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197화(완결) (197/197)

196화.  < 46. 마지막 여정(6)/에필로그 >

결전의 시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프랑스 남부.

몽펠리에 요새 인근에 위치한 아비뇽(Avignon)에 심연의 악마들을 거느리는 마왕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접수되었다. 그들의 이동 경로에는 몽펠리에가 포함되는 상황. 곧바로 비상령이 떨어졌고, 만반의 준비를 다 한 병력이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전투를 위해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계속되는 긴장 상태에 사람들이 체력적으로 피곤함을 느낄 무렵, 마침내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뎅뎅뎅-

“비상, 비상!”

"적들이 나타났다!”

“모두 정신 차려!”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 같은 현상. 저것은 바로 심연의 악마들이 공간을 열고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었다. 이번에는 평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악마들과의 전투는 일상이 되었지만, 저 안에 마왕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였다.

결전을 앞두고, 강민혁이 사람들 앞에 나섰다.

“주목!”

수뇌부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코앞에 닥친 위험에 사람들의 표정은 잔뜩 굳었지만, 강민혁은 전혀 흔들림이 없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나는 이 사람들의 희망이다.’

인류의 구심점.

강민혁은 본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영웅이라 불리는 사람은, 절대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유일한 회망이다. 자신만 믿고 이번 결전을 준비한 사람들에게, 사소할 수도 있는 자신의 태도와 같은 모든 것들이 사기에 직결될 터.

강민혁은 허리를 꼿꼿이 폈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최초의 재앙이 발발하고 인류에게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한때는 평범한 사람의 죽음도 많은 사람의 위로를 받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죽음이라는 것이 흔해졌습니다. 어제만 해도 반갑게 인사하던 사람이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세상. 재앙은 그렇게 세상을 망쳤습니다. 가족을 잃어 폐인이 되어버린 가장, 몬스터의 공격으로 불구가 되어버린 병사, 혼란한 세상에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 우리는 블랙 캐슬의 장벽이 세워지며 무려 2000년간 재앙과의 공존을 택했지만, 이제는 그 위험한 선택의 종지부를 찍을 시기가 찾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강민혁의 시선이 사람들을 향했다.

마주치는 시선들.

아직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들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강민혁은 그들에게 힘을 주었다.

우리가 왜 싸워야 하는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일말의 두려움에 불을 질렀다.

그것은 곧 활활 타올라 전의(戰意)로 변할 것이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의 말처럼 인간은 나약하고 망각의 기질이 있으나, 막상 진정한 위험이 닥쳤을 때는 초인적인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왔던 것도 인간이라는 종족이다. 강민혁은 그러한 인간의 저력을 강하게 믿었고, 이번 결전이 인류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점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살아남으십시오. 쓰러지지 마십시오. 끝까지 저 악마들과 투쟁한다면, 제가 반드시 이 지긋지긋한 재앙을 종결시키겠습니다.”

“강민혁! 강민혁!”

“강민혁! 강민혁!”

사람들이 강민혁의 이름을 연호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그들의 목소리는 곧 몽펠리에의 요새를 가득 메웠다.

강민혁의 이름만을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엘리샤.

메리 그레이스.

클리스만.

영웅들의 이름도 차례로 호명되었다.

특히 클리스만의 이름을 연호할 때는, 클리스만은 이 상황이 부담스러운지 고개를 푹 숙였다.

‘...클리스만.’

그의 생각이 보였다.

아마도 본인이 영웅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클리스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웅이 아니었고, 사실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강민혁이 쌓아 올린 업적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의 환호를 받을 수 없는 사람. 그걸 알기에, 열광적인 환호에 그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세상에 닥친 재앙.

클리스만에겐 그 일부를 방관한 책임이 있다.

그러나, 강민혁은 그러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은 영웅이 필요할 때야.’

시선을 돌렸다.

성벽 너머를 바라보자, 코앞에 닥친 재앙이 점점 몽펠리에 요새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희망적인 분위기는 사라졌다.

불길이 작렬해 무너지는 성벽에, 불과 30분 전에 영웅의 이름을 부르짖던 병사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 안 돼!”

“막아!”

성벽 너머.

몬스터들이 거세게 밀려들고 있었다. 순식간에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그들의 모습에, 병사들은 악에 받쳐서 달려들었다. 악마의 불길이 작렬하면 한 줌의 잿더미가 되리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인류의 명운이 달린 상황에서 그들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번 전쟁의 패배는 종말을 의미한다. 가족들의 목숨이 달린 상황에, 성별과 나이 구분 없이 목숨을 걸었다.

“죽어!”

“끝까지 물러서지 마라!”

인간들의 반격에 몬스터들이 성벽에서 떨어져 나갔다.

성벽은 이미 수차례 작렬한 악마의 공격에 기능을 상실했지만, 인간들의 반격은 만만치 않았다.

들끓는 전의.

그 중심에는 바로 강민혁이 있었다.

H-7을 착용하고 하늘로 떠오른 강민혁은, 악마들에게 재앙을 선사하였다.

“파이어 퍼니쉬먼트(Fire Punishment).”

화염의 징벌.

세상이 불의 지옥으로 변했다.

땅이 폭발하며 용암이 분출되었고, 하늘에서는 화염의 비가 무수히도 많이 떨어졌다. 지상을 까마득하게 메운 수많은 몬스터들이 일순간 증발되었다. 9서클 마법의 위력은 신(神)의 영역이었고, 심연의 악마들조차도 화염의 징벌에 자유롭지 못했다. 비명을 지르며 소멸되는 악마들. 수백의 악마들이 일제히 몰려들었지만, 강민혁 하나로 인해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9서클 마법사.

강민혁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

심연의 악마들조차 압도할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보였으나, 강민혁은 상황이 희망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작 마왕은 나서지 않고 있어.’

저 멀리.

마왕의 모습이 보였다.

심연의 악마들에게 공격을 지시한 그것은, 강민혁의 마나가 떨어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왕이 나타난 모든 전투에서, 마왕은 항상 가장 먼저 인간들에게 재앙을 선사하는 역할이었다. 그랬던 마왕이 강민혁을 상대로는 자리를 지켰다. 심연의 악마들로 소모전을 유도한 뒤에, 체력이 떨어진 강민혁을 처리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

심연의 악마들은 초월적인 존재다.

강민혁이 나서지 않는다면, 요새의 병력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딜레마.

상황이 악화되었다.

강민혁의 마법에 몬스터들과 악마는 빠르게 줄었지만, 정작 진정한 위험은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였다.

“강민혁.”

“...클리스만?”

클리스만.

그가 성벽으로 다가갔다.

성벽 밖에 지옥이 펼쳐진 모습을 바라보더니, 그의 시선이 강민혁을 향했다.

“소모전으로 진행되면 우리가 불리하다. 지금부터 길을 열 테니, 너는 마왕을 상대하는 것만 생각해.”

“저 길을 열겠다고?”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만 되는 일이다.”

이미 결심을 내린 표정이었다.

그것은 클리스만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우리도 클리스만의 의견과 같아요.”

“나머지는 저희가 맡을게요.”

엘리샤.

메리 그레이스.

그리고 세상을 대표하는 수많은 강자들.

그들이 기꺼이 사지로 들어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성벽 안에서 움츠리고 있으면, 인간은 언제고 악마들에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아직 힘이 있을 때. 그들은 성문을 열고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클리스만이었다.

클리스만이 말했다.

"너라면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겠지. 나는 복수에 눈이 멀어 세상에 많은 죄를 지었다. 목숨을 걸고 길을 여는 이 선택이, 내 죄를 씻어내는 길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니 나를 위해서라도, 아니 인류를 위해서라도 옳은 선택을 내려라. 나는 강민혁이라는 사람을 믿는다.”

클리스만이라는 촛불은 거의 타들어 가고 있었다.

생명이 사그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그의 열망에 강민혁은 하늘을 보았다.

알고 있었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그러나 본인의 입으로는 선택을 강요할 수 없었다.

나의 목숨이 아닌, 타인의 목숨이기에.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이 필요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결정권을 부여한 지금.

“알겠다. 너희들의 희생을 잊지 않으마.”

강민혁은 망설이지 않았다.

결전.

이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할 순간은, 시체로 쌓아 올린 산에 올라선 강민혁이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이다.

끼이이익.

쿠웅!

성문이 열렸다.

이제껏 수성에만 전념하던 병력들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적들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공격!”

“공겨어어억!”

"와아아아아아!”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인간과 몬스터가 뒤엉키며 피와 죽음이 난무했다. 호기롭게 달려들었던 인간은 몬스터의 공격에 사지가 찢겨나갔고, 죽음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도 인간은 끝까지 몬스터의 사지에 무기를 쑤셔 박았다. 아무리 강력한 몬스터라 할지라도 인간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다. 생과 사의 경계선을 초월한 인간의 반격은, 검은 물결로 득실거리던 땅에서 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나를 따르라!”

바로 클리스만이 있었다.

클리스만은 가장 앞에서 달려갔다.

검은 물결이 들이닥치는 상황에 겁을 먹을 만도 하건만, 클리스만의 표정은 광기와 희열로 차올랐다.

클리스만은 항상 악마들을 도륙하는 꿈을 꾸었었다. 현실의 클리스만에게는 힘이 없었지만, 꿈에서의 클리스만은 무쌍(無雙)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힘을 갖추었다. 강민혁과의 만남으로 검술을 배웠고, 심연의 공간에서 단련되었던 신체는 그에게 무한한 힘을 부여했다.

서걱!

푸화하학!

클리스만의 공격에 몬스터들의 사지가 단번에 잘려나갔다.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죽어 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클리스만은 악에 받친 괴물처럼, 마주하는 족족 몬스터들의 사지를 베어버렸다.

피가 튀었다.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몬스터들의 물컹한 살이 밟히고, 역겨움이 목구멍을 자극할 때마다, 클리스만은 오히려 더욱 날뛰었다.

‘개방.’

단전을 열었다.

심연의 악마.

그들을 상대해야만 한다.

하늘로 뛰어오른 클리스만은, 생명력을 대가로 일으킨 오라로 그대로 심연의 악마를 베어버렸다.

서걱-

악마의 몸이 잘려나갔다. 예전에는 악마를 상대할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수호문의 힘을 얻은 클리스만에게는 이제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클리스만은 어느새 병력과의 거리가 제법 멀어졌다. 홀로 악마들 사이에서 날뛰는 상황인데도, 한 치의 두려움도 없이 그들을 베어버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죽이고 또 죽이고.

생명이 빠르게 타들어 갔다.

바람에 흩날리는 촛불처럼.

클리스만의 생명은 언제 사그라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난,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해왔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빙의의 대가는 자신의 죽음.

클리스만은 마지막 사죄로 가치 있게 죽고 싶었다.

아니, 그런 잘 포장된 말이 아니더라도, 가족을 죽인 이 개새끼들을 하나라도 더 데려가고 싶었다.

클리스만의 전투는 격렬했다.

학살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그를 악귀(惡鬼)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달랐다.

영웅의 뒷모습.

가장 앞에서 목숨을 거는 클리스만의 활약에, 뒤따르던 사람들은 울컥하는 감정에 목소리를 높였다.

“클리스만을 따르라!”

“우리의 영웅이 위험하다!”

클리스만과 사람들.

그들이 길을 열었다.

클리스만의 몸에 상처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악마들은 마치 겁에 질린 것처럼 길을 열 수밖에 없었다.

상처 하나에 열 걸음.

고통은 이제 느껴지지도 않는 상황에, 클리스만은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0년 만에, 나는 드디어 제대로 된 삶을 사는구나.’

가족을 잃었던 그때.

한 가장의 삶은 모든 것이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초침에, 클리스만은 희열과 광기가 차오른 얼굴로 악마를 베었다.

서걱!

그가 웃었다.

지금 이 순간.

클리스만은, 괴물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길이 열렸다.

강민혁은 하늘을 날아서 마왕에게 다가갔고, 마왕은 강민혁의 모습에 강한 적의를 표출하였다.

그때부터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쾅!

콰콰콰쾅!

엄청난 충격이 일었다.

서로의 힘이 부딪치는 순간,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힘의 여파에 사람들이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강민혁의 마법.

마왕의 불길.

둘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강민혁은, 마왕을 상대로 전력을 다했다.

‘개방.’

‘정령 빙의.’

단전이 열렸다.

강민혁의 부름에, 카산드라가 힘을 보탰다.

화륵.

화르르르르르륵.

강민혁의 전신이 불길로 타올랐다. 홍염의 마법이 극성으로 사용되었고, 9서클의 마법은 마왕이라 할지라도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충격을 선사했다. 어쩌면 마왕도 이 승부의 끝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항상 인간을 상대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표출했던 존재가, 처음으로 뒤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하늘의 경지에 도달한 9서클의 마법은, 마왕으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힘이었다.

‘반드시 이긴다.’

영웅.

사실,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영웅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형성된 평판 같은 것이었고, 강민혁은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행할 뿐이었다.

클리스만.

우연히 한 인간을 알게 되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일지언정, 강민혁에게만큼은 특별했다.

그렇기에.

그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해주고 싶었다.

클리스만이 눈을 감았을 때, 적어도 그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어있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화악-

강민혁의 마나가 강하게 반응했다.

단전의 마나.

서클의 마나.

두 힘이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그리고 심연의 마나로 등급 외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마왕조차도 이번만큼은 감당해내지 못했다.

“폭발.”

콰앙!

화콰콰콰콰쾅!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마법.

그것이, 심연의 왕을 무너트렸다.

천지가 진동할 정도로 강하게 일어나는 충격에, 인류를 재앙에 빠트렸던 마왕이라는 존재가 쓰러졌다.

“이, 이겼다!”

“강민혁님이 마왕을 쓰러트렸어!”

“와아아아아!”

사람들이 열광했다.

그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마침내 지긋지긋한 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는 사실에, 그들은 강민혁의 이름을 연호하며 몬스터들을 밀어붙였다.

‘클리스만.........!’

강민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클리스만을 찾았다.

재앙의 중심인 마왕을 쓰러트린 지금, 그것을 그 누구보다도 바랐을 클리스만과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원하던 목표는 이루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의지를 불태우는 연료로써 소진되었던 클리스만은, 전투가 끝나고 한참 뒤에서야 시체 더미에서 발견되었다. 끝까지 싸우다가 악마와 뒤엉킨 채로 죽음을 맞이한 클리스만. 그가 어떠한 최후를 맞이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체의 표정은 너무나도 평온한 상태였다.

그렇게 전투는 끝났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인류를 위협하던 재앙은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에필로그

인류의 명운이 걸린 마지막 결전에서 인간은 승리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절망에 빠트렸던 재앙이 단시간에 정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부터 프랑스까지.

너무나도 넓은 땅이 폐허가 되어버렸고, 남은 악마들을 처리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로부터 5년 후.

고통의 시간이 지나 마지막 악마를 처리하고서야, 인간은 드디어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했다.

“세상에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순간을 맞이하게 해준 영웅들의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강민혁, 엘리샤,

메리 그레이스, 클리스만... 그리고 수많은 이름 없는 영웅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평화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는 재앙이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가슴에 새깁시다.”

재앙은 끝났다.

하지만, 한동안은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00년 만에 찾아온 평화는 너무나도 낯선 것이었고, 사람들에게는 현실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평화에 적응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평화의 시대를 만끽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재앙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항상, 재앙의 순간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호문의 문주이자 전쟁 영웅이신 엘리샤님은, 재앙을 종결시켰다고 평가받는 강민혁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TV 프로그램.

재앙의 순간을 다시 상기시키자는 취지로 ‘영웅 특집’으로 마련된 방송에, 엘리샤가 오랜만에 얼굴을 비추었다. 전쟁이 끝나고. 엘리샤는 수호문의 문주로서 상당한 명성을 떨쳤다. 전장에서 보여준 그녀의 활약에 입문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수호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제는 거물이라고 평가받는 위치에 올랐지만, 엘리샤는 항상 전쟁 영웅을 주제로 진행되는 방송에 출연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악마와의 전쟁은 강민혁의 결단이 없었다면 절대 승리하지 못했을 겁니다. 현재 이 세상의 토대가 되는 마법 지식은 모두 강민혁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강민혁은 일개 개인이 강력한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는데도, 그것을 포기하고 인류를 위한 선택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클리스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가 멸망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우리는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아쉽습니다. 강민혁이 대외적인 활동을 많이 하길 바랐는데, 그의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렇긴 하죠. 벨라루스는 강민혁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움직임까지 보였으나, 강민혁님이 거절하는 바람에 무산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었죠.”

강민혁.

그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은 아직 식지 않았다.

그러나, 강민혁은 사람들의 기대처럼 자주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엘리샤의 아쉬움.

그것에는 비밀이 있었다.

세상을 구한 강민혁이라는 영웅이, 실제로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강민혁에게 보란 듯이 TV를 통해 엘리샤가 불만을 나타냈지만, 그렇다고 반응할 강민혁이 아니었다.

강민혁이 마법 문명에 나타날 때는 딱 두 가지의 이유밖에 없었다.

자신이 설립한 학교의 교육 과정을 점검할 때.

그리고 클리스만의 기일(忌日)일 때.

마침, 클리스만의 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재앙이 끝나고.

전쟁의 피해를 수습한 강민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새로운 교육 기관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강민혁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재앙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최초의 재앙이 예기치도 못하게 인류를 절망에 빠트렸던 것처럼, 우리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앙을 항상 대비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얻었던 깨달음을 여러분들에게 모두 나누어드릴 생각입니다. 나이와 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고, 배움을 희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강해지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클리스만 아카데미.

그것의 시작이었다.

마법 문명이야 그렇다 쳐도, 강화 문명에서는 처음에 클리스만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예전에 제가 한 존재를 언급했었던 적이 있었죠. 인류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한 영웅이 있었다고.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클리스만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그 누구라 할지라도, 영웅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강민혁의 발언은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클리스만이 누구인지 알아보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마법 문명의 인물을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강민혁의 말이 거짓일 리는 없으니, 사람들은 클리스만을 영웅의 동의어처럼 불렀다. 한때 학부모들 사이에서, 클리스만과 같이 자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클리스만의 기일이 되었다.

마법 문명에도 똑같이 ‘클리스만 아카데미’가 있었고, 강민혁은 차원을 넘어 마법 문명을 방문했다.

강민혁을 보고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강화 문명에서야 아카데미만 찾아가면 매일 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한 얼굴이지만, 마법 문명에서는 강민혁을 보기 위해서 먼 걸음을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강민혁은 클리스만의 기일을 기념해서 특별 강의를 개설하였고, 수천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참석한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 뒤로는 많은 기자가 보였다.

이것은 공개 수업이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한 학생이 질문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클리스만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시피 전장에서 목숨을 바친 영웅입니다. 그런데, 한때 클리스만과 같이 아카데미를 다녔던 사람들의 주장은 조금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학생의 질문은 당돌했다.

학생은 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한 가지 소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었다.

클리스만의 거품설.

아카데미를 다닐 당시에 클리스만이 영웅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는 소문에서부터 비롯된 유언비어(流言蜚語).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이다. 몇몇 사람은 클리스만 아카데미라는 이름에 불만을 나타냈다. 강민혁의 활약이야 인정하지만, 클리스만은 별 게 아니라고 말했다.

강민혁은 질문한 학생을 바라보았다.

클리스만의 진실.

사실, 그는 영웅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무너질 당시, 클리스만(강민혁)은 엄청난 활약으로 영웅의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진실은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의 계획에 동조하여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무너지는 것을 주도하였다. 과연 그는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때 죽어간 학생들의 학부모에게 이러한 진실을 밝힌다면, 클리스만이 아무리 세상을 위해 죽었다고 한들 악행을 저질렀다는 비난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강민혁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유언비어에 불과합니다. 클리스만은 그 누구보다도 영웅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저도 존재하지 않았겠지요. 저는 클리스만의 가르침을 통해 검사로서 강해질 수 있었고.........."

강민혁은 클리스만의 이야기를 각색했다.

절망적이고 처절했던 평범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영웅의 일대기처럼 부풀려서 말했다.

클리스만은 죽었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은 살아있을 때보다 죽었을 때 더 빛나는 경우가 있다.

영웅의 죽음은 그러한 경우에 속했고, 강민혁은 클리스만이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기억되길 바랐다.

‘사람들은 클리스만의 좋은 면만 기억하면 돼. 그가 어떤 시련을 겪었고, 어떻게 방황했으며, 그가 죽어가던 순간을 모두 알고 있을 필요성은 없어. 클리스만이라는 이름에 새로운 희망을 얻은 사람들. 그들을 위해서라도 클리스만은 영웅으로 남아야 해.’

어쩌면.

강민혁의 생각은 모두 핑계일지도 모른다.

클리스만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강민혁은 그의 마지막을 더럽히고 싶진 않았다.

‘평화로운 시대에, 영웅들의 진실은 필요하지 않아.’

“우리 모두 영웅의 죽음을 기립시다.”

재앙은 끝났다.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지속하리란 보장은 없다.

만약 또 다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클리스만이라는 이름이 남긴 작은 희망은, 분명히 인류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리고 평화가 지속되고 그의 이름이 잊혀진다 할지라도, 강민혁은 그와 함께했던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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