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 46. 마지막 여정 >
강민혁은 마법 문명으로 넘어가는 정확한 방법을 모른다. 차원 이동은 항상 외부의 힘에 의한 것이었고, 눈을 뜨면 다른 세상이었던 경우가 전부다. 그러나 조각조각 나누어진 경험의 파편과 클리스만의 지식을 조합한 결과, 강민혁은 차원 이동의 매우 중요한 단서를 유추할 수 있었다.
‘심연의 공간은 차원의 중심, 그것이 중간 다리 역할을 맡는다.’
강민혁의 가설은 이랬다.
[강화 문명] - [심연] - [마법 문명]
이러한 배열처럼 차원은 서로 이어져 있다.
그러한 가설이라면 그간 벌어진 사건을 어느 정도는 설명할 수 있다. 두 세계의 시간차는 심연으로 인한 시간의 괴리일 테고, 양쪽 세계는 전혀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지만 심연의 통로와 연결된다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악마의 공격을 받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클리스만이 말하는 차원 이동 관련 지식에는, 심연의 통로와 관련된 언급이 수차례 포함되어 있었다.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직접 차원 이동을 시도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가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떠나기 전.
강민혁은 이학범과 대화를 나누었다.
“...정말 떠날 건가?”
“예.”
“왜지? 전쟁은 거의 끝나고 있어. 심연의 악마들이 출몰하는 숫자가 현격히 줄어들었고, 몬스터들 정도는 우리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아. 얼마 지나지 않으면 네가 말했던 평화의 시대가 도래할 텐데, 왜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려는 거지?”
이학범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심연 너머.
마법 문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로서는, 강민혁의 선택이 괜한 위험을 자초한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씀을 하는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심연의 공간에 악마들이 모두 사라졌는지를 정확히 확인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인류에게 닥친 재앙이 되풀이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아니라면 심연의 압력을 버틸 수 없는 사실을. 다른 누군가도 아닌, 제가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이학범은 말을 잃었다.
강민혁의 주장에 동의한다.
인류의 명운이 걸린 문제라면, 아무리 위험하다 할지라도 확실하게 확인할 필요성이 있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강민혁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꼭 무사히 돌아오거라.”
“알겠습니다.”
송별회는 없었다.
전쟁 도중에 강민혁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일반 병사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다.
강민혁은 인류의 구심점.
영웅의 부재는 공개해서 좋을 일이 전혀 없기에, 모두가 잠든 시간에 강민혁은 조용히 빠져 나왔다.
그리고 심연을 마주했다.
심연의 통로.
이 너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결단을 내린 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가자.’
탁.
걸음을 내디뎠다.
심연의 통로에 몸을 맡긴 순간.
화악-
새하얀 빛이 강민혁을 덮쳤다.
그리고, 강민혁의 머릿속에 새로운 기억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심연의 공간에 들어선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
기억의 파편이 강민혁의 뇌를 장악하며, 언제 심어놓았는지 모를 클리스만의 메시지가 재생되었다.
“네가 이 메시지를 보고 있다는 것은 내 의도가 통했다는 말이겠지.”
눈앞.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강민혁은 클리스만에게 아무런 말도 건넬 수 없었다. 기억의 파편에서 강민혁은 철저하게 방관자의 입장이었고, 클리스만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가만히 들어야만 했다.
“내 메시지가 무사히 전달되었다는 것은 매우 희망적인 소식이야. 아마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는 지금, 나는 아무도 모르는 안전한 장소에 봉인되어 있겠지.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나의 선택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진실의 금제(禁制)를 피해서 너에게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억압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진실의 금제라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진실의 금제라니.
대체 누가 클리스만에게 금제를 걸었단 말인가.
강민혁이 알고 있는 클리스만이라는 사람은 초월적인 존재다. 최초의 재앙을 직접 경험했으며, 2000년간 살아오면서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 그런 사람이 금제를 받았다고 하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신인 걸까?
아니, 그건 말이 되질 않는다.
클리스만이 그간 어떤 일을 경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의 개입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와 같은 느낌이었다. 신이라는 존재로 지금의 상황을 해명하기엔,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클리스만이 말했다.
“지금까지 너를 속여서 미안하다. 2000년 전의 나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 불과 했지. 그리고, 그것은 너를 처음 만날 때도 다르지 않았다.”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방금 발언.
그것은 그간의 일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었다.
클리스만은 평범한 사람일 수 없다.
강민혁은 클리스만으로부터 2000년의 마법 역사를 알게 되었고, 덕분에 8서클이라는 초월적인 경지에 올랐다. 그런데 지식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클리스만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니. 그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심연의 악마라는 재앙을 맞이하며 예상할 수 없는 여러 상황을 맞이했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달랐다.
신뢰가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강민혁과 클리스만 사이에 형성되었던 끈끈한 신뢰가, 지금은 믿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당황스럽겠지. 당황스러울 밖에 없을 거야. 하지만 내가 진실의 금제를 피해서 말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다. 그 이상 말했다간, 내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나는 진실의 금제를 받겠지. 그러니 명심해라. 심연 너머에서 너를 노리는 사람이 있다. 그를 조심하라. 그리고 나를 봉인에서 풀어다오. 네가 미지(未知)의 어둠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기를, 내가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겠다.”
화악-
시야가 뒤틀렸다.
시야가 핑글핑글 돌았다.
이윽고 공간이 안정되었을 때.
“...여기는.”
강민혁은 마법 문명, 그토록 원했던 심연 너머에 존재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정리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클리스만.
최초의 재앙에서 살아남은 2000년 전의 인간.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 말하면서, 진실의 금제를 건 미지의 존재를 언급했다.
아마도 정황상 심연 너머에서 강민혁을 노리고 있다는 사람이 그 존재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것이 현재 가지고 있는 정보로 추측할 수 있는 유일한 가설. 현기증이 일었다. 심연의 통로에 들어서기 전만 하더라도, 강민혁은 인류에게 닥친 재앙을 막아내야만 한다는 위험하지만 심플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모든 진실이 뒤얽힌 기분이었다.
클리스만의 존재를 부정하고 나니, 강민혁으로서는 그 어떠한 것도 섣불리 확신할 수 없었다.
“하아.”
퍼즐이 뒤집혔다.
하나하나 맞추었던 퍼즐은 엉망이 되어버렸고, 진실에 접근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강화 문명 사람들의 목숨은 자신에게 달렸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광경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했다.
화르르륵.
타닥타닥.
멀리서 불길이 타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예상대로였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고, 상황은 생각보다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일단은 움직이자.’
고민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진 않는다.
강민혁은 일단, 불길이 타오르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지옥이었다.
시야가 닿는 곳곳에 사지가 뜯겨나간 수많은 시체가 보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 몬스터와 싸운 것으로 추정되는 시체는, 몬스터와 한데 뒤엉켜 이전의 형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건물에 번지기 시작한 불길. 한눈에 들어오는 광경을 바라보며, 강민혁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미 시작되었구나.’
확실했다.
이건 전쟁의 여파였다.
마법 문명의 사람들은 계획대로 전쟁을 시작했고, 그 결과 중 하나가 지금의 상황으로 보였다.
강민혁은 혹시 모를 단서를 위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폐허가 되어버린 땅에는 죽음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곳을 공격한 몬스터들은 사람들을 따라 같이 이동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매캐한 연기의 냄새와 피의 비릿함이 속을 역하게 만들었지만, 강민혁은 덤덤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하늘에서 이곳으로 뚝 떨어진 강민혁으로서는, 지금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조금의 단서라도 필요했다.
그때였다.
무너진 건물 사이로, 신음을 흘리고 있는 한 사내를 발견했다.
“...사, 살려주세요.”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당장 사그라질 불꽃처럼 힘겹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강민혁은 한달음에 달려가서 그를 도와주었다.
일단 무너진 건물을 치워야만 했다.
일반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초인의 육체 능력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커다란 콘크리트 덩어리를 몇 개 치우자 핏덩이가 되어버린 사내의 하체가 보였다. 아무래도 하반신을 되살릴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위해 치료 마법으로 상처를 치유해주었다.
덕분에 사내의 혈색이 살았다.
메마른 입을 달싹이는 그의 모습에, 강민혁은 미리 챙겨두었던 물을 입으로 조심스럽게 흘려보냈다.
한 1시간 정도 지났을까?
정신을 차린 사내를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1년 전에 시작한 전쟁, 그게 재앙의 시작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그러니까 강민혁이 강화 문명으로 돌아가고 나서 반년이 지난 시점에, 인류는 계획했던 대로 전쟁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만 해도 분위기는 좋았다. 강민혁이 알아낸 장벽 너머의 정보를 기반으로 인류는 승승장구하였는데,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난 이후 예상치도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바로 심연의 개방.
심연의 악마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부분에서, 사내는 몸을 벌벌 떨었다.
“심연의 악마는 한두 마리가 아니었습니다.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악마가 세상으로 퍼져나갔고, 인류가 준비했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하나의 악마가 수천의 인간을 학살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데, 그런 괴물을 대체 어떻게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전쟁은 끝났습니다. 더 이상, 인류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장벽.
블랙 캐슬이 무너졌다.
장벽 너머를 공략하기는커녕, 장벽이 무너져버린 상황에 인간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년.
전장에서 명성을 떨치던 수많은 별이 떨어졌다.
“3대 세력이라고 불리던 화이트 캐슬과 블랙캣은 진즉에 멸망했고, 클리스만도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시작점이었던 강민혁도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그가 너무나도 원망스럽습니다. 전쟁을 해야만 한다고 인류를 부추겼다면, 그 과정과 결과도 같이 감당 해야만 하는 것 아닙니까? 인류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 영웅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내는 절규했다.
클리스만과 강민혁.
한때는 영웅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모두가 비난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싸우다가 숭고한 죽음을 맞이했다고도 말했지만, 그것은 다수의 의견이 아니었다.
지금은 영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간절함은 원망이 되었다.
사내는 영웅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이 지금이라도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진심을 드러냈다.
‘...벌써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1년.
시간의 괴리는 결국 변수를 만들었다.
강민혁은 비슷한 시기에 전쟁을 시작했지만, 애초에 전쟁의 타이밍은 예상이 가능한 영역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강화 문명에서 무턱대고 심연의 공간을 개방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의 광경은, 강화 문명의 일이었을 것이다.
강민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 그 영웅이라는 사람이 돌아왔다면, 지금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야 당연히....설마?!”
사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고통으로 인해 창백하게 질렸던 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드러났다.
원망과 분노.
뭐라고 욕이라도 퍼부으려던 그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억누르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콘크리트에 깔린 자신을 버린 가족.
아니, 버릴 수밖에 없었던 가족.
그들이라도 살기 위해서는, 영웅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인류는 최후의 보루라고 불리는 몽펠리에(Montpellier)의 요새로 도망쳤습니다. 그곳으로 가주십시오. 최후의 보루를 지킨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열광할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현상이었는지, 또렷한 어투로 길을 제시한 그는 이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강민혁은 그를 묻어주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몽펠리에라.’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도시.
그곳이 최후의 보루라면, 벨라루스에 설치된 장벽으로부터 이어진 땅이 모두 함락되었다는 뜻일 터.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많았지만, 강민혁은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몽펠리에로 간다.’
클리스만의 메시지.
그리고 현재의 상황.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필연이 몽펠리에로 이끈다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정답 또한 몽펠리에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감각이 날카롭게 돋았다.
지금부터는, 조금도 방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