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주임 연구원 류영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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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 한 달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 시간 대부분을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해보면 참이슬을 마신 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술을 못 먹는 편이었는데 회사에서 얻은 막대한 실망과 상심이 사람을 알코올 중독으로 만들어주었다.
한 달 중 27일 째까지 하루에 최소 세 병 이상을 마셨다. 아마 전부 합쳐보면 궤짝 단위로 몇 개는 나올 것이다.
28일 째부터 술을 끊은 것도 새 부서에 출근하기 위해 컨디션을 조절한 게 아니었다.
아침에 강력한 복통을 느끼고 병원을 찾았기 때문이다.
의사는 간염 진단을 내리면서 약을 주었고, 여기서 술을 더 마시면 간경화가 오고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인생 엿 같지만 자살할 정도는 아니지.’
무엇보다 그가 무너지면 부모님과 동생의 인생도 크게 틀어진다.
류영준은 그 시점부터 마음을 추슬렀다.
그리고 오늘은 옮긴 부서의 첫 출근 날이다.
생명창조 부서.
류영준이 옮긴 부서의 이름이다.
“안녕하세요. 항암신약 연구부서에서 온 류영준입니다.”
아침 일찍 류영준이 사무실 입구에 들어서며 인사했다.
하지만 사무실 안에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잠든 남자 한 명 뿐이다.
다리를 책상에 올려놓은 채 머리에 외투를 덮어서 형광등 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잠시 후, 류영준은 실험실로 이동했다.
깨끗하고 잘 정돈된 실험실이다.
거대한 원심 분리기와 냉동고들이 벽면을 메우고 있고 실험 테이블과 선반에는 온갖 시약과 플라스크, 파이펫 따위가 즐비하다.
공용 테이블에는 DNA를 전기 영동하는 키트와 젤닥이 있다.
‘있을 건 다 있군.’
류영준은 실험실을 쭉 둘러보며 안쪽으로 이동했다.
힛블록 (Heat block, 특정 온도로 조절 가능한, 구멍이 뚫린 금속)에서 1.5밀리리터 용량의 조그만 플라스틱 용기 하나가 반응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안에서 1밀리리터 정도의 붉은색 용액이 부글거리며 끓는 중이다.
삑! 삑! 삑!
갑자기 힛블록의 알람이 울렸다.
반응 시간이 다 되었다는 뜻이다.
“엇······.”
당황한 류영준은 저도 모르게 샘플을 힛블록에서 꺼내버렸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로잘린 v4.87>
샘플 용기에 메모가 쓰여 있다.
‘로잘린······.’
류영준이 옮긴 부서는 ‘생명창조’ 부서다.
생명 창조 부서에서 무슨 일을 하겠는가?
당연히 생명을 창조하는 일이다.
뭔 뜬구름 잡는 소린가 싶겠지만 실제로 그걸 연구하고 있다.
지방산과 뉴클레오티드, 몇 종의 전해질 같은 ‘화학 물질’들을 모아놓고 적절한 자극을 줘서 ‘살아있는’ 세포를 인공 합성한다.
이게 이 부서의 표면상의 목표다.
표면상의 목표라는 말의 뜻은, 생명창조 부서의 진짜 목표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류영준 같은 회사의 암적 존재들을 유배 보내는 것이다.
즉, 생명 창조라는 건 안 되는 일이라는 거다. 나올 수 없는 성과를 만들라고 채근하면서 갈구는 것은 회사를 나가라는 것과 다름 아니다.
“인공 세포라니······.”
정말 생명창조 부서에 왔다는 게 실감이 된다. 샘플을 들고 있는 손에 힘이 빠진다.
‘한 번 볼까?’
류영준은 샘플을 현미경 앞으로 가져가서 관찰해보았다.
초점을 조절해보니 동그란 세포 같은 것이 보였다.
스스스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없어지고 있었다.
“염이 부족한 것 같은데······.”
류영준은 10X PBS 용액을 10 마이크로리터만큼 넣어주었다.
세포의 사멸이 조금 덜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글렀구먼.’
샘플을 제거하려고 현미경 재물대로 손을 넣는 순간이었다.
“악!”
날카로운 감각이 손톱 아래를 스쳤다.
재물대 옆의 깨진 유리 파편에 손가락이 찢어진 것이다.
“크······.”
류영준은 피가 배어나오는 손가락 끝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 조심스럽게 샘플을 제거했다.
찢어진 손가락이 따끔거렸다.
“무슨 현미경에 유리 조각이 있어?”
류영준이 투덜거렸다.
“장비 제대로 관리 안 하네, 여기.”
그는 <로잘린 v4.87> 샘플을 다시 용기에 담고는 뚫어지게 관찰했다.
‘혹시 내 피가 여기 섞이거나 하진 않았겠지······?’
용액 색깔이 붉은 색이라서 구별도 안 된다.
류영준은 찢어진 손가락 끝의 상처를 관찰했다.
하얀 거품 같은 게 끼어 있었다.
류영준은 상처를 노려보다가 혀를 쯧 차고는 수돗물을 틀어서 손을 씻었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이젠 몇 명이 더 출근해 있었다.
“어? 신입 왔네.”
외투를 덮어쓰고 자던 남자가 류영준을 보고 반응했다.
“안녕하세요. 항암신약 연구부서에서 온 류영준 주임 연구원입니다.”
류영준이 인사하자 남자는 느릿느릿 일어나더니 류영준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선임 연구원 박동현이라고 합니다.”
선임 연구원이면 사무직의 과장에 해당하는 직급이다.
류영준이 그와 악수했다.
“반가워요.”
“잘 부탁드립니다.”
“여기 어떤 곳인지 알죠?”
“생명창조를 연구하는 부서요.”
“그게 아니지. 유배지잖아요. 우리 꼴통들끼리 서로 친하게라도 지내요. 안 그럼 여기서 못 버티니까.”
“······.”
“그래서, 류 박사는 여기 어떻게 오게 됐어요?”
“김현택 소장님한테 대들었습니다.”
“아, 황 소장한테 쌍욕 했다던 그 유명인사가 류 박사에요?”
박동현이 큭큭 웃었다.
“근데 그 사건, 나도 들어서 아는데, 그 정도면 회사에 환멸감 장난 아닐 텐데 왜 사직하지 않고?”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요.”
“결혼 했어요?”
“아뇨.”
“나도 와이프랑 애들 때문에 여기 억지로 버티고 있는데 보통 힘든 게 아니에요. 류 박사도 차라리 지금 회사 옮기는 게 나아요. 취업 될 때까지 잠깐 월급이 끊겨도 장기적으로 그게 낫거든.”
“그렇습니까?”
“중소도 월급 여기만큼 주는 곳 꽤 있어요. 에이젠은 성과급을 많이 준다는 게 메리트지만, 성과가 안 나오는 생명창조 부서에는 해당 사항 없고.”
류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동현이 말한 것은 사실이다.
성과 제로 때문에 수입이 줄고, 상부로부터 꾸준히 갈굼을 당하면 근로 의욕이 뚝뚝 떨어진다.
게다가 ‘생명창조 프로젝트 팀’이주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회사 내의 다른 직원들도 모두 비웃음, 또는 동정의 눈빛으로 쳐다본다.
그 모멸감을 오래 견뎌내는 과학자는 몇 없다.
“회사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 얘기해요. 괜찮으니까. 내가 여기 눌러앉아서 버티고 있는 동안 들어왔다가 사라진 사람이 한 열다섯 명 정도 될걸요?”
박동현이 쓰게 웃었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말했다.
“앗 참! 혹시 힛블럭에 샘플 봤어요?”
“아, 그거 제가 꺼내서 잠깐 봤습니다. 세포막이 계속 터지는 것 같아서 10X PBS를 조금 넣었습니다.”
“오우. 그런 센스가. 처음 하는 실험일 텐데. 대단한 과학자가 들어왔네.”
박동현이 감탄했다.
“하하······.”
“그리고 그런 인재인데도 수틀린다고 그냥 유배지로 보내버리는 것도 놀랍네요. 에이젠 개 같은 새끼들.”
“하지만 PBS를 넣어도 세포들은 결국 사멸했습니다.”
“그래요?”
“네.”
박동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실험 실패하는 거 하루 이틀인가. 애초에 상부도 여기서 이 프로젝트 성공할 거라고 기대도 안 하니까 괜찮아요.”
“그런가요?”
“성과 없다고 매주 뭐라고 하는데 맘속으로 노래 몇 곡 부르고 씹으면 돼요.”
“······.”
“뭐······. 곧 있을 연말 세미나는 좀 중요하긴 하지만······.”
박동현은 연말 전체 세미나를 상상하다가 혀를 쯧 찼다.
“에휴. 이번엔 또 어떻게 버티나.”
“······.”
박동현은 류영준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류 박사? 어디 안 좋아요?”
“예?”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어지러운데.
“류 박사? 지금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데. 식은땀 나는 것 같······.”
박동현의 말끝은 바람소리에 먹혀버렸다. 옆으로 넘어가는 류영준의 시야가 캄캄해지고 있었다.
쿠웅!
류영준은 그대로 쓰러져 의식을 잃어버렸다.
“어어, 류 박사!”
박동현이 놀라서 류영준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다.
“혜림 씨! 119 불러주세요!”
박동현의 옆자리를 쓰던 젊은 여자가 경악한 표정으로 119에 전화를 했다.
잠시 후.
박동현의 신고를 받고 구급대원들이 출동했다.
류영준은 곧바로 응급실로 옮겨졌다.
매우 특이한 상태였다.
그 어떤 질문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는 등 정신활동이 완전히 정지되어 있었다.
의식 수준이 4단계 정도라고 해도 반복적으로 질문하면 한 두 마디 단어로 된 대답을 하기도 한다.
이 정도로 의식이 마비된 상태는 5단계인 ‘혼수’ 상태 이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든 반사 반응은 정상이었다.
2단계의 경미한 기면 상태라고 하더라도 자극에 대해 반응이 느려지는 법인데 말이다.
류영준의 동공은 불빛을 비췄을 때 굉장히 빠르게 수축했고, 매우 약한 통증이나 큰 소리 같은 자극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
반사만 보면 솔직히 건강한 일반인 이상이었다. 이런 경우에 보통은 의식 불명이 ‘꾀병’이라고 진단되기 십상이다.
경찰서에서 조서 쓰던 범죄자들이 이런 식의 의미 없는 꾀병을 부리며 응급실까지 실려 오는 경우가 가끔 있기 때문이다.
응급실의 의사는 류영준의 팔을 휘둘러서 스스로의 뺨을 치게끔 유도했다.
아무리 손에 힘을 빼고 있다고 하더라도 의식이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충격량을 조절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류영준은 정말 세차게 자신의 뺨을 치고 말았다.
그리고는 자기가 만든 통증에 대해 반응하듯, 때리는 누군가에게 저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뒤틀고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몇 번 테스트를 반복해도 결과가 같았다. 철썩 소리가 나며 피부가 붉어질 정도로 강하게 두들기고는 그 통증에 반응하는 것이다.
의식은 정말로 없는 듯 보였다.
혼란에 빠진 의사들이 좀 더 정밀한 검사를 하려던 찰나에 류영준이 눈을 떴다.
“환자분? 정신이 드세요?”
젊은 의사가 류영준의 어깨를 흔들면서 물었다.
“······. 네······. 괜찮은 것 같습니다.”
류영준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움켜쥐고 고개를 들었다.
“혹시 특별한 지병이 있습니까?”
“4일 전에 간염 진단을 받았습니다.”
“간염.”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간염은 때때로 빈혈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내원하셔서 좀 더 자세한 검사를 받아봅시다.”
류영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의사가 류영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환자분?”
“······.”
류영준은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이게······?”
“네?”
“눈앞에 뭐가 떠있어요.”
반투명하고 네모난 연청색의 창이었다.
그 위에 문자가 쓰여 있었다.
<생명 창조는 신의 영역입니다.>
<당신은 인공 세포를 창조했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생명의 플레이어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