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 46. 마지막 여정(2) >
몽펠리에의 요새.
그곳의 사정은 좋지 않았다.
호기롭게 시작했던 전쟁은 처참하게 박살이 났고, 패잔병들은 밀리고 밀려 몽펠리에의 요새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은 몽펠리에의 요새를 최후의 보루(堂墨)라고 불렀다. 만약 이번에도 악마들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사실상 인류의 미래에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인류는 하나가 되었다.
많은 것을 잃고야 진정으로 뭉칠 수 있었지만, 이미 실패의 대가는 그들을 나락으로 빠트렸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악마의 불길이 성벽에 작렬했다.
몽펠리에의 요새는 상당한 투자 끝에 완성한 철옹성이었지만, 저 멀리 불길을 뿜어내는 악마의 숫자는 무려 수십 마리에 달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밀려오는 몬스터들의 모습에, 성벽 위에서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엘리샤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자리를 지켜라! 밀려서는 안 된다!”
화르르르륵.
서걱!
엘리샤의 검이 불길을 일으켰다.
시야에 닿는 몬스터들을 단번에 베어버리는 그녀의 무력은, 화염검이라는 칭호에 매우 어울렸다.
콰앙!
퍼억, 콰직!
엘리샤 위로, 하늘에서 생겨난 마법진에서 수십 대의 기간트와 플루토가 나타났다. 그들은 마나석에서부터 폭발하는 강력한 힘으로 몬스터들을 쓸어버렸다. 바로 뒤편에서 링크를 통해 기간트와 플루토를 조종하는 마법사들. 거대한 마법 병기가 섬뜩한 안광을 드러내더니, 모세의 기적처럼 길을 열었다. 자잘한 몬스터보다는, 심연의 악마를 하나라도 줄일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라운드 오브 데쓰(Ground Of Death).”
콰르르르르릉.
콰콰콰콰콱!
그레이 로브의 리더.
8서클 마법사라고 알려진 아이작 레드먼(Isaac Redman)의 마법이 땅을 뒤엎었다. 수백, 수천 개의 가시 바위들이 지면을 뚫고 나오며 몬스터들의 육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고, 마법의 범위는 멀리에 위치한 심연의 악마들에게까지 닿았다. 그들은 날개를 활짝 펼치며 마법의 범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아이작 레드먼의 마법은 애초에 더블 캐스팅으로 준비되었다.
“프로미넌스(prominunce).”
화르르르르륵.
초고온의 화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타버릴 것만 같은 마법이, 심연의 악마들이 도망치기 직전에 작렬했다.
콰앙!
화륵, 화르르륵.
[캬아아아악!]
심연의 악마들이 비명을 질렀다. 타오르는 고통에 몇몇은 추락했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악마들은 기간트와 플루토의 공격에 곤죽이 되어버렸다. 대응은 적절했다. 인류의 힘은 단번에 무너질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지만, 그 광경을 바라보고도 엘리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 녀석은 나타나지 않은 건가?’
그 녀석.
사람들이 마왕(魔王)이라고 불리는 존재.
다른 심연의 악마들과는 다르게 엄청난 힘을 보유한 그 녀석은, 모스크바로 진격한 병력을 몰살시켜버린 놈이었다. 그때부터 인류의 계획은 완전히 어긋나버렸다. 그간 만반의 준비로 수많은 악마들을 상대할 준비를 끝냈지만, 마왕의 등장은 상식을 넘어서 모든 것을 파괴해버렸다.
그때부터 시작된 패배.
결국, 인류는 몽펠리에의 요새에 들어가 농성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강민혁이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강민혁.
지금과 같은 상황에는, 항상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몇몇 사람들은 인류에게 전쟁을 부추긴 강민혁의 행보를 원망했지만, 엘리샤의 생각은 그와 달랐다. 애초에 강민혁 덕분에 이 정도로라도 버틸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저 강력한 괴물들을 상대했다면, 인류는 1년은커녕 1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강민혁이 마왕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인류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 그의 저력이라면, 어떻게든 해답을 찾아낼 것만 같았다.
서걱!
푸확!
S급 몬스터의 목이 날아갔다.
정령 빙의와 검술을 활용한 공격에, 방금까지 거칠게 날뛰던 몬스터의 머리가 허망하게 잘려나갔다.
그리고는 전장을 둘러보았다.
전투는 치열했다.
막아내는 데는 문제가 없겠지만, 마왕이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인류는 처절하게 싸워야만 했다.
“좋지 않아.”
서늘해지는 가슴.
지금은, 영웅이 너무나도 간절한 상황이었다.
분위기를 반전시킬, 그리고 마왕을 쓰러트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부여할 그런 영웅의 등장이.
그때였다.
때마침 강민혁은 몽펠리에에 도착했다.
상황을 파악한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최후의 보루인 몽펠리에의 요새가 공격을 받는 상황에, 강민혁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알았다.
위급한 상황.
강민혁은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생각들은 잠시 내려두었다.
지금은 도움이 필요할 때다.
“퓨리 오브 더 해븐."
쿠르르르르릉.
콰콰콰쾅!
선공은 마법이었다.
먹구름이 장악한 하늘에서 수백 다발의 벼락이 떨어지자, 정통으로 얻어맞은 심연의 악마들이 몸을 떨었다. 순간 악마들의 시선이 강민혁에게 집중되었다. 강민혁의 존재를 파악하고 어둠의 불길을 토해내려는 그들의 모습에, 강민혁은 검을 뽑더니 곧바로 땅을 박찼다.
‘블링크.’
파팟.
강민혁의 모습이 사라졌다.
악마들의 한복판.
그곳에서 나타난 강민혁은 이미 H-7을 착용한 상태였고, 악마를 마주하자마자 검을 휘둘렀다.
‘섬멸.’
번뜩.
콰콰콰콱.
엄청난 위력의 검격에 악마의 몸이 난도질을 당했다. 더불어 오라를 통해 번져나가는 패러사이트의 힘. 강민혁의 본능이 날카롭게 돋아올랐다. 곧바로 블링크를 사용하자, 방금까지 있었던 위치에 어둠의 불길이 작렬했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강민혁은 악마의 목을 날렸다.
서걱-
깔끔했다.
강덕철과의 대결 이후로, 강민혁의 검술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나설 수 있었다.
수십 마리에 달하는 악마들을 상대하는 지금의 상황은, 강민혁에게 조금의 두려움도 선사하지 못했다.
‘플루토.’
화악.
콰직!
강민혁의 부름에 플루토가 나타났다.
분뇌로 조종하는 플루토는 강민혁이 취약한 부분을 커버해주었고, 강민혁은 블링크로 심연의 악마들 사이를 날뛰면서 마법과 검술을 적절하게 사용하였다. 패러사이트의 힘 덕분에, 강민혁의 일격은 심연의 악마에게 매우 치명적으로 작용하였다. 몽펠리에의 요새에서 사용되는 공격이 심연의 악마를 쓰러트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강민혁의 활약이 눈에 띄었다.
“...이, 이게 무슨.”
“설마 강민혁이 나타난 거야?”
성벽 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타나자마자 심연의 악마를 도륙하는 강민혁의 모습에, 그들의 표정에 난생처음으로 희망이 보였다.
심연의 악마가 무엇인가.
인류를 절망에 빠트린 그 괴물은 하나하나가 매우 위협적이다. 그런데 강민혁은, 마치 심연의 악마를 ‘압도적일 정도로 강하지는 않은 몬스터’로 보이게 만들었다. 강민혁의 검에서 새빨간 오러가 활활 타올랐다. 그대로 내리긋는 검에, 악마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차원이 다른 무력.
강민혁이 상황을 반전시켰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수성이 아니라 상대를 몰살시킬 수 있음을 알았다.
“성문을 열어라!”
“강민혁을 따르라! 저 극악무도한 악마들을 모조리 죽여버리자!”
“와아아아!”
전장이 달아올랐다.
활짝 열린 성문에서 밀려 나온 몽펠리에의 병력들은, 그간 쌓인 울분을 표출하듯 몬스터들을 도륙했다.
영웅의 존재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강민혁이 나타나 활약했다는 이유만으로,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이전과는 다르게 자신감 넘치는 그들의 모습에, 암담하기만 했던 전장의 분위기가 압도적으로 변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죽고, 죽이고.
피와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전장에서, 인간들은 결국 마지막 남은 하나의 악마까지 모조리 처리했다.
퍽!
머리가 박살 난 악마.
그대로 쓰러지는 악마의 모습을 끝으로, 사람들은 오랜만에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영웅의 귀환이었다.
강민혁이 몽펠리에의 요새로 들어서자, 개선장군(凱旋將軍)을 맞이하는 열광적인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강민혁! 강민혁!”
“강민혁! 강민혁!”
“강민혁! 강민혁!”
어떤 사람들은 강민혁은 원망했다.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여놓고 대체 어디로 갔느냐고.
어떤 사람들은 강민혁을 비난했다.
우리는 이렇듯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한때 영웅이라 불리던 그는 혹시 겁을 먹은 것이 아니냐고.
비난은 비난을 불렀다.
영웅은 도망자가 되었고, 평판은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지금 일순간에 부정적인 감정들이 모두 사라졌다.
강민혁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보여주었고, 이제껏 내뱉었던 비난보다 강민혁의 귀환이 더욱 반가웠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와락!
엘리샤였다.
엘리샤는 한달음에 달려오더니 강민혁을 힘껏 안았다. 남들 앞에서는 강인한 검사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엘리샤지만, 그녀에게 인류의 명운은 버거운 짐이었다. 강민혁은 잠시 엘리샤를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어디를 갔느냐는’ 엘리샤와 사람들의 질문에, 강민혁은 대답해야만 했다.
“그동안 심연에서 악마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심연은 시간의 흐름을 예상할 수 없는 공간이고, 그곳에서 악마를 도륙하는 동안 1년 하고도 6개월의 시간이 흘러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더 빨리 돌아왔어야 했는데, 지금에야 심연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아....!”
“역시."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혹시라도.
강민혁은 인류의 고통을 외면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강민혁의 해명은, 사람들을 오히려 감격하게 만들었다.
1년 6개월.
그 오랜 시간 동안, 홀로 심연에서 사투했을 강민혁의 모습을 생각하니 그간 비난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어떤 사람들은 강민혁을 끝까지 믿었다. 그중 하나가 엘리샤였고, 강민혁은 인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그녀의 말은 맞았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아직도 해나가야 할 일이 많고, 강민혁이 돌아왔다고 해서 전쟁에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아줄 하나가 내려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희망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짙은 그늘이 내려앉은 그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재회의 시간은 짧았다.
인류에게는 시간이 없었고, 강민혁은 알아야 할 일이 많았다.
“잠깐 얘기 좀 나누시겠습니까?”
아이작 레드먼.
그레이 로브의 수장이 말을 걸었다.
항상 회색의 로브를 착용하는 신비주의 단체는, 인류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기꺼이 힘을 보탰다.
화이트 캐슬과 블랙캣.
두 세력이 멸망해버린 지금, 그레이 로브는 인류를 지탱하는 중심이었다.
아이작 레드먼이 나서자, 당연히 아이작 레드먼에게 은혜를 입은 몽펠리에의 사람들은 길을 비켜주었다.
지금은 두 영웅이 대화할 차례.
강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둘은 자리를 옮겼다.
따로 대화하자는 아이작 레드먼의 의견이 반영된 결정이었다.
그런데 주변의 사람들이 사라지고 한적한 공간에 들어서자, 강민혁이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심연에는 클리스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심연의 악마들이 세상을 무너트리려는 것을 알아채고, 평생의 삶을 바쳐서 세상을 위해 헌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심연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저를 노리는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저는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로브 안.
아이작 레드먼이 불쾌한 음성을 내뱉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는 자리에서, 이상한 말을 하는 강민혁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강민혁은 상대의 반응에 개의치 않았다.
“화이트 캐슬의 주인, 가브리엘 칼데론. 클리스만에게 ‘심연의 비밀’을 얻어 8서클의 경지에 오른 그가 이번 사건의 흑막(黑幕)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문제는 심연 밖으로 나오자 화이트 캐슬과 블랙캣이 멸망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공교롭게도, 그간 베일에 싸여있던 그레이 로브라는 비밀 단체가 둘의 멸망 직후에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퍼즐이 맞추어졌다.
클리스만과의 연결고리.
그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사람이 한 명 존재한다.
바로 가브리엘 칼데론.
클리스만은 직접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는 언급을 했었고, 그것은 그가 흑막일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리고 아직 ‘가설’뿐인 하나의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이작 레드먼.
그러니까 그레이 로브의 수장이, 화이트 캐슬의 수장인 가브리엘 칼데론과 동일인물이라는 것.
처음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확실한 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의 정체였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이작 레드먼. 아니, 가브리엘 칼데론.”
우뚝.
아이작 레드먼이 걸음을 멈추었다.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까처럼 불쾌한 기색도, 반박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강민혁의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었을 때, 회색의 로브가 들썩였다.
“킥킥킥, 영리하네. 그걸 단번에 알아차리다니.”
느릿한 손길로 로브를 벗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도는 그의 모습에, 강민혁으로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얼굴.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직접 목격한 적은 없다.
클리스만의 기억.
그곳에서, 강민혁은 심연의 악마와 싸우는 ‘그’를 보았었다.
“이왕이면 내 이름을 정확하게 말해주었으면 좋겠군. 내 이름은 아이작 레드먼도, 그렇다고 가브리엘 칼데론도 아니다. 둘 다 나의 분신이기는 하지만, 내 진정한 이름은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
그는 클리스만과 마찬가지로, 2000년 전에 살았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