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 46. 마지막 여정(5) >
제물.
의식에 바쳐지는 가축에게나 사용되는 단어.
클리스만은 자신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의 제안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었다.
“빙의의 그릇으로 사용되는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수명이 갉아 먹힌다. 차원의 압력을 버텨내지 못하는 영혼을 대신해서, 내가 그 리스크를 모두 감당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때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나는 선택을 번복할 생각은 없다. 내 가족을 죽인 악마의 몰살. 그들을 모조리 이 세상에서 없애버릴 수만 있다면, 이따위 몸뚱이의 처분은 어찌 되어도 상관이 없거든.”
강민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담담하게 본인의 희생을 말하는 클리스만의 모습에, 덕분에 수혜를 보았던 강민혁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클리스만이 피식, 웃었다.
심각한 강민혁의 표정.
재밌었다.
자신을 이리 생각해준다는 사실만으로,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를 돌아설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최초의 재앙이 왜 발발했는지 아나?”
“왜라니. 설마 발발한 이유가 따로 있다는 말을 하려는 거야?”
“그래. 나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최초의 재앙은 인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바로 알렉산드로 도브첸코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 사실 그들 조직은 과학 문명이 발달한 시대부터 ‘마법의 존재’를 알고 마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현재 마법 문명의 토대가 되는 것들은 이미 그때부터 체계를 갖추고 있었지만,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세상에 그러한 사실을 밝히지 않았지. 그러다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당시에는 미지의 영역이었던 차원 이동 마법을 실험하던 도중에, 차원의 폭발이 일어나면서 그 여파로 차원의 균열이 생겨버린 것이지.”
".........!"
차원의 균열.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차원의 폭발은 인간에 의해 발생한 것이었고, 심연 너머의 악마들은 그때부터 인간 세계를 공격했다.
재앙의 시작점.
한 인간의 실수가, 이 세상을 무너트렸다.
‘카산드라가 했던 말의 의미가 이런 것이었어.’
[우리는 재앙의 시작점이었던 인간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재앙은 시작되지도 않았을 테니까.]
카산드라는 시작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령들은, 정령계를 위험에 빠트린 인간을 증오하고 공격한 것이다.
상식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충격적인 진실에 강민혁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메리 그레이스가 했던 말. 최초의 재앙을 막을 수 있었다는 건 무슨 의미지?”
“그건 간단한 문제야. 만약 최초의 재앙에 알렉산드르 도브첸코가 본인의 실수를 밝히고 모든 것을 공개했다면, 인간들은 아직 성장하지 못한 심연의 악마를 모두 처리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그러지 않았다. 겁이 났던 거지. 한 인간의 실수로 이러한 재앙이 닥쳤다는 것을 말할 수 없었고, 그는 그렇게 차일피일 시간을 미루며 어떻게든 본인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그 과정에서 너무도 많은 사람이 죽었지. 그때는 진실을 밝히기엔 늦었고,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본인이 재앙을 완벽하게 해결하길 바랐다.”
9서클을 향한 광기.
그것은 죄책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재앙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9서클을 향한 열망에 광기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점점 잊어갔다.
본인이 망각의 동물이라고 비난한 다른 인간들처럼, 최초의 재앙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멍청한 인간들의 태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자기 암시.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라는 괴물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그는 강민혁의 몸을 차지해서 9서클에 오른다면, 본인이 세상을 구원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진실.
그간 이해가 되지 않았던 퍼즐이 맞추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클리스만이 계획의 전말을 밝혔다.
“너에게 부여한 상황은 모두 ‘강민혁’이라는 인간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마법적인 기반을 닦고서 영웅의 몸을 차지한다면,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자신의 죄책감이 모두 씻겨나갈 것이라고 믿었지. 그리고 사실, 아카데미의 사건 때 나는 원래 죽었어야 할 목숨이었다. 내 가치는 이미 다한 상태라서, 네게 검술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폐기 처분이 되었겠지. 그러나 나는 살았다. 끝까지 몬스터와 싸우겠다고 구걸해서 살아갈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나는 나를 비롯한 세상에 기회를 부여한 너야말로 세상에 어울리는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메리 그레이스와 힘을 합쳤다. 이 계획의 마지막 퍼즐은, 알렉산드르 도브첸코가 아니라 바로 너다.”
설명은 끝났다.
길고 길었던 이야기.
강민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진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 클리스만에게 검술을 가르쳤을 때.
엄청난 마법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도, 클리스만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열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때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힘이 있는 사람의 태도라기에는, 의문이 많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해가 되었다.
클리스만으로서는 난생처음으로 힘이 생겼던 것이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의 꼭두각시로서 메신저의 역할을 맡았던 클리스만이, 직접 몬스터를 처리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래서 클리스만은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강민혁에게 제대로 가르쳐달라고 간절하게 매달렸고, 강민혁이 떠나간 사이에 악에 받쳐서 검술 훈련에 매진했다.
덕분에 그는 빠르게 강해졌다.
심연의 공간에서 강해진 육체.
그것은 성장에 불을 붙였다.
더불어 마법으로 잠시 감추었던 ‘본래의 육체’가 살아나며, 클리스만은 빠르게 나이를 먹었다.
모든 의문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연이란 없었다.
그렇다면.
‘빙의의 그릇으로 사용되었다는 것. 클리스만에게 이제, 살아갈 생명은 얼마 남아 있지 않겠지.’
예상대로였다.
클리스만이 말했다.
“나는 곧 죽을 목숨이다. 반복된 빙의로 인해서 내 생명은 거의 타들어 간 상태지. 너를 원망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죽기 전에 악마를 하나라도 더 죽이고 싶다. 나는 먼발치에서 너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서 악마와 싸우다 죽기를 바란다.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다. 사실은 별 볼 일 없는 하찮은 인간의 부탁이지만, 이 소원을 들어주기를 바란다.”
그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한때는.
클리스만이 정말 대단한 영웅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다.
인류의 멸망을 막아내기 위해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영웅.
그러나 진실은 달랐다.
자신이 상상했던 숭고한 영웅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클리스만은 복수에 인생이 잠식당해버린 괴물이었고, 알렉산드르 도브첸코 라는 원흉의 꼭두각시였다. 그렇게 평생을 이용만 당하다 살았다. 마지막에는 본인의 선택을 내렸지만, 2000년이라는 그의 삶은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다.
처절하고 비참하고.
만약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무릎을 꿇으라고 말한다면, 당장 무릎을 꿇을 자존심도 없는 사람.
그게 바로 클리스만이다.
클리스만은,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었다.
‘...클리스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러나 억지로 삼켰다.
강민혁은 클리스만의 삶을 완전히 공감하지 못한다.
지금은 어쭙잖은 말로 그의 인생을 위로해주기보다는, 그가 원하는 말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대단한 사람.
아무런 힘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기에, 그의 선택은 존경받아 마땅했다.
“원하는 대로 해주지. 너는 나와 같이, 전장의 최전방에서 싸우게 될 거야.”
약속.
같이 사지로 들어가자는 말에, 그제야 긴장하던 클리스만의 얼굴에 활짝 웃음이 피었다.
"고맙다.”
주름진 그의 얼굴.
그가 살아온 세월에, 강민혁은 고개를 돌렸다.
몽펠리에의 요새.
그곳의 수뇌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강민혁이 긴급회의를 소집하자, 수뇌부들은 하던 일을 모두 중단하고 강민혁의 명령을 따랐다.
인류의 영웅.
강민혁의 발언은 그만한 힘이 있었다.
“지금부터 제가 생각한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벽 너머.
그곳은 이제 지옥이 되었다.
그렇다고 성벽 안에서 농성만 벌이다가는, 이 세상 전부가 지옥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우리는 만반의 준비 끝에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심연의 악마를 쓰러트리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모스크바에 깃발을 꽂을 때만 하더라도 상황은 희망적이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마왕(魔王)의 존재.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온 심연의 왕이 주력 병력을 한 번에 쓸어버리면서부터, 인류는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렇다면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이 마왕을 쓰러트려야만 합니다.”
“...그걸 우리도 몰라서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마왕은, 인간의 힘으로 상대할 수 없습니다.”
한 수뇌부.
한때는 한 나라를 대표하던 마법사가 말했다.
그는 보았다.
마왕이 등장하면서 학살을 당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 또한 7서클의 마법사지만, 무력하게 구경만 했던 당시의 상황에 상상만으로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니요. 이길 수 있습니다.”
“대체 어떻게 말입니까?”
“본론을 말하기에 앞서, 먼저 소개시켜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회의실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인물이 들어섰다.
“...클리스만?”
“클리스만이 어떻게 여기를?”
“저 사람은 블랙캣의 리더인 마녀 메리 그레이스야! 분명히 소문에 의하면 악마에게 죽었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당황했다.
클리스만과 메리 그레이스.
둘의 이름은 파급력이 대단했다.
한 시대를 호령한 실력자들의 등장에, 절망에 빠져있던 사람들의 표정에 조금은 희망이 생겨났다.
그러나 부족했다.
이 정도로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면 인류는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클리스만과 메리 그레이스가 검과 마법이라는 분야에서는 각각 최고라고 불렸다지만, 마왕과 싸우던 당시에 그에 버금가는 수많은 실력자들이 있었지 않았던가. 그들 모두가 죽어 나갔다. 마왕의 힘을 직접 목격한다면,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다는 말을 쉽게 입에 올리지 못할 것이다.
강민혁이 말했다.
“여러분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왕을 상대하는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러분이나 클리스만, 메리 그레이스는 심연의 악마를 상대하는 역할을 맡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왕이 나타난다면, 그 괴물은 제가 쓰러트리겠습니다.”
“강민혁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8서클 마법 정도로는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제가 나서겠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헉. 서, 설마?!”
수뇌부의 표정이 경악으로 번졌다.
강민혁이 한 말의 의미.
8서클 마법으로도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쓰러트리겠다고 자신하는 것은, 단 하나의 경지를 말한다.
9서클.
수뇌부들의 시선이 강민혁에게 집중되었다.
"예, 저는 9서클의 경지에 올라섰습니다.”
회의장이 발칵 뒤집혔다.
9서클은 상상 속의 경지.
그것을 실제로 이루었다는 말에, 그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9서클 마법을 직접 보고 싶었다. 9서클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확인해야만, 마왕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걸 수 있다. 강민혁에게 모든 것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 상황. 수뇌부들의 조심스러운 부탁에 자리를 옮겼고, 강민혁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9서클 마법을 사용하였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가 남긴 힘.’
마법의 시초.
그는 9서클에 오를 역사적인 날을 위해, 9개의 서클로만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 마법을 만들었다. 알렉산드로 도브첸코가 어떤 인간 인지를 떠나, 학자로서의 그의 역량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의 위력은.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천지가 뒤집혔다.
인간의 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위력에, 수뇌부들은 그제야 9서클 마법임을 인정했다.
그것으로 결정되었다.
“마왕이 발견되는 그 날. 우리는 마지막 결전을 치를 것입니다.”
마지막 결전.
인류가 멸망하든, 아니면 악마를 몰살시키는 시작점이 되든.
강민혁과 마왕의 싸움이, 이 지긋지긋한 여정의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