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 45. 결전 >
지금으로부터 반년 전.
결전의 날을 결정한 이후, 강민혁의 주도하에 세계를 대표하는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독일 마법 협회장.
발터 게르하르트가 말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십시오.”
그의 음성에는 강한 신뢰가 보였다.
독일 마법 협회에 재앙이 닥쳤을 때, 방관자들과는 다르게 강민혁은 목숨을 걸고 그들을 구해주었다.
그때부터 발터 게르하르트는 친(親) 강민혁의 세력이 되었다.
강민혁이 진행하는 일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목소리를 높였고, 가장 먼저 강민혁을 위해서 움직이는 그의 모습에 강민혁의 사냥개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 어떤 사람들은 한 세력의 우두머리로서 부끄럽지도 않냐고 비아냥댔지만, 발터 게르하르트는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
“강민혁은 세상을 구할 영웅이자, 독일 마법 협회의 은인입니다. 그를 위해서 무엇이든 하겠다는 게 잘못된 일입니까? 제가 걱정하는 것은, 독일 마법 협회장으로서의 평판이 아니라 강민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뿐입니다.”
발터 게르하르트를 필두로 세력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상당한 세력을 갖추었고, 이렇듯 세계 정상들이 모인 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위치까지 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전쟁은 강민혁의 도움이 필요하다.
심연의 악마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기에, 강민혁의 세력이 아니라 할지라도 발터 게르하르트의 물음에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강민혁이 말했다.
“심연의 공간은 차원의 균열을 말합니다. 일반적인 사람으로서는 심연의 압력을 버틸 수 없기 때문에, 심연에 직접 들어가서 전쟁을 치르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하지만 강민혁 마탑주님은 심연으로 들어간 경험이 있지 않으십니까?”
미국의 강화 전사 세력.
블랙 솔저(black soldier)의 리더가 의문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강민혁은 직접 심연을 경험했다고 발언한 적이 있으니, 압력의 위험성을 제대로 공감하지 못했다.
“예, 저는 심연의 압력을 버티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8서클의 경지에 오른 저조차도 심연의 압력에 정신을 잃을 뻔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일반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전쟁은 소수의 강자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에 심연의 위험성을 공감하지 못하시겠다면, 직접 경험하고 오셔도 좋습니다. 다만, 안전은 보장해드릴 수 없습니다.”
리더의 입이 쏙 들어갔다.
강민혁조차도 위험했다고 말할 정도라면, 솔직히 압력을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반대 의견은 없었다.
강민혁의 발언은 그만한 힘이 있었고, 모두가 동의한다는 반응을 보이자 강민혁이 계획을 정리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심연의 악마를, 우리의 홈그라운드로 불러들일 생각입니다.”
클리스만의 지식.
악마를 소환했던 심연의 통로는 단순히 일회성 스킬이 아니다.
그것의 발전된 형태를 사용할 경우, 지구의 일부를 심연의 공간과 완벽하게 동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가 준비해둔 장소에 심연의 공간을 동화시킬 것입니다. 미리 방책을 세우고 수성의 이점을 살린다면, 심연의 너머로 넘어가는 것보다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우리는 그날을 미리 준비해야만 합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성을 쌓고, 심연의 악마들에게 타격을 입힐 무기를 준비하고. 그리고 인류의 힘을 동화된 공간에 집중시켜야만, 결전의 날에 멸망이라는 결말을 맞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라는 사람에 불만이 있는 분들도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번만 참아주십시오. 인류의 위기가 모두 해결된다면, 그때는 여러분들의 뜻을 펼치셔도 됩니다.”
그날, 인류의 행보는 결정되었다.
그때부터 인류는 결전의 날을 대비하였고, 반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계획했던 것은 현실이 되었다.
결전의 장소는 독일의 괴를리츠(Gorlitzer)였다.
강민혁의 의지도 있었지만, 게이트의 여파로 폐허로 변해버린 땅은 전쟁을 치르기에 적합했다.
심연의 통로가 열릴 지점.
그곳을 중심으로 6개의 방향에 성벽이 설치되었다.
10m는 훌찍 넘어갈 높이와 단단한 성벽은, 인류의 노력이 담긴 결정체라고 할 수 있었다.
결전을 앞두고.
1번 성벽의 지휘관을 맡은 브록 빌링스(Brook Billings)라는 사내가 강민혁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1번 성벽 아무런 이상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얼른 싸우고 싶습니다. 심연의 마나를 연구한 끝에, 그것을 방어해낼 수 있는 단단한 성벽을 건설하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의 방어력이라면 심연의 악마라 할지라도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1번 성벽의 지휘관이기 전에 상당한 명성을 떨친 강화 전사였다.
6개의 성벽.
그곳에는 세계적인 실력자들이 지휘관 자리를 맡았다.
그리고 브룩 빌링스의 말대로 인류는 6개월간 성벽 강화에 많은 공을 들였다. 강민혁이 발현하는 심연의 마나를 연구하였고, 수십만 번의 방어력 테스트 끝에 최종 형태를 만들어냈다. 8서클 마법도 버텨낸 성벽이기 때문에, 브룩 빌링스의 자신감은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벽이 무너진다 할지라도 그 뒤에는 이와 같은 성벽들이 차례로 설치되어 있었다. 이번 결전은 인류의 존망이 걸린 문제이기에, 강민혁은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다. 이곳은 1차 저지선. 처음부터 심연의 악마들을 모조리 쓸어버린다면 좋겠지만, 사실 1번 성벽이 무너질 각오는 하고 있었다.
다만, 쉽게 무너지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간 진행되었던 고된 훈련에, 브룩 빌링스는 자신감을 표출했다.
“그래도 방심하지는 마세요. 심연의 악마는 ‘상식’이라는 것이 통하지 않는 괴물이니까요.”
강민혁을 비롯한 수뇌부들은, 6개의 성벽을 돌아다니면서 문제는 없는지 상황을 꼼꼼히 점검했다.
강민혁은 인류의 대표가 되었다.
이번 결전을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게 결정된 사항이었고, 전체적인 지휘를 맡는 사람 또한 강민혁이었다. 6개의 성벽에 대기하고 있는 수백 만의 병력들. 그들이 모두 강민혁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강민혁은 그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이제까지는 몬스터들이 공격하는 것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면, 지금부터는 우리가 반격을 시도할 차례입니다. 지난 6개월의 시간을 믿으십시오.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인류의 저력은 악마들의 공격에 절대 굴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투쟁한다면, 저는 가장 앞에서 적들과 싸울 것입니다.”
사람들이 열광했다.
때가 왔다.
이제는 전쟁을 치를 것이라는 생각에, 사람들은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각자의 무기를 쥐었다.
강민혁의 말대로다.
인류는 매번 당하기만 했다.
게이트와 던전은 예고도 없이 나타났고, 인간은 가만히 있다가 그들의 공격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먼저 공격하고 재앙의 근원을 뿌리째 뽑아버린다면, 그간 인류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트렸던 몬스터의 공격을 완전히 없앨 수 있다.
결의의 찬 표정들.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수십억의 인구 중에서 선별된 정예들이, 강민혁의 명령을 기다렸다.
마침내.
‘심연의 통로.’
화악-
강민혁이 통로를 열었다.
마나가 들끓었고, 하늘이 마치 유리 파편이 떨어지는 것처럼 조각난 형태로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르르릉.
번개가 쳤다.
먹구름이 끼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차원의 동화.
무저갱과도 같은 심연(深滿)이 현세에 나타났다.
세상이 변했다.
방금까지는 한산하게 바람이 불었던 괴를리츠가, 지금은 몬스터들과 한데 뒤엉킨 전장으로 변했다.
“1조 발사!”
"발사!"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심연 너머에서 밀려드는 몬스터들의 공격에, 성벽 위에 설치된 수성 병기가 세찬 빛을 발했다. 마력 대포는 순식간에 몬스터들을 증발시켜버렸다. 수백 개의 마나석을 하나로 연결시킨 강력한 무기는, 한 번의 발포만으로도 수억의 돈이 나갈 정도로 값비싼 병기였다.
그러나 인류의 명운이 걸린 결전이 진행되는 지금, 그런 계산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류의 모든 힘.
그것이 괴를리츠에 집중되었다.
돈과 재물은 차고 넘쳤고, 싸우겠다는 사람이 많아서 제한된 인원을 선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골렘 장착.”
“장착.”
철컥.
철컥철컥.
성벽 위에 위치한 강화 전사들이 개인별로 보급된 골렘을 착용하였다.
강화 전사용 골렘은 육체 능력을 상승시키는 것에 특화된 형태로 제작되었다.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힘에, 그들은 곧바로 성벽을 바짝 붙어 올라오는 몬스터들의 머리에 무기를 쑤셔 박았다.
퍽!
캬악-
단단한 두개골이 단번에 부서졌다.
바닥으로 추락하는 한 몬스터가 지독한 독액을 뿜어내었지만, 골렘의 외피는 사용자를 지켜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리적인 이점과 강화 전사들이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마도형 골렘을 착용한 마법사들은 보다 편하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수천의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법이 펑펑 터졌다. 지진이 일어난 땅은 무저갱의 아가리로 몬스터들을 찢어발겼고, 하늘에서는 불의 비가 떨어졌다.
화륵.
화르르르르륵.
이곳은 현세의 지옥이었다.
심연으로부터 나타난 몬스터는 끝도 없었지만, 그들은 성벽에 닿기도 전에 대부분 죽음을 맞이했다. 소수의 몬스터가 성벽까지 올라 온다 할지라도, 강화 전사들이 버티고 있는 성벽 위를 넘어설 방법은 없었다.
강화 전사와 마법사의 조합.
이상적인 형태였다.
각자가 제 역할을 다하자, 파도처럼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막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인류는 왜 애초에 타협하지 않았던 걸까.’
강민혁은 아직 나서지 않았다.
사실 인류가 처음부터 끝을 보고자 마음을 먹었다면, 심연의 악마는 이토록 강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적에게 시간을 주는 바람에 악마들은 성장했고, 결국 지금에 이르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만약 2000년 전에 클리스만에게 ‘힘’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의 클리스만은 일반인에 불과했고,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었다.
6개월.
준비 시간으로는 짧았다.
그러나, 그 정도만으로도 인간은 많은 것을 해내었다.
높은 성벽을 쌓았고, 미지의 세계였던 골렘의 발전을 이루어냈으며, 수성에 특화된 수많은 병기를 만들어냈다. 특히 강화 전사와 마법사들의 호흡. 서로 맡은 바 임무를 해내며 몬스터들을 막아내는 그들의 모습은, 그간의 분란이 우스울 정도였다. 저토록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이면서도, 인간들은 조금의 이득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현실의 위기를 외면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끝도 없는 문제겠지. 지금이라도,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게 다행이야.’
고개를 저었다.
잠시 감상에 빠졌던 강민혁은, 현실을 직시했다.
몬스터의 숫자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웬만한 나라 몇 개는 멸망시킬 정도의 숫자였으나, 견고한 성벽은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안심하기엔 일렀다.
심연 너머.
그곳에서는 아직 ‘진짜’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신경을 건드리는 불길한 기운에 강민혁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역시!"
콰앙-
콰콰콰쾅!
전방을 휩쓸어버리는 마법 병기의 위력에, 브룩 빌링스는 환하게 웃었다.
“이런 빌어먹을 몬스터 새끼들! 봐라, 이게 바로 인간의 위력이다! 너희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인간의 힘이란 말이다!"
그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자신감이 넘쳤다.
저 많은 몬스터를 보라.
다가오지도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쓰러지는 그들의 모습에, 브록 빌링스의 피가 잔뜩 끓어올랐다.
‘심연의 악마도 이대로 처리하면 되는 일이다.’
1번 성벽.
이곳의 단단함은 수차례 진행한 실험으로 검증되었다.
브룩 빌링스는 성벽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악마라도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강민혁이 심연의 악마를 상대한 영상은 보았다.
파괴적이었던 악마의 위력은 분명히 대단했지만, 6개월의 시간은 브룩 빌링스에게 자신감을 부여했다.
캬악!
콰앙, 콰앙!
몬스터들이 발악하며 성벽을 공격했다. 일반 성벽이었으면 몬스터들의 괴력에 조금이라도 금이 생길 법도 하건만, 1번 성벽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 건재함을 자랑했다. 인류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브룩 빌링스도 그것을 강조하며 병사들을 독려하려는 순간, 재앙은 현실이 되었다.
화악-
콰르르르르릉.
화륵, 화르르르륵!
“크악!”
“으아아아악!”
단 일격.
심연 너머로부터 날아온 불길이 그대로 성벽에 작렬했다.
순간 브록 빌링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성벽의 방어력은 무적이라고 생각했건만, 타닥타닥 불길이 타오르는 성벽은 금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런 미친.”
강민혁의 말은 옳았다.
강민혁은 이런 말을 했었다.
“성벽을 아무리 강화시킨다고 해도 악마의 공격을 ‘완벽히’ 방어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빨리 무너지느냐, 아니면 조금 더 늦게 무너지느다의 차이일 뿐이니, 성벽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성벽은 결국 무너질 테고, 우리는 그 안에 최대한 많은 적을 처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머리가 팽팽 돌았다.
이제야 현실이 보였다.
전투의 분위기에 휩쓸리는 바람에, 무조건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고 말았다.
심연의 악마.
그것은 S급 몬스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이번 전쟁의 승패는 자잘한 몬스터들을 모두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심연의 악마와의 싸움에 달렸다.
콰앙!
콰르르르르릉.
심연의 악마들이 나섰다.
심연의 공간에서 나타난 그들은,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그러자 브룩 빌링스의 시야에 앞으로 나서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강민혁.
지금부터는 그가 본인의 역할을 행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