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195화 (195/197)

194화.  < 46. 마지막 여정(4) >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현실을 부정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 대체 어떻게 네가 9서클에..!”

9서클.

미지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3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

하늘의 선택을 받은 재능과 9번째 서클을 형성할 수 있는 마나, 마지막으로 마법사로서의 깨달음.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2000년간 제자리 걸음을 걷는 상황에, 본인에게 전자의 조건이 결여되어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강민혁의 재능을 탐냈다. 이미 충분한 마나와 깨달음마저 얻은 자신의 능력이라면, 강민혁의 육체를 차지하는 순간 미지의 경지에 오르리라고 강하게 믿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틀렸다.

애초에 명확한 조건이라는 것은 없었다.

오랜 세월 살아가며 마법에 대한 열정은 광기가 되었고, 그는 단순한 진리를 잊고 말았다.

‘9서클이라.’

강민혁이 눈을 떴다.

예전처럼 날카로운 기운도, 그렇다고 대단한 힘도 드러나지 않는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9서클의 경지.

강민혁은 자신이 9번째 서클을 형성하는 과정을 똑똑히 보았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의 방법에 따라 ‘심연의 마나’를 온전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되자, 서클의 마나와 단전의 마나가 서로 완전히 연결되었다. 그러자 전신으로 심연의 마나가 퍼져나갔다. 서클과 단전의 연결은 육체를 마나에 완벽하게 적합한 상태로 만들었고, 그로 인해 9서클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단순한 과정이었다.

심연의 마나를 충분히 흡수한 강민혁은, 단 한 번의 기연으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섰다.

“이건 말이 안 돼. 대체 어째서 네가 9서클의 경지에 오른 거지? 나는 네가 경험한 그 순간을 위해서 평생의 삶을 바쳤다. 무려 2000년의 세월 동안 마법을 연마했는데, 어째서 네가 그런 영광을 누리는 거냐고! 대체 왜!”

알렉산드르 도브첸코가 발악했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처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방금까지는 절대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가, 인간의 초라함을 드러냈다.

“글쎄. 내가 정답을 알지는 못하지만, 어쩌면 네가 본인의 한계를 정했기 때문에 2000년 동안 아무런 진전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너는 9서클에 오르지 못한 이유를 재능의 부족으로 여기고, 더욱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능력을 탐냈지. 조금만 더 나아갔다면 결승선에 도달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멍청하게도 앞을 보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무르는 선택을 내린 거지.”

알렉산드르 도브첸코.

그는 이미 9서클의 키를 쥐고 있었다.

만약에 그가 조금만 더 생산적인 방법을 택했더라면, 인류는 9서클 마법사의 탄생을 목격했을 것이다.

200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제자리에 머무른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본인의 재능이 아니라 정신력이 문제였음을 알지 못했다.

강민혁이 말했다.

“네 말처럼, 나도 네 계획에 완전히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는 눈앞에 닥친 위험을 직시하지 못했고,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네가 택한 방법은 틀렸다. 네 선택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면, 네가 대체 심연의 악마와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나?”

같은 상황.

다른 선택.

인류가 뭉쳐지지 않는 상황에서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재앙을 주도하는 것을 택했고, 강민혁은 자신의 모든 것을 공개했다.

그 차이였다.

전자의 선택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면, 후자의 선택은 인류가 희망을 찾았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같잖은 욕심을 버렸더라면, 인류에 닥친 재앙은 생각보다 일찍 해결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투는 끝났다.

강민혁과 알렉산드르 도브첸코 모두, 9서클에 오르는 순간 결투의 의미가 상실했음을 알았다.

지금부터는 심판의 시간이다.

강민혁이, 마나를 끌어올렸다.

“네 죄의 대가를 치러라.”

번뜩.

새하얗게 물드는 하늘.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그 위로, 한 줄기의 벼락이 떨어졌다.

“라이트닝 퍼니쉬먼트(Lightning Punishment)."

9서클 마법.

궁극의 마법이 지상의 모든 것을 소멸시켰다.

콰르르릉.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한 인간.

징벌의 벼락에, 한 시대를 이끌었던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라는 사람이 사라졌다.

허무한 순간이었다.

강민혁은 새카맣게 타버린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의 흔적을 바라보며, 인생의 덧없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악착같이 살았던 걸까.’

2000년.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9서클의 경지 하나만을 바라보며 앞으로 달려갔다.

만약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면 과연 행복했을까?

강민혁은 그러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9서클이라는 꿈은 광기가 되었고,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목적을 위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키를 발견하지 못했다. 애초에 9서클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그는 광기에 눈이 멀어서 진실을 외면했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죽었다.

그러나, 강민혁으로서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인류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한 인간의 광기가 아니라 세상을 위협하고 있는 심연의 악마다.

그때였다.

공간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상태.

주변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알렉산드르가 죽다니.”

여성의 음성.

상대가 회색의 로브를 벗었다.

그러자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와 같이 그레이 로브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메리 그레이스가 얼굴을 드러냈다.

블랙캣의 리더.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강민혁을 보았다.

“설마 9서클의 경지에 오른 건가.”

“아마도 그런 것 같군.”

“...알렉산드르가 결국 제 광기에 잡아먹혔구나.”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자신의 계획을 내게 모두 말해주었다. 그리고 내게 죽었지. 메리 그레이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와 마찬가지로 2천 년을 살아온 마녀. 너는, 어떤 선택을 내릴 거지?”

메리 그레이스.

과거의 역사에 기록된 이름은 아니다.

하지만 강민혁은, 그가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와 마찬가지로 2천 년을 살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메리 그레이스가, 현실을 수긍했다.

“네 말대로 나는 알렉산드르와 마찬가지로 2천 년을 살았다. 하지만 그의 계획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에게는 ‘최초의 재앙’을 막아낼 기회가 있었지만, 알렉산드르의 욕심에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지. 아직도 그 순간을 후회한다. 재앙을 방관한, 그때의 선택을.”

“그게 무슨 의미지?”

“공간의 분리로 인해서 알렉산드르와 어떤 대화를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알렉산드르는 진실을 전부 말하지 않았겠지. 알렉산드르, 아니 우리의 진실은 매우 추악하거든. 나는 그것을 숨길 생각이 없다. 그것은 우리가 감당해야만 하는 죄악이니까. 그러니 나머지 진실은 클리스만에게 듣는 것이 어떤가. 너에게 진실을 밝힐 자격이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클리스만일 테니까.”

“...클리스만이라.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강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의 의문이 해소되었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일반인인 클리스만이, 대체 어떻게 스스로의 몸을 봉인할 수 있었던 걸까.

바로 메리 그레이스.

그녀가 클리스만의 조력자였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클리스만을 이용하기만 했다면, 메리 그레이스는 클리스만을 도와주었다.

강민혁이 말했다.

“클리스만에게로 안내해. 그를 만나야겠어.”

클리스만.

그와의 관계는 참으로 복잡했다.

그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메리 그레이스를 따라 장소를 이동한 강민혁은, 심연의 틈에서 봉인되어있는 클리스만을 발견했다.

“디스펠.”

봉인을 풀었다.

아주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클리스만이 눈을 떴다.

“결국 성공한 건가.”

“네 덕분이야. 네가 미리 경고해주지 않았다면, 알렉산드르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겠지.”

클리스만이 강민혁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강민혁의 성공에 기쁜 마음이 생기면서도, 그는 마냥 기뻐하지는 못했다.

클리스만이 말했다.

“그간 강민혁이라는 사람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을 주도하는 너의 모습에 나는 너라면 인류에 닥친 문제를 해결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건 확신이 아니라 일말의 가능성. 그런데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구나. 그 짧은 시간에 9서클이 경지에 올라,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를 쓰러트리다니.”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대단했다.

계획의 완성은 알렉산드르 도브첸코가 강민혁을 쓰러트리는 것이었는데, 강민혁은 결과를 뒤엎었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 메리 그레이스, 그리고 나. 우리 모두가 너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네가 9서클에 오른 지금,

우리가 겪은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고로 지금부터 네게 진실을 보여주겠다. 그간 내가 겪은, 아니 인류가 겪은 모든 일을.”

클리스만의 말이 끝나는 순간.

화악.

의식이 확정되었다.

링크.

기억의 동화.

클리스만의 기억이, 강민혁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세상이 변했다.

최초의 재앙.

그때의 장면이 재생되었다.

캬악! 콰득!

“꺄아아아아아악!”

“안 돼에에!”

한 여자가 죽었다.

톱니바퀴 같은 이빨을 가진 괴물은 여자의 육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사내는 절망했다. 부엌에서 사용하던 식칼을 가지고 괴물을 죽여보려고 했지만, 괴물은 끝끝내 사내의 가족을 모두 몰살시켜버렸다. 사내는 피눈물을 흘렸다. 괴물에게 어깻죽지가 물리는 중상을 입었지만, 사내는 결국 식칼로 눈을 관통시켜서 괴물을 죽이는 것에 성공하였다.

괴물은 죽었다.

복수는 성공했으나, 사내에게 남은 것은 차갑게 식어버린 가족들의 시체뿐이었다.

그날.

사내의 인생은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괴물들을 피해 모두 유럽으로 도망치는 반면, 사내는 오히려 재앙의 중심으로 향했다.

칼 한 자루.

그것을 쥐고 몬스터와 싸웠다.

영웅의 숭고함은 없었다.

사내의 전투는 처절했다. 한낱 인간에 불과한 사내의 공격은 몬스터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싸울 때마다 몸에는 상처가 늘었고, 혈인이 되어버린 사내는 몬스터에게 타격을 입힐 수만 있다면 고환을 무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처절하고 비참했다. 사내의 전투는 싸움이라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인간이라는 허울을 벗어버리고 몬스터와 마치 짐승처럼 싸움을 벌였다.

목숨은 버린 지 오래였다.

사내의 목적은 단 하나.

가족을 몰살한 몬스터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것.

그렇게 그는 심연에 들어섰다.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지 몰랐다.

심연의 공간은 그의 육체를 강인하게 만들었지만, 사내는 점점 몬스터와의 싸움에 광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내는 한 사람을 만났다.

“나는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라고 한다.”

클리스만.

그가, 새로운 가능성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클리스만이 말했다.

“네가 기억하는 어린 소년의 모습은 내 본래의 것이 아니다. 그건 내 아들의 모습을 흉내 낸 것이고, 나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처음부터 내게 계획을 제시했던 것은 아니다. 본인의 힘이 심연의 악마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내게 하나의 계획을 제시했다.”

계획.

만남의 시작이었다.

그로 인해, 클리스만은 강민혁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너, 강민혁이라는 사람을 이 세상으로 끌어들이는 것. 메리 그레이스가 사용하는 심안(心眼)은 먼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고, 강화 문명에서 살아가는 네가 특별한 재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문제는 인간의 육체로는 차원 이동의 압력을 버텨낼 수 없다는 것이었지. 그래서 제물이 필요했다. 차원의 압력을 버틸 수 있으면서도, 네가 이 세상에 적응하는 동안 몸을 내어줄 수 있는 소모품. 그리고 네가 적응을 마치고 차원을 오가는 육체를 얻게 된다면, 그때 버림을 받는다 할지라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 그런 하찮은 존재."

강민혁의 눈빛에 파문이 일었다.

이제야 알았다.

클리스만의 역할.

일반인에 불과했던 그가, 이 원대한 계획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

“그래, 내가 바로 너를 위한 제물이었다.”

현실.

그것은 때로는, 생각 이상으로 잔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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