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 43. 공백의 일 년(4) >
정적이 내려앉았다.
누가 명령한 것이 아닌데도, 강화 전사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아아.”
사람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땅바닥에서는 벼락의 여파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같이 마탑을 향해 달려들던 사람들이,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만 잿더미로 변했다.
이게 정녕 마법의 위력이란 말인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수백의 강화 전사들을 단번에 증발시켜버리는 마법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설마."
“8서클의 경지에 오른 건가?”
문득 떠오른 의문.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의 경지는 7서클 이후부터는 한 단계 상승할 때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위력을 보여준다. 강화 문명의 사람들은 강민혁이 사용하는 7서클 마법을 목격한 경험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동일한 경지의 마법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압도적인 위력. 잿더미가 되어 버린 강화 전사들 중에는 나름 명성을 떨친 인물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라졌다.
하늘의 경지.
몸이 벌벌 떨렸다.
정말 8서클의 경지라면, 미지의 힘은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을 선사했다.
".........."
프란체스코 두란테.
그는 말을 잃었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강민혁이 사라진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건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막다른 길에 몰려 있었다.
‘아니,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
문제는 강민혁의 힘이었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강민혁은 지난번의 모습은 생각나지도 않을 정도로 강해져서 나타났다.
분명히 1년 전에는.
강민혁은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마법사였다. 7서클 마법의 위력이 대단하기는 하나, 이탈리아의 불꽃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검술은 세계 제일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래서 전쟁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강민혁의 공백이 정말 폐관 수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라 피암마와 유럽 연합의 힘이라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단 한 번의 마법에 승기가 꺾였어.’
강화 전사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들의 눈동자에 드러나는 두려움은, 마탑을 향해 돌진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끝났다.
지리적인 이점마저 취하고 있는 강민혁을 상대로, 벤투의 성벽을 무너트릴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더구나 강민혁의 마나는 무한하다는 소문이 있다. 일반적인 마법사들은 그래도 마법을 사용하는 숫자에 한계가 있는 반면, 끝도 없이 사용되는 강민혁의 마법은 벤투의 성벽을 철옹성으로 만들어버릴 터. 그러한 사실을 잘 알았지만,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후퇴를 명하지 않았다.
안다.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였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강민혁에게 시간을 준다면, 그는 지금보다 더 강해져서 돌아올 것이다.’
탁.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앞으로 나섰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상황에, 그가 목소리에 마나를 실었다.
“이런 간악한 녀석! 앙투안 발라르를 비롯해서 세계 마법 연합을 무너트릴 때도, 이렇듯 함정을 파서 처리했구나! 나는 네가 계획적인 살인을 저질렀다고 확신한다. 사람들 앞에서는 정의를 내세우는 영웅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 가면 뒤에는 추악한 본성이 숨어있겠지. 고로 너에게 1대1 결투를 제안한다. 본인의 결백함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성벽 밖으로 나와 내 검을 받아라.”
그것은 도박이었다.
1대 1.
말도 안 되는 제안이다.
강민혁의 승리가 확정적인 상황에서, 지리적인 이점을 포기하는 것은 멍청한 선택이었다.
마지막 자존심.
만약 강민혁이 거절한다면,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그것을 물고 늘어져서 명예를 살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승낙할 때는.
‘비난을 감수하고 강민혁의 목을 베어버린다.’
살의를 드러냈다.
순간 시선이 집중되는 상황에, 강민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네 제안을 승낙하지.”
프란체스코 두란테.
그의 이름값은,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인간의 상식.
그것을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상징적인 것이 필요하다.
강민혁은 마법 문명을 대표하는 상징인 ‘장벽’을 무너트림으로써, 결국 그들의 진심을 끌어냈다.
이번에도 같은 맥락이다.
프란체스코 두란테.
세계 최고의 검사라고 불리는 그의 이름값이라면, 강화 문명을 대표하는 상징으로서 충분하다.
끼익-
성문이 열렸다.
그리고 강민혁이 모습을 드러내자,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땅을 박찼다.
“네 악행도 오늘로써 끝이다.”
파파팍.
화르르르르르륵!
그의 발이 땅바닥을 박찰 때마다 마나의 폭발이 일어났다.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순식간에 강민혁의 앞에 도달했고, 그의 검에서는 라 피암마의 상장인 오라의 불길이 일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상대를 베어버림과 동시에,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우는 파괴적인 힘이었다.
강력한 일격.
그런데 불길이 강민혁에게 닿으려는 순간, 강민혁의 눈빛이 붉게 물들었다.
‘정령왕의 권능.’
화르르륵.
“.........?!"
오라의 불길이 사그라졌다.
카산드라와 계약을 맺으면서부터, 강민혁은 불의 속성에 한하여 강력한 지배력을 얻었다.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사용한 오라의 불길도 그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오라는 불의 힘을 단번에 상실해버렸고, 간발의 차이로 공격은 강민혁에게서 빗나갔다.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강민혁에게 향하는 순간, 오라에서 회수한 불길이 마법의 형태로 변했다.
“염화.”
콰앙-
화르르르르르륵.
“크윽.”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뒤로 쭉 밀려났다.
오라의 막을 형성해서 공격을 막아냈지만, 타닥타닥 일어나는 불길은 그의 갑옷을 불태우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상황.
어떻게 불의 힘을 빼앗았단 말인가.
그러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강민혁의 마법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화우.”
머리가 활짝 열렸다.
주변으로 튀어 오른 불꽃이 마법으로 변했고, 동시에 쿼드 캐스팅을 발휘하며 마법을 발현시켰다.
찰나의 시간.
어느새 주변은 화염으로 뒤덮였다.
강민혁의 강력한 마력이, 세상을 불태워버렸다.
“플레임.”
콰르르릉.
화륵, 화르르르르르륵!
엄청난 위력이었다.
강민혁은 프란체스코 두란테를 압도적으로 쓰러트릴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강화 문명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런 상대를 압도적으로 쓰러트린다면, 강민혁의 발언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얻는다. 그리고 곧바로 진행될 계획. 그것이, 이번 작전의 클라이맥스였다.
“크아악!”
화악-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불길을 뚫었다.
세상을 뒤덮은 화염에도, 그는 기어코 길을 열었다.
그리고 번뜩이는 검격.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최강의 검이라는 명성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화염을 뚫어내는 강인함과 미처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검. 웬만한 사람은 목이 날아갔어야 맞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공격이 강민혁의 목을 베어버리는 순간, 강민혁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했다.
일루전.
8서클에 오르면서 강민혁의 힘은 강해졌다.
등급 외 마법은 한 단계 위력이 상승하였고, 강민혁은 자신과 같은 일루전을 세 개나 만들어냈다.
“익스플로전.”
“익스플로전.”
“익스플로전.”
세 방향.
일루전과 더불어 강민혁의 본체가 동일한 마법을 사용하였다.
그러자, 엄청난 폭발이 프란체스코 두란테를 덮쳤다.
콰쾅!
콰콰콰쾅!
일방적인 승부였다.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초인의 육체 능력을 보여주면서 강민혁을 끝까지 공격했지만, 강민혁의 마법은 상대를 바보로 만들어버렸다. 라 피암마가 자랑하는 화염의 오러는 진즉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고, 그의 공격이 닿는다 할지라도 일루전이나 미라지였다. 그리고 하늘을 뒤덮는 강력한 불길. 펑펑 터지는 마법에, 지켜보는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얼마나 강력한 검사인지를 알기에, 그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믿을 수 없었다.
“이, 이익!”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발악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최후의 비기를 사용했다.
“죽어라!”
화륵.
콰콰콰쾅!
단전이 폭발했다.
안에서부터 폭발하는 힘으로 인해 한동안 마나를 상실하겠지만, 그는 이미 희생할 각오가 되었다.
콰르르르르릉.
엄청난 검격이 주변을 휩쓸었다.
프란체스코 두란테.
그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
마법도 아닌 검의 힘으로, 그는 세상을 뒤덮는 재앙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강민혁은 8서클에 오른 그 순간부터, 강화 문명에서도 자신의 적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천외의 힘.
심연의 악마가 차원의 균열에서 축적한 마나는, 강민혁을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경지로 인도했다.
“폭발.”
등급 외 마법.
그것으로 끝이었다.
강력한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세상을 모두 파괴해버릴 것만 같았던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그대로 휩쓸렸다.
콰콰쾅!
콰콰콰콰콰콰쾅!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육신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겨나갔고, 그의 비명은 폭발에 묻혔다.
툭.
바닥에 떨어진 한 자루의 검.
사람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들이 최강이라고 믿었던 사나이가, 너무도 허무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 순간.
사람들은 확신했다.
‘강민혁이야말로 세계 최강이다.’
마법 학계에서만 통용되는 말이 아니었다.
강화 문명 전체를 비교 대상에 둔다 할지라도, 이제는 저 괴물을 이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대로 무기를 내려놓는 강화 전사들.
그들은, 현실을 인정하고 패배를 시인했다.
참으로 덧없는 현실이었다.
강화 문명을 대표하는, 그리고 그토록 권력을 탐하며 한 시대를 호령하던 사내가 허무하게 죽었다.
만약 예전이었다면.
강민혁은 프란체스코 두란테와 포세이돈의 힘을 어떻게든 활용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8서클의 경지에 오르고, 심연의 진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런 것들은 의미가 없음을 알았다.
심연의 악마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한두 사람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프란체스코 두란테와 포세이돈을 인류를 뭉치는 상징으로써 사용하였다. 그들 개인의 힘을 활용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죽음으로서 생겨나는 충격이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앞으로 많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재앙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사람들에게 비참한 현실을 똑똑히 보여주어야만 한다.
‘시간이 얼마 없다.’
앞으로 반년 뒤.
마법 문명에서는 전쟁이 시작된다.
이쪽 세상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어떻게 적용될지 알 수 없으나, 이미 재앙의 스위치는 눌러졌다.
강민혁이 사람들을 보았다.
두려움으로 점철된 그들의 시선에, 강민혁이 말했다.
“앙투안 발라르, 프란체스코 두란테. 그들은 지금 인류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지도 모르고, 본인의 이득만을 위해서 인류에 해가 되는 행동을 했습니다. 벨라루스의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둘은 모두 방관자의 태도를 취했고, 인류의 안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행동했습니다. 부와 명예? 권력?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일단 살아야 그 모든 것을 충족할 수 있지 않습니까?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선을 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재앙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마법사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는데도 그는 같잖은 권력을 위해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선택.
그것은 발전하는 미래를 과거로 되돌리는 멍청한 것이었다.
마법사들을 짓밟음으로써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인류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죽음.
그리고 지금 시작될 하나의 계획으로 인해, 사람들은 이제 재앙이 닥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제가 1년간 무엇을 했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부터 보여드리겠습니다. 저는 심연(深滿)의 공간으로 넘어가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 세상을 재앙에 빠트린 원흉이 수도 없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성벽 위.
미리 준비한 카메라가 강민혁의 모습을 화면에 담았다.
이로써 모두가 지금의 현장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강민혁은 머릿속에 충만하게 차오르는 수많은 지식에서, 클리스만이 안배한 하나의 지식을 떠올렸다.
‘심연의 통로.’
그는 문을 여는 방법을 알아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일시적으로 심연의 악마를 현세에 불러들이는 것이 가능하다.
“보십시오. 현실이 무엇인지를.”
화악-
마나가 일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균열이 생겨났다.
마치 유리 조각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하늘의 파편이 우수수 떨어지며 검은 공간이 드러났다.
심연 너머.
이제는 악마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강민혁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심연의 악마를 상대할 생각이었다.
철컥.
철컥철컥.
마도형 골렘이 몸을 뒤덮었다.
마나를 끌어 올렸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심연 너머를 주시하자, 마침내 그 안에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크르르륵.]
심연의 악마.
재앙의 현실이,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