
<비타민 B6의 정제 순도가 높습니다. 피트니스가 추가로 오릅니다. 로잘린 피트니스 +0.1>
세포 피트니스 : 1.8
‘오?’
뜻밖의 메시지들에 류영준이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이 영양제 어디 거야? 맘에 드는데?
류영준이 영양제 포장지를 살펴보았다.
“이거 동광제약 거네요? 베네핏알파?”
“네.”
“요즘 영양제 시장은 에이젠이 가장 잘 나가지 않아요? 파워네이처를 주실 줄 알았는데. 광고도 많이 하고.”
“그거 찾는 분 많더라고요. 근데 그거 베네핏알파랑 성분 거의 똑같아요. 그런 주제에 두 배나 비싸죠. 하지만 원하시면 파워네이처 드릴게요.”
“아, 괜찮아요. 저 그리고 에이젠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그래요?”
송지현이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류영준이 말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파워네이처 솔직히 구성물은 별 것 아닌데 브랜드값으로 비싸게 팔잖아요.”
“그렇죠. 저도 에이젠 싫어해요. 처방에 영향을 주는 건 아니지만.”
송지현이 말했다.
“그래요? 약사님은 왜 에이젠 싫어하세요? 거기 경영이 엉망이지만 제약은 잘 하는데. 약사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회사 아니에요?”
“그렇죠. 하지만 제약회사 직원으로서는 별로 맘에 안 들어요. 에이젠은 나쁜 짓도 잘하거든요.”
“나쁜 짓?”
“벤처 제약회사가 만든 경쟁약을 사서 없애버린다거나.”
류영준은 놀라서 사레가 들 뻔했다.
“저희 회사가 당했거든요.”
송지현이 말했다.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설마? 혹시? 아니겠지?’
류영준은 항암신약 부서에 있을 때 간암 치료제를 하나 리포트했었다. 그리고 그걸 연구소장 김현택과 경영진이 사들여서 없애버렸다.
벤처 제약회사 셀리제너의 간암 치료제 셀리큐어.
“그, 혹시······.”
류영준이 회사명을 물어보려던 때였다.
땡.
현관문의 벨이 울리면서 한 노인이 들어왔다. 옷을 잔뜩 껴입은, 창백한 얼굴의 신사였다.
“에취!”
노인이 작게 재채기를 했다.
찡!
“윽!”
관자놀이가 지끈거린다.
강렬한 통증에 류영준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위험!>
메시지가 눈앞에서 깜빡거렸다.
노인이 재채기하며 뱉은 침방울이 시각에 들어왔다.
어지럽다.
굉장한 강도의 빈혈 비슷한 감각과 함께 류영준의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눈을 감았다 떴더니 시야 전부가 폭설에 뒤덮인 것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하는 송지현의 목소리가 고물 라디오에서 나오는 잡음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백내장이 온 것처럼 눈앞이 그냥 하얗다.
치지직.
어디선가 종이 구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눈이 아프다.
그 가운데 천천히 까만 점 하나로 초점이 모여들었다.
마치 초정밀 현미경으로 보는 것처럼 이상한 상이다.
동그란 껍질에 수많은 수용체 돌기가 달려있는 공 같은 구조.
메시지가 떠올랐다.
“악!”
류영준이 양손으로 두 눈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송지현과 노인이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헉······. 헉······.”
머릿속에 피가 도는 기분이다. 세상이 이젠 똑바로 보인다.
“맙소사······.”
근데 지금 대체 뭘 본 거지? 독감 바이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