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 43. 공백의 일 년(6) >
카메라 너머.
벤투에서 벌어진 일은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그리고 상식이 완전히 무너지는 광경에, 사람들은 당황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프란체스코 두란테, 라 피암마의 별이 떨어지다!]
[벤투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심연, 그것의 정체는?]
[심연 너머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
기사가 쏟아졌다.
처음에는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패배라는 충격적인 소식에 포커스가 집중되었지만, 곧바로 벌어진 사건에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안중에도 없었다. 심연의 악마라고 불리는 괴물. 단 한 번의 공격에 수많은 강화 전사들을 쓸어버린 그것의 위력에, 학자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심연은 차원의 균열과 비슷한 성질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심연, 차원의 균열, 던전, 게이트 등등은 칭하는 단어는 모두 다르지만, 결국 다른 차원으로 이어지는 통로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강민혁의 말대로라면, 게이트를 통해 몬스터가 나타나는 이유는 심연에서 살고 있는 심연의 악마라는 존재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드디어, 재앙의 실체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이 악마의 존재를 인정했다.
눈으로 보기도 했지만, 심연의 악마라는 퍼즐은 이제껏 가지고 있던 의문을 완전히 해결해주는 존재였다.
문제는 심연의 악마의 위력이었다.
강민혁은 심연의 악마가 수도 없이 존재한다고 했는데, 하나의 개체가 발휘하는 위력이 너무나도 강력했다.
현장에 있었던 생존자.
처참한 몰골의 강화 전사는, 두려움에 떠는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당시의 상황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강민혁이 위험하다고 뒤로 물러나라고 했는데, 그때는 심연의 악마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모르고 강민혁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그 결과로 저는 양팔을 잃어버렸습니다. 무언가가 우리를 공격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늘이 뒤집히고 저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심연의 악마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괴물입니다. 그날 그 자리에는 에릭 댐피어(Erick Dampier)도 있었습니다. 그가 누군지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대단한 강화 전사도, 첫 공격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었습니다.]
생존자가 벌벌 떨었다.
에릭 댐피어.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뒤를 이어, 라 피암마의 다음 세대를 이끌 거라고 평가받던 촉망받는 인재.
그는 본인의 명성을 드러낼 시간도 없었다.
처음 공격을 당했을 때 그는 다른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분명히 죽은 사람들의 실력에는 큰 격차가 있었을 텐데도, 심연의 악마 앞에서 에릭 댐피어는 평범한 강화 전사1에 불과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선사하였다. 심연의 악마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기도 힘든데, 영상 속의 괴물은 에픽급 몬스터 이상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강민혁에게 집중되었다.
심연의 악마는 강하다.
그런데 그런 괴물을 강민혁은 쓰러트렸다.
8서클 마법.
플루토.
미지의 힘을 사용하는 강민혁의 모습에, 사람들은 강민혁이야말로 유일한 희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강민혁, 그는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가?]
모두가 한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강민혁이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대로, 사람들의 관심이 절정에 달했을 즈음에 강민혁이 카메라 앞에 섰다.
방송 준비가 끝났다.
강민혁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스태프들의 표정이 보였다. 그들은 강민혁의 요청에 따라 방송을 준비해주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도 궁금한 것이다. 심연의 악마는 대체 무엇이며, 강민혁은 어떻게 그들을 쓰러트릴 수 있었는지. 세상의 위기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에, 그 누구도 이 방송의 시청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세상의 안위다.
시청률은, 그것이 보장돼야만 의미가 있는 법이다.
강민혁이 말했다.
“제게 궁금한 것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1년 전에, 심연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실을 목격했습니다. 심연의 악마는 최초의 재앙으로부터 탄생한 생명체입니다. 차원의 폭발이 일어났을 때, 심연의 악마는 차원의 균열에서 태어나 몬스터들로 하여금 세상을 공격하도록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예,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보았던 그 괴물이 맞습니다. 심연 너머에는 그러한 괴물이 수도 없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심연의 악마를 모조리 없애버려야만 합니다.”
적당히 각색했다.
클리스만의 이야기와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정보를 섞었다.
“심연의 악마는 세월이 흐르면서 강해졌습니다. 제가 상대했던 심연의 악마보다 강한 것이 있을 수도 있고, 약한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건 현재 인류의 힘으로는 그들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대체 언제까지 인간들끼리 이권 다툼을 할 생각입니까? 심연의 악마라는 위험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여러분들은 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겁니까?”
카메라 너머.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벤투에서의 사건은 그들에게 충격을 선사했을 것이고, 자신의 발언은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꽂힌다.
강민혁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이번에는 깨닫길 바란다.
인류가 얼마나 큰 위기에 처했으며, 지금부터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심연의 악마는 언제고 직접 인간 세상을 공격할 겁니다. 그때는 늦습니다. 그들의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아무리 발악해도, 인간의 힘으로 절대 그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힘을 합쳐서 먼저 심연 너머를 공격해야 합니다.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들을 상대하는 방법을 알려드릴 테니, 우리끼리 싸우는 것을 멈추고 힘을 합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감정에 호소했다.
앙투안 발라르.
프란체스코 두란테.
강민혁에게 죽어 나간 사람들의 이름은 잊혀졌다.
사람들은 심연의 악마, 지금 당장 세상에 닥친 위험에 집중했다.
적어도 심연의 악마를 쓰러트린 강민혁의 말이라면, 이 위험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고 믿었다.
마른침을 삼키는 스태프들.
그들이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 방송으로, 강민혁은 세상의 유일한 희망으로 떠오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며칠 뒤. 제가 여러분들에게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준비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잊지 마십시오. 인류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이제까지 괜찮았으니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는 안일한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심연의 악마를 상대하는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 말을 명심하십시오.”
탁-
방송을 끝냈다.
그리고 강민혁의 의도는 먹혔다.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죽음부터 시작해서 심연의 악마와의 싸움.
사람들은, 인류의 발등에 뜨거운 불길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인정했다.
혼란의 시대.
인류의 역사에 기록될, 변화의 시작점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세상이 난리가 났다.
이권 다툼 얘기는 쏙 들어갔다.
심연의 악마라는 강력한 적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힘을 합쳐야만 한다고 말했다.
“유럽 강화 전사 연합은 강민혁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영국 마법 협회도 인류를 위해 힘을 보태겠습니다.”
“우리 남미 연합도.........."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했다.
유럽 연합의 경우에는, 본인들의 수장이 강민혁에게 죽었지만 뜻을 따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만큼 이번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확실하게 각인해주는 사건이었고, 들불처럼 일어나는 사람들은 인류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그렇다. 의심하고 본인의 이득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하나의 기폭제가 폭발하는 순간 똘똘 뭉쳐서 문제를 해결한다.
오랜 세월 동안 벌어졌던 크고 작은 사건들.
인간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진정한 위기 앞에서는 욕심을 모두 버렸고,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악마의 타도를 외쳤다.
그 시각.
강민혁은 의외의 장소에 있었다.
바로 수호문.
강덕철은, 강민혁을 바라보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지?”
부자의 연은 끊긴 지 오래였다.
강민혁은 수호문을 떠나고 승승장구를 했지만, 강덕철은 단 한 번도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강민혁이 수호문을 방문했다.
강덕철 말고도 이 자리에 참석한 수호문의 수뇌부들은, 강민혁의 의도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주에게만 허락되는 공명(共鳴)의 비기를 세상에 공개해주십시오.”
“공명의 비기를?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을 텐데.”
공명의 비기.
그것이 내뱉어지는 순간, 수뇌부들의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예민한 문제였다.
강민혁은 수호문의 밑천을 건드리는 일임을 알고 있는데도, 전혀 망설이지 않고 목적을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공명의 비기는 수호문 대대로 가주에게만 허락되는 힘입니다. 수호문의 가주가 공명의 힘을 끌어올리면, 수호 심법을 익힌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저는 그것을 인류를 위해 공개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 발표를 보셨을 테니, 인류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처했는지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세상을 위한 선택을 해주십시오.”
강민혁은 마법 문명에 수호 심법을 퍼트렸다.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단순히 그들이 강해지기만을 바란 것이 아니라, 수호 심법은 공명의 비기와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한다.
세상에 이런 말이 있다.
“수호문과는 전면전을 벌이지 마라.”
수호문과 싸울 경우, 공명의 비기를 사용하면 수호문의 제자들은 하나가 된다. 서로의 생각이 통하고, 오라의 위력이 강해지며, 두려움을 상실한 그들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강민혁은 그 힘을 원했다.
인류의 평화를 되찾는 완벽한 해답이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만 한다.
그러나.
“불허한다.”
“...수호문은 세상의 평화를 위해 헌신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수호문의 비기를 보존하는 것도 가주가 할 일이다. 공명의 힘은 감당하지 못할 경우 시전자와 공명한 대상 모두 정신이 붕괴되어버린다. 그렇기에 특별하게 관리되었던 것이고, 나는 공명의 힘이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너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만약 진정으로 네가 수호문의 비기를 세상에 알리길 원한다면, 직접 가주의 자리에 올라 파문(破門)의 형벌을 각오하고 결단을 내려라.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웃음이 나왔다.
예상은 했었다.
강덕철은 고지식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강민혁을 엄격하게 가르쳤던 것이고, 그것은 인류에 위기가 닥친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재앙을 앞두고 몸을 사리겠다는 것이 아니다.
강덕철의 수호문은 분명히 가장 선두에서 심연의 악마와 싸울 것이다. 그가 공명의 힘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진정으로 그것이 위험하다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확실히 위험한 힘이기는 하다. 공명의 대상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인간의 정신은 감당하지 못할 압력에 무너진다.
하지만 강민혁의 생각은 달랐다.
공명의 힘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활용할 가치가 있고, 자신은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강민혁이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군요.”
이 자리에 오면서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어떤 결단을 내릴지를.
“수호문의 장자 강민혁, 가주 강덕철에게 계승의 대결을 신청하겠습니다.”
계승의 대결.
대대로 내려오는 엄격한 규율.
수호문의 피가 흐르는 적자(嫡子)는, 정당한 대결을 통해서 수호문의 가주 자리를 강탈할 수 있다.
문제는.
“그것 또한 불허한다. 수호문은 검문이다. 마법의 힘으로 대결을 수행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강덕철의 음성은 엄격했다.
그리고 이 또한, 강민혁이 예상한 바였다.
클리스만을 만나던 날.
강민혁은 2번째 환골탈태를 이루었다.
그것은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육체를 재구성하면서, 악마의 심장에서 흡수한 마나가 심장뿐만 아니라 단전으로도 흡수가 되었다.
그리고 강민혁은 새로운 힘을 얻었다.
강민혁이 한편에 위치한 이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하다. 너의 자리인데, 이런 선택을 내려서.”
수호문의 가주.
그 자리에서 권한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수호 심법을 공개하고, 공명의 힘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심연의 압력을 감당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허락할 것이다. 그 대가는 바로 파문이다. 가문의 비기를 유출한 사람은 영영 가문으로 돌아올 수 없겠지만, 강민혁은 이미 수호문이라는 환경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준호의 것.
잠시만, 그 자리를 빌리고자 했다.
“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
강덕철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검으로 도전할 생각입니다.”
강민혁이 얻은 새로운 힘.
그것은 그토록 갈망했던, 단전의 힘이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호문의 장자 강민혁이, 검사로서 가주 강덕철에게 계승의 대결을 신청하겠습니다."
운명이 제자리를 찾았다.
강민혁은 지금, 마법사가 아니라 한 명의 검사로서 강덕철을 마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