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 43. 공백의 일 년(5) >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아직 심연의 악마가 나타나기 전, 그들로서는 강민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심연이라고?”
“그게 대체 뭐지?”
“저길 봐봐. 하늘이 무너지고 있어.”
한 사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였다.
유리 조각이 떨어지는 것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하늘의 파편에,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자세히 보기 위해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것은 원초적인 본능이었다.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고자 하는 그들의 호기심에, 만반의 준비를 끝낸 강민혁은 마나를 실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뒤로 물러나십시오. 심연의 악마가 나타나면, 여러분들의 목숨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경고였다.
심연의 악마.
그것의 힘은 강민혁이라 할지라도 완벽하게 제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본인이 위험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명령을 따르던 강화 전사들은 강민혁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고, 통로 50M 범위 안에 들어서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법사들의 반응이었다.
벤투의 마법사들은 강민혁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이번에도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본인들을 위해 싸움을 마다치 않은 강민혁의 모습에, 그들은 화들짝 놀라며 심연의 통로에서 멀리 떨어졌다. 동시에 방어 마법을 준비하면서, 혹시 모를 기습적인 공격을 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각기 다른 반응.
그 차이가 생사(生死)를 결정했다.
[캬아아아아악!]
번뜩.
붉은 섬광이 일었다.
철판을 벅벅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심연 너머에서 붉은 섬광이 사방으로 퍼졌다.
“피해!”
콰콰쾅!
콰콰콰콰쾅!
순식간에 시도된 공격이었다.
심연의 악마가 표출한 붉은 기운이, 강민혁을 비롯한 주변에 있는 인간들을 공격했다. 강민혁이야 미리 대비했기에 방어 마법으로 막을 수 있었고, 벤투의 마법사들은 피해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거리가 멀어서 심각한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역시 강화 전사들이었고, 강민혁의 경고를 흘려들은 그들은 그대로 붉은 기운에 노출되고 말았다.
치지지직.
“크아아악!”
“으악! 사, 살려줘!”
아비규환(阿鼻叫換)의 지옥이었다.
붉은 기운에 단번에 죽은 사람들은 행운아였고, 목숨을 간신히 건진 사람들은 피부가 녹아내리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수천의 강화 전사들. 그중 3분의 1 정도 되는 인원들이,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범위 안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죽거나 생명이 위험할 정도의 상태에 빠졌다. 꽥꽥 비명을 질러대는 그들의 모습에, 뒤에 있던 사람들은 이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체 저 안에 뭐가 있는 거야?”
한 사람의 말.
모두의 시선이 심연 너머를 향했다.
괴물이었다.
단 일격에 사람들을 이 정도로 쓸어버리는 위력이라면, 그것은 평범한 몬스터라고 할 수 없다.
강민혁이 의도한 바였다.
강민혁은 사람들이, 직접 심연 너머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확인하길 바랐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심연의 악마를 제압한다.’
[크아아아악!]
화악-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심연의 악마.
칠흑같이 어두운 검은 거인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강민혁은 활화산처럼 들끓던 마나를 폭발시켰다.
“폭발.”
콰앙!
콰르르르르릉.
선공은 위력적이었다.
8개의 서클에서 빠르게 회전시킨 마나가,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며 그대로 심연의 악마를 뒤덮었다.
콰콰쾅!
콰콰콰콰쾅!
엄청난 위력.
등급 외 마법은 서클을 초월하는 위력을 보여준다. 폭발의 위력이 9서클의 수준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강민혁이 사용하는 마법 중에는 최상위의 파괴력을 자랑한다.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의 폭발은 상대가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자아냈으나,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화악-
심연의 악마.
그것이 자욱하게 일어난 검은 연기를 뚫고 나타났다.
그의 주변에서 일렁이는 검은 아지랑이는, 폭발의 기운을 흡수하더니 검은 가시 같은 것을 사방으로 뿌렸다.
파바바박-
“블링크.”
본능적으로 알았다.
검은 가시의 파괴력은 대단하며, 실드로 막는 순간 치명상을 입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민혁은 블링크를 연속적으로 사용해서 검은 가시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강민혁과는 다르게 황급히 방패를 들어 검은 가시를 막아낸 사람들은, 검은 가시가 방패를 오염시키면서 퍼져나가는 혼돈의 마나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몸을 부르르 떨더니, 어느 순간 고개를 떨구었다.
‘강하다.’
예상했던 바다.
이런 상대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리고 쓰러트릴 자신이 있기에 강민혁은 심연의 악마를 소환했다.
“볼케이노(Volcano).”
콰앙-
콰르르르르릉.
화염 계열 8서클 마법.
심연의 악마가 있었던 땅이 폭발하며 용암이 분출되었다.
검은 피부에 닿는 순간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심연의 악마는 그에 개의치 않고 팔을 휘둘렀다.
콰콰콱!
대기가 찢어 발겨졌다.
기습적인 공격에, 강민혁의 모습이 네 방향으로 흩어졌다.
‘일루전.’
심연의 악마도 진짜 강민혁을 단번에 찾을 수 없었다. 등급 외 마법인 일루전은 일정 경지에 오르면 자신과 완벽하게 동일한 분신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것은 진리를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파악할 수 없는 차이였고, 심연의 악마는 분신 중 하나를 공격했다.
파삭-
분신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강민혁은 기회를 얻었다.
“화우.”
“염화.”
“헬파이어(Hell Fire).”
연속기.
강민혁의 피부에서 각인의 빛이 세차게 발했다. 8서클에 오르면서 시간을 들여 준비했던 것이고, 폭발적인 화염이 그대로 심연의 악마를 덮쳤다. 이번에는 심연의 악마도 고통에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화우와 염화의 힘이 사방을 불태우는 사이, 지옥의 불길이 악마의 피부를 녹여버렸다. 후두둑 떨어지는 검은 살덩이에, 심연의 악마가 톱니 같은 이빨을 드러냈다.
[캬악, 캬아아아아아악!]
펑-
괴성에 강민혁의 몸이 튕겨 나갔다.
간발의 차이로 그레이트 실드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강민혁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뻔했다.
콰앙-
우르르르.
성벽에 부닥친 강민혁의 위로 돌가루가 떨어졌다. 그러나 강민혁은 고통에 조금도 신음하지 않은 채, 다시 땅을 박차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강민혁에게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여러 무기가 있었다. 만약 그것을 모두 사용한다면 심연의 악마를 지금보다는 쉽게 쓰러트릴 수 있겠지만, 강민혁은 치열한 전투로 심연의 악마가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심연 너머.
그곳에는 이와 같은 악마들이 수도 없이 존재한다.
최초의 재앙에는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세월이 흐르며 그들은 증식할 뿐만 아니라 힘도 강해졌다.
그런 괴물들과 싸우는 것이다.
현실은 외면할 것이 아니라, 마주하고 대비해야만 한다.
“화우.”
화르르르륵!
콰콰콰쾅!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강민혁과 심연의 악마가 주고받는 공방에, 땅이 뒤흔들리고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폭발음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린 상태였다. 설마 심연 너머에 저런 괴물이 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본인들에게 닥친 현실의 이면을 확인하는 순간, 몇몇 사람들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을 정도였다.
콰앙-
“크윽.”
그레이트 실드를 강타한 공격에, 강민혁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신음을 삼켰다.
실드는 단번에 깨졌다.
8개의 서클로 방어력을 대폭 강화시켰지만, 심연의 악마가 분출하는 힘은 감당할 수가 없었다.
‘역부족인가.’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재앙.
그때, 가브리엘 칼데론도 8서클 마법만으로는 심연의 악마를 제압하지 못했다.
결국 완벽한 승리를 위해서는, 8서클 이상의 마법을 사용하거나 새로운 힘의 도움이 필요하다.
강민혁이 가진 무기 중 하나.
사람들에게 절망적인 현실을 보여주었으니, 이제는 희망을 보여줄 차례였다.
‘이제 그만 끝내자.’
화악-
강민혁의 팔뚝에서 빛이 일었다.
각인 마법이 아니었다.
소환의 주문.
강민혁의 주변으로 빙그르르 회전을 일으키던 마나가, 이윽고 주문에 닿아 거대한 형상을 현실에 소환시켰다.
“나와라, 플루토.”
콰앙-
골렘 문명의 정수.
플루토가, 그 거대한 몸체를 드러냈다.
사람들이 감탄할 여유도 없었다.
플루토는 나타나자마자, 거대한 주먹을 그대로 심연의 악마에게 휘둘렀다.
콰앙-
과콰콰콱!
[크아아아악!]
심연의 악마가 뒤로 튕겨 나갔다.
검은 아지랑이로 플루토의 힘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플루토의 힘은 완벽히 막아내는 게 불가능했다.
동시에.
“퓨리 오브 더 헤븐."
번쩍!
콰콰콰콰쾅!
심연의 악마 머리 위로 벼락 다발이 꽂혔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연계 공격에, 심연의 악마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리고 어느새 플루토는 심연의 악마에게 바짝 붙었다. 플루토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종 병기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만의 힘으로 심연의 악마를 쓰러트릴 수는 없다. 플루토의 역할은, 심연의 악마가 마법사에게 신경을 쓸 수 없게 만드는 것.
딱 그 정도면 되었다.
두 개로 나누어진 강민혁의 뇌가, 각각 다른 역할을 수행했다.
‘한쪽 뇌로는 플루토를 조종하고.’
퍽!
콰앙!
플루토의 주먹이 작렬할 때마다 심연의 악마가 몸을 들썩였다.
가까스로 공격을 피하고 반격을 하려고 하면, 플루토도 상대와 마찬가지로 푸른 안광을 발사했다.
폭발을 일으키는 마나.
심연의 악마가 휘청거렸다.
그리고.
‘다른 한쪽 뇌로는 마법을 사용한다.’
“염화.”
콰앙!
화르르르르르륵.
찰나의 순간에 드러난 틈으로 강민혁의 마법이 작렬하였다. 완벽에 가까운 플루토 활용법이었다. 보통 플루토와 같은 것을 조종하기 위해서는, 십수 명의 마법사들이 정신력을 모아서 링크를 시도한다. 그리고 플루토를 조종하는 동안에는 다른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데, 분뇌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 강민혁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강인한 정신력.
그것을 갖춘 덕분에 혼자만의 힘으로 플루토를 조종할 뿐만 아니라, 분뇌로 두 개의 역할을 수행했다.
분뇌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강민혁에게 있어, 플루토는 완벽한 병기였다.
콰앙-
콰콰콰쾅!
심연의 악마와 플루토가 뒤얽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강민혁은 클리스만이 정말 많은 준비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연 너머에서. 강민혁은 클리스만에게 진실을 들었고, 지식과 더불어 플루토를 전달받았다. 그래서 플루토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마법 문명에서 만들어낸 그 어떤 플루토보다 가장 완벽한 형태였고, 강민혁의 의지에 따라 플루토가 움직였다.
콰콰쾅!
쿠르르르르릉.
땅이 흔들렸다.
하늘이 뒤집혔다.
심연의 악마는 점점 힘이 약해지고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강민혁이 아니더라도 플루토에게 밀렸다.
이제는 마무리할 차례.
강민혁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지식 중 하나를 택했다.
‘심연의 악마는 차원의 마나에 약하다. 내 서클에 있는 마나 중에서도, 악마의 심장을 통해서 흡수한 일부의 마나. 그것만을 걸러내서 마법을 사용한다면, 심연의 악마라 할지라도 버틸 수 없다.’
화악-
마나를 분류했다.
클리스만은 오랫동안 심연의 악마를 연구했다.
그리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길을 찾았고, 강민혁은 그것을 완벽히 수행할 능력이 있었다.
마나의 분류.
어려운 작업이다.
보통의 정신력과 마나 컨트롤로는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강민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빠르게 분류를 성공시켰다. 강민혁의 주변으로 일어나는 순수한 마나의 결정체. 플루토가 심연의 악마를 공격하는 순간, 강민혁은 심연의 악마가 드러낸 틈에 마지막 결정타를 작렬시켰다.
“폭발 ”
콰콰쾅!
콰콰콰콰콰쾅!
그것으로 끝이었다.
강력하게 일어나는 폭발에, 이번만큼은 심연의 악마도 버텨낼 수 없었다.
심연의 악마가 괴성을 질렀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몸부림을 쳤지만, 버틸 수 없는 충격에 쓰러지는 모습 그대로 몸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툭.
바닥에 떨어진 악마의 심장.
강민혁은 그것을 챙겼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경악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강민혁과 심연의 악마와의 싸움.
그것은, 이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천외의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