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역분화 줄기세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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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그 정도 기술이면 진짜 노벨상감이지.”
정혜림이 동의했다.
“우리 부서 업무랑 다른 내용이라 해도 그 정도의 엄청난 성과에 대해서 겨우 사내 세미나의 연구소장 나부랭이들이 트집 못 잡죠. 근데 실현 가능성이 없어요.”
박동현이 말했다. 정혜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세포는 한 번 분화하면 다시 거꾸로는 못 가요. 우리가 박사까지 해버려서 더 이상 학부생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과 같죠.”
고순열도 거들었다.
“옛날에는 RPG 게임도 스킬트리 찍어버리면 리셋 못했는데. 인체의 세포 시스템은 10억 년 정도 고인물이랄까. 그래서 안 될 것 같다는······.”
박동현이 다시 프레젠테이션으로 돌아갔다.
“아무튼, 우리는 인공 세포를 합성하는 쪽으로 초점을 모으고 있어요. 일단 이걸 더 봅시다. 지금 진행 상황들에 대해 말씀드리죠.”
류영준이 눈앞에서 깜빡이는 메시지 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동기화 모드 : 일반 세포를 배아줄기세포로 초기화시키는 방법을 통찰하시겠습니까? 피트니스 소모량 : 2.0>
로잘린은 그게 가능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이 기술이 확보되면 도대체 어떤 진보가 일어날까?
난자를 채취할 필요도 없고 정자를 채취할 필요도 없고 수정란을 만들 필요도 없다.
유전물질을 치환하는 초고난도의 마이크로 컨트롤도 필요없다.
이미 환자 본인의 세포니까 아무런 거부 반응도 없지 않겠는가.
아낙네들이 매일 냇가에서 빨랫감을 방망이로 두들기던 시절에서 갑자기 드럼세탁기의 시대로 훌쩍 도약하는 일이다.
딸칵.
류영준이 로잘린의 메시지창을 눌렀다.
“뭐하냐는?”
허공에 손가락질을 하는 류영준을 보고 고순열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 먼지가 있어서요.”
류영준이 대충 둘러댔다.
혹시나 해서 눌러봤는데 역시 소용없다.
<피트니스가 모자랍니다.>
현재 류영준이 가지고 있는 로잘린의 피트니스는 1.5. 이게 최댓값이다.
더 높이려면 로잘린의 레벨을 상승시켜야 한다.
“······.”
하지만 어떻게?
띠링!
고민에 잠겨있는데 알람음과 함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로잘린의 레벨을 높이려면 전이 상태나 동기화 상태를 개선하세요.>
<로잘린의 레벨이 높아지면 피트니스의 총량과 회복 속도가 증가합니다.>
옛날에 읽었던 메시지들이다.
이것도 이미 알고 있는 정보다. 문제는 전이 상태나 동기화 상태를 어떻게 개선하느냐인데.
류영준은 로잘린의 현재 전이 상태를 확인했다.
-전이 상태 : 심장 (2%), 간 (46%), 뇌 (7%), 신장 (13%), 척수 (4%)
이 값들은 류영준이 알코올에 중독되었던 폐인 시절, 로잘린이 그의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활동한 결과다.
허리디스크나 거북목, 지방간 따위의 온갖 잡병들을 죄다 교정했었다.
······.
‘확 청산가리 같은 걸 먹어봐?’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있는데, 발표를 진행하던 박동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장 최근에 테스트한 4.87은 세포막이 안정되지 않아서 결국 파괴되었어요.”
4.87!
류영준의 눈이 번득 뜨였다.
분명 로잘린을 처음 얻게 되었을 때, 실험실에서 반응중이던 인공 세포에 v4.87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그것은 아직 생물이라고 부를 수 없는 화학물질 덩어리였지만, 거기에 류영준의 혈액이 들어가는 순간 로잘린이 탄생했다.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더라?
‘내 혈액 세포들에서 발생한 ATP가 v4.87 내부로 들어갔다.’
어쩌면 ATP가 로잘린의 성장에 필요한 요소가 아닐까?
ATP는 에너지 수준이 매우 높은 화학 물질로, 인체의 모든 세포들에서 각종 대사를 할 때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에너지 연료다.
그리고 지금 류영준의 몸에 있는 로잘린은 적어도 ATP에 크게 반응했던 경력이 있다.
그럼 ATP를 넣어주면 전이 상태나 동기화가 높아지지 않을까?
“혹시 좋은 아이디어 있으신 분?”
박동현이 물었다.
그러나 정혜림과 고순열은 모두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박동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습니다. 여러분이 못해서 우리 프로젝트의 진척이 없는 게 아니에요. 이 프로젝트 자체가 너무 현실성 떨어지는 고난도의 업무라 그렇죠.”
“연말 보고까지 얼마나 남았죠?”
류영준이 물었다.
“이제 2주 남짓······.”
류영준은 잠깐 고민에 잠겼다.
나쁘지 않은 아이템이다.
배아줄기세포를 일반 세포로부터 만들어낼 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이런 걸 발표하면 과학계 내에서 류영준의 이름은 순식간에 스타덤에 오른다.
회사 내에서 그의 입지를 높이기에는 무엇보다 좋은 조건이다.
또 한 가지 장점은 그게 기반 기술이라는 것이다.
성공을 거둔다 해도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인공 장기 배양이나 조직, 신경 분화 같은 고난이도의 후속 연구가 요구된다.
그 무엇도 현대의 과학자들에겐 만만치 않은 작업들이다.
그 다음의 열쇠도 류영준의 손에 남게 되므로 주도권을 쥘 수 있다.
그리고 그걸 이용하면 로열티의 지분율에 대한 거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로열티 지분율은 임원들이나 주주들에게 나눠주지 않을 생각이다. 그들의 도움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텐데 왜 지분을 나눠주겠는가.
데이터 발표 후에 약간의 협잡이 필요할 텐데 충분히 할 수 있다. 이게 성공하면 갑을 관계가 바뀐다.
논문의 제 1 저자도, 특허의 제 1 발명자 및 최대 지분율을 모두 차지할 것이다.
류영준은 박동현과 정혜림, 고순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제가 그 기간 동안 줄기 세포의 역분화를 연구해보겠습니다.”
“그거 안 된다니까.”
박동현이 언짢은 티를 냈다.
“근데 신입이니까 맘대로 하라고 냅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고순열이 말했다. 박동현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차피 연말 보고 때문에 지금 어수선한 분위기라 새 업무를 지시할 상황도 아니고, 류 박사님도 적응하려면 시간 필요하니까. 2주만 하고 싶은 거 해보세요.”
“감사합니다.”
잠시 후 미팅이 끝났다.
연말 보고에서 써먹을 쓸 만한 아이디어는 아직 확보되지 않은 채다.
하지만 상관없다. 류영준은 직접 만들어낼 자신이 있었다.
류영준은 실험실로 돌아오자마자 ATP를 찾아 뒤졌다.
‘찾았다.’
그가 -20도 냉동실에서 액체로 된 조그만 시약병을 꺼냈다.
disodium 이하를 버리고 앞부분만 줄여서 ATP(Adenosine 5'-TriPhosphate)다.
류영준은 시약병에서 ATP를 1밀리리터 정도 뽑았다.
0.22 마이크로미터 필터에 걸러서 멸균시킨 다음, 실험실에서 5밀리리터 용량의 주사기에 넣었다.
알코올로 팔꿈치 안쪽을 소독한 다음 ATP를 정맥 주사했다.
‘내 몸을 임상 시험하는 날이 오다니.’
솔직히 미친 짓이다.
하지만 이 정도 용량이라면 건강한 사람의 인체에는 명백히 무해하다.
만약에 로잘린에게 어떤 약효가 없다고 하더라도, 류영준의 몸에도 별 악영향을 주지 않고 끝날 것이다.
‘한 번 지켜볼까······.’
류영준은 로잘린의 상태창을 열어놓고 가만히 주시했다.
띠링.
-로잘린이 ATP를 흡수했습니다.
······.
잠깐 시간이 지났지만 레벨이나 동기화 수준, 또는 전이 상태가 올라가진 않았다.
‘이게 아닌가?’
류영준이 아쉬워하며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려는 찰나였다.
-세포 피트니스가 일시적으로 증가합니다.
‘일시적?’
<로잘린 Lv. 1>
-전이 상태 : 심장 (2%), 간 (46%), 뇌 (7%), 신장 (13%), 척수 (4%)
-동기화 : 3%
-세포 피트니스 : 2.1 (+0.6 : ATP에 의해, 21시간)
-유전자 발현 조절 : CYP2E1 (38% 억제)
피트니스 항목에 (+0.6 : ATP에 의해, 21시간) 라는 값이 생겼다.
21시간 동안 0.6만큼 추가된다는 뜻인 듯하다.
아무튼 이제 피트니스 총량이 2를 넘긴 했다.
류영준은 재빨리 메시지창을 다시 열었다.
- 일반 세포를 배아줄기세포로 초기화시키는 방법 확인하기 (피트니스 2.0 소모)
딸칵.
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르자 해법이 나타났다.
-일반 세포의 몇 가지 유전자를 조작하면 배아줄기세포 상태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현재 당신이 쓸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로잘린은 다음 유전자 4세트를 추천합니다.
-SOX2, cMyc, OCT4, KTF4
-위 유전자 네 개를 세포 내에서 과발현 시키십시오.
‘어우······.’
신의 정답지를 엿본 기분이다.
2만 종류의 유전자들 중에서 저 네 개를 동시에 조작하면 일반 세포가 배아줄기세포로 초기화된다는 걸 도대체 누가 알아낼 수 있을까?
무작위로 유전자를 뽑아서 실험한다면, 이 지식은 로또 1등에 수억 번 당첨될 확률로 나오는 것이다.
로잘린이 당첨 번호를 죄다 알고 있다는 게 새삼 또 소름이 돋는다.
류영준은 메시지창을 닫으면서 곧장 사무실 컴퓨터 앞으로 달려왔다.
주소창에 를 검색하고 류영준의 아이디로 로그인했다.
유전자를 파는 곳이다.
인공 합성된 유전자를 1개 종류마다 따로 판다. 주문하면 마이크로그램 단위의 동결 건조된 유전자를 얻을 수 있고, 거기에 물을 타서 녹인 다음 실험에 쓰면 된다.
류영준은 네 종류의 유전자를 곧장 주문했다.
***
유전자는 이튿날 도착했지만 아직 실험은 좀 더 디테일을 잡아야 한다.
유전자를 어떤 세포에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집어넣을 것인가? 집어넣은 후에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관찰할 것인가?
원래대로라면 하나씩 조건을 잡아가며 스텝마다 최소 한 달씩 소모되었겠지만 류영준은 그럴 필요가 없다.
동기화 모드는 실험의 최적 조건도 잡아주었다. 피트니스를 꾸준히 소모해주면 다음과 같은 메시지들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인체배아신장 세포(HEK293)에 도입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인체배아신장 세포 특성 보기)
-레트로바이러스를 이용하여 도입하십시오. (바이러스 생산 방법 보기)
-3일 후 배아줄기세포와 같은 방식으로 배양하십시오. (배양 방법 보기)
류영준은 매일같이 피트니스를 소모해가면서 로잘린이 시키는 대로 실험을 진행했다.
인체배아신장 세포를 증식시키면서, 레트로 바이러스에 유전자를 담아 재생산했다.
며칠 동안 실험을 하는 데 정신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리고 금요일 오전.
류영준은 마침내 인체배아신장 세포를 바이러스로 감염시켰다.
이제 이 세포에서 류영준이 집어넣은 네 종의 유전자들, SOX2, cMyc, OCT4, KLF4 이 발현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제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이 세포가 수정란 상태로 초기화되면 성공이다.
‘그나저나 정말 간단하군.’
요리에 비교하자면 과학자들이 하는 일은 본래 미지의 식재료를 모아다가 새로운 요리법을 창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로잘린의 지시를 따라가는 것은 준비된 레시피와 재료로 조리만 하는 것과 같다.
난이도 차이는 정말이지 천지차이다.
류영준은 최종적으로 유전자가 조작된 인체배아신장 세포를 STO 특수 배양 접시위에 깔았다.
이 세포가 여기서 무럭무럭 자라면서 분화한다면, 이 세포는 ‘만들어진 배아줄기세포’라고 할 수 있다.
과연 가능할까?
배양 접시의 세포를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있는데 정혜림이 뒤에서 말을 걸었다.
“뭐하고 있어요?”
그녀가 류영준의 옆에 다가와서 배양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에요?”
“줄기 세포 후보입니다.”
“오우.”
“이 배양 접시에서 자라면 줄기 세포라고 할 수 있죠. 자세한 실험 과정들은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잘 됐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기대는 안 할게요.”
“점심시간인데 식사하러 안 가세요?”
“이제 갈 거예요.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얘기하려고 왔죠.”
“갑시다.”
정혜림을 따라가니 박동현과 고순열이 이미 외투까지 입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차피 구내식당 갈 건데 그렇게 외투까지 꽁꽁 싸매야 해요?”
류영준이 물었다.
“복도 추워요. 그리고 식권 받을 때 줄서서 꽤 기다려야 하니까 외투 입어요.”
정혜림이 말했다.
“요즘 독감 유행한다던데. 추우면 면역력 떨어지니까 조심합시다.”
박동현이 말했다.
“힉. 독감이요?”
정혜림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네. 비타민 챙겨 먹어요. 그리고 류 박사님. 우리 팀은 가급적이면 항상 밥 같이 먹어요.”
박동현이 말했다.
“그래요?”
“네. 전에 그랬잖아요? 꼴통들끼리 서로 친하게라도 지내야 한다고. 안 그럼 여기서 못 버텨요.”
정혜림과 고순열이 웃었다.
박동현이 계속 말했다.
“이번 주는 계속 류 박사님이 점심 때 자꾸 실험한다고 바빠서 같이 못했지만, 다음 주엔 식사 때 항상 같이 합시다.”
류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주중에 몇 번 같이 밥 먹자는 얘기들을 했었다.
하지만 류영준이 거절했다.
2주 안에 중대한 성과를 만들어내려면 실험 스케쥴을 빡빡하게 짜야 했던 것이다.
이제는 바쁜 게 다 끝났고 결과가 나오기를 느긋하게 기다리면 되지만, 며칠 동안은 김밥을 싸와서 점심을 대충 때웠었다.
왜 그렇게 밥 먹는 거 갖고 유난인가 싶었는데 이유는 곧 드러났다.
제 6 연구소는 일곱 개의 부서가 사용하고 있다.
업무 중에는 각자 부서끼리 일을 하니까 마주칠 일이 없지만 점심시간과 구내식당은 모두가 서로 공유한다.
삑!
식권을 받기 위해 사원증을 찍자 작은 모니터에 류영준의 프로필이 나타났다.
<생명창조 부서 주임연구원 류영준>
동시에 뒤에 줄 서있는 과학자들의 시선에서 묘한 따가움이 느껴진다.
“대체 왜 6 연구소에 있는 거야.”
뒤에서 누군가 수군댔다.
“연말 보고 때 연구소 성과가 떨어지잖아. 1 연구소는 김현택 소장이 항암신약 팀을 거의 직접 운영한다는데 우리는 저 부서를 가지고······. 에휴.”
“이번에도 아무 성과도 없겠지?”
“야, 상식적으로 쟤네가 무슨 성과가 있겠냐.”
“또 연말 세미나 분위기 엉망이겠네. 저 팀 발표하고 나면 항상 갑분싸잖아.”
“애초에 자기네 부서에서 갑분싸 만든 놈들만 모인 곳이니까 그렇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