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 43. 공백의 일 년(3) >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예상과는 다른 전개였다.
강민혁의 공백.
그건 단순히 한 명의 빈자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강민혁은 파격적인 행보로 마법 학계를 부흥시킨 인물이고, 강화 전사들은 강민혁으로 인한 경계심에 어느 정도의 타협을 받아들였다. 그런 강민혁이 사라졌다면? 핵심 인물이 빠져버린 상황에서, 마법 학계는 강민혁의 생사가 불투명하다면 당연히 고개를 숙이고 타협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강민혁을 건드리자마자, 마법 학계가 벌떼같이 일어났다.
[라 피암마의 발언은 선을 넘었다. 강민혁은 인류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앙투안 발라르의 프랑스 마법 협회와 라 피암마를 비롯한 유럽 연합이 방관을 택했을 때, 강민혁은 병력을 이끌고 벨라루스의 생존자들을 구해냈다. 그런 강민혁을 악의적으로 깎아내리는 발언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며, 만약 지금의 태도를 유지한다면 영국 마법 협회는 기꺼이 전쟁을 준비할 것이다.]
영국 마법 협회.
그들이 시작이었다.
새로운 마법 연합의 구성원들이, 너도나도 목소리를 높이면서 강민혁에게 힘을 보태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들은 알았다.
이번 사건이 강민혁에게 은혜를 갚을 기회이기도 하지만, 마법 학계에는 강민혁의 그림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강민혁의 생사를 떠나서, 강민혁이라는 마법 학계를 대표하는 이름이 강화 전사들에게 짓밟혀서는 안 된다. 그것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가치였고, 그렇게 들고 일어난 마법 세력들의 숫자는 무려 수십 개에 달했다.
“...결국 끝까지 해보자는 건가.”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돌아가는 상황에 소름이 돋았다.
겨우 1년.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이 아니다.
마법 학계가 본격적으로 인정을 받은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강민혁은 벌써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해버렸다. 예전 같았다면, 라 피암마가 헛기침만 내뱉어도 마법 학계가 벌벌 떨면서 알아서 원하는 것을 갖다 바쳤다. 그러나 지금은 죽더라도 물러날 수 없다고 말하는 모습에, 강민혁이라는 단 한 사람으로 인해 많은 것이 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대단한 녀석이야.’
대체 어떤 마법을 부린 걸까.
강민혁은 마법사들의 자긍심에 불을 붙였고, 이젠 강민혁이 없더라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인정했다.
강민혁은 대단하다.
그렇기에 더욱, 지금의 타이밍을 놓칠 수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수하가 물었다.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알기에, 그의 물음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강민혁으로 인해 겨우 1년 만에 마법 학계는 변했어. 이대로 그들을 내버려 둔다면,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영영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러니 강민혁의 생사가 불분명한 지금, 우리는 고개를 치켜드는 그 녀석들의 머리를 짓밟을 필요성이 있어.”
“하지만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한국으로 직접 가기에는, 이동 간에 변수가 너무 많습니다.”
한국 정부.
그들은 타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비행기나 배와 같은 이동 수단을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결국 육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육로는 변수가 많다는 것이다. 강행군은 체력이 많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국경에 배치된 경비대를 넘어서려면 국가 간의 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여러모로 답답한 상황.
그러나,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이와 같은 상황에 적절한 답변을 알았다.
“굳이 가디언 마탑을 직접 공격할 필요는 없지.”
촤락-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그중, 이탈리아에 있는 하나의 세력에 핀을 꽂았다.
탁.
“바로 여기.”
세계 마법 연합 중 하나.
가디언 마탑을 따르겠다는 의사를 밝힌 이탈리아의 마탑.
벤투(vento)가,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레이더망에 들어왔다.
“세계 마법 연합이 울타리가 되어줄 수 없다는 것. 지금은 강민혁에 대한 감정에 목숨을 걸겠다는 무모함을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로 그 위험이 현실로 직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면 몇몇 세력들의 태도는 달라지겠지. 우리는 그 균열을 노리면 되는 거야. 그러니 지금 당장, 병력을 집결시켜.”
“알겠습니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주도권 싸움.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그간 누려온 강화 전사들의 권력을 마법사들에게 빼앗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명분이라는 것은 힘 있는 자에게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러한 이유로 범죄자에 동조한 이탈리아의 마탑 벤투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순순히 투항하고 죄를 받아들인다면 사람이 죽어 나가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겠지만, 지금의 태도를 고수한다면 우리로서도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다시 한번 경고한다. 투항하라. 강민혁이 과거에 어떠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한들, 현재의 죄를 용서받을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억지였다.
수많은 세력이 있지만, 이탈리아에 위치한 벤투를 콕 집어서 처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순식간에 병력이 집결되었다.
라 피암마는 유럽 연합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그들의 행보에 강화 전사 세력들이 힘을 보태주었다. 단단한 결속력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바람이 불어오는 상황에, 기존의 권력자들은 리 피암마와 마찬가지로 본인들의 위치를 잃고 싶지 않았다.
벤투.
그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다른 마탑들에게 지원을 요청할 겨를도 없이, 어느새 그들의 코앞에 적들의 병력이 나타났다.
“...우린 끝났어.”
마탑 너머.
시야를 가득 메우는 적들의 모습에, 벤투의 수장인 마우로 피오레(Mauro Fiore)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끝났다.
저 많은 병력을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다리가 덜덜 떨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기를 내걸고 투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가 투항해버리는 순간, 지난 1년간 마법 학계가 쌓은 모든 것을 단번에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건 싫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가치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30분 전,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행보에 가디언 마탑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곧바로 지원을 가겠습니다. 목숨을 걸라고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투쟁하는 것을 택한다면, 가디언 마탑은 벤투를 위해 목숨을 걸겠습니다.]
그들의 말.
든든했다.
예전처럼 강화 전사들의 눈치를 보는 삶으로 돌아가느니, 지금은 가디언 마탑의 저력을 믿고 싶었다.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나섰다.
수천의 강화 전사들.
그들이, 그의 발언에 힘을 실었다.
“투항하라. 투항하지 않는다면, 마탑을 무너트려서라도 너희들의 죄를 세상에 알릴 것이다.”
마법사들이 이를 악물었다.
불안함에 식은땀이 비처럼 쏟아 내렸지만, 이미 결단을 내린 이상 그들은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다.
결국.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히죽 웃었다.
“공격!”
“공격하라!”
타다다다닥.
강화 전사들이 파도처럼 마탑을 향해 밀려들었다. 수천의 강화 전사들이 뿜어내는 오라가 사방에서 번뜩였고, 그것은 곧 벤투의 몰락을 의미하고 있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1시간? 30분? 아니, 어쩌면 10분도 버티지 못할 수도 있다. 마법사가 아무리 수성에 강한 포지션이고 마법의 위력이 강해졌다지만, 이 정도의 압도적인 병력 차이는 감당할 방법이 없다.
이 자리에서 죽는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마법을 사용하려는 순간.
화악-
".........?!"
“뭐, 뭐지?”
하늘에서 빛이 일었다.
당황으로 얼록지는 사람들의 표정.
그리고 빛이 가라앉았을 때, 그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가, 강민혁?!”
강민혁.
바로, 그가 나타났다.
지금으로부터 1시간 전.
강민혁은 본래의 세계로 돌아왔다.
강민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이학범은 다급한 표정으로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강민혁을 다그쳤다.
“대체 그간 어디에 있었던 건가!”
다그침은 짧았다.
지금은 급박한 상황.
이학범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들었다.
자신의 공백.
그로 인해 마법 학계가 불안하게 흔들렸고,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극단적인 상황에 치달았다.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정보에, 가디언 마탑은 상대가 벤투라는 확신은 없었으나 전쟁이 곧 시작되리라는 사실은 알았다. 강민혁은 그러한 정보를 모두 들었다. 지난 1년간 벌어졌던 상황에, 강민혁은 잠시만 본인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1년이라.’
강민혁으로서는 시간이 이렇게 지났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전에는 없었던 상황이었고, 그래서 당황스러웠지만 라 피암마의 행보로 생기는 불안함은 없었다.
예상했었다.
강민혁은 프란체스코 두란테를 만나본 경험이 있었다. 그의 들끓는 호승심은 마법 학계와의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언제고 사건이 발발하리라는 사실은 충분히 예상이 가능했다. 문제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건이 터졌다는 것.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상황은 정말 돌이킬 수 없었겠지만, 마치 누군가가 짜놓은 각본처럼 강민혁은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났다.
운명일까?
아니, 필연일 것이다.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때를 기다렸다면 힘을 통합하는 데 상당히 번거로웠겠지만, 의도치 않게 1년이라는 공백은 오히려 기회를 만들어냈다. 만약에 1년 전의 자신이라면. 7서클이라는 경지로는 라 피암마를 비롯한 유럽 연합의 힘을 감당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법 학계에서도 최강의 경지에 오른 강민혁의 힘이라면, 지금의 상황을 충분히 반전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강민혁이 말했다.
“제가 복귀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마세요.”
“...설마 전쟁을 하겠다는 뜻인가?”
“예. 이번 기회에 진정으로 우리를 따르는 세력들을 걸러내고, 라 피암마라는 썩은 뿌리를 확실하게 제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애초에 ‘하나의 계획’이 있었는데, 이번 상황을 잘만 이용한다면 그 계획을 확실하게 부각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일하게 행동하다가 연합의 세력이 당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상황을 돌이킬 수 없어.”
“그럴 일은 없습니다.”
강민혁이 웃었다.
한때는 검사였던 사람.
그렇기에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힘을 잘 알았고, 그렇기에 승리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도 있었다.
“수성하는 상황에서, 제가 패배할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계획대로, 강민혁은 텔레포트 마법으로 현장에 나타났다.
강화 전사들의 표정이 당황으로 얼룩졌다.
강민혁.
그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애초에 계획은 강민혁의 부재로부터 시작되기에, 그들은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눈치를 살폈다. 계속 돌격해도 되는 일인 걸까. 혹시라도 후퇴 명령이 떨어질까 봐 망설이는 그들의 기색에,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강민혁....!’
1년간의 공백.
그가 하필이면 지금 나타났다.
혹시라도 자신을 속인 걸까?
그렇다면 이건 함정일 수도 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지만,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검을 뽑은 이상 뭐라도 썰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낙장불입(落張不入).
지금부터는 자존심 싸움이다.
‘아니, 오히려 잘 됐어.’
사실 계속 찜찜했던 부분이 있었다.
강민혁의 부재로 손쉽게 승리할 기회는 얻었으나, 왠지 강민혁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7서클 마법? 강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강민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극심한 피해가 예상되기에 망설였던 것이지, 자신의 힘은 그보다 강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공격하라!”
바락 소리를 지르는 프란체스코 두란테.
목에 핏대를 세우는 그의 모습에, 강화 전사들의 망설임이 사라졌다.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위용이었지만, 그 모든 것들은 강민혁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단 한 방.’
강민혁은 무엇이 중요한지 알았다.
압도적인 차이.
그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의 계획이 진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머리가 활짝 열렸다.
분뇌로 나누어진 두뇌가 하나의 마법을 동시에 캐스팅했고, 이윽고 폭발적인 마나가 분출되었다.
“퓨리 오브 더 헤븐(Fury Of The Heaven).”
8서클 마법.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몰락하던 순간, 가브리엘 칼데론이 나타나 시전했던 하늘의 분노를 표현한 마법.
그것이 작렬했다.
하늘이 번뜩이는 순간,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콰르르릉.
콰콰쾅!
콰콰콰콰콰콰콰쾅!
수십 발의 벼락이 땅바닥에 작렬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던 인간들이 그대로 소멸되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수백 명의 강화 전사들.
인간의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앞으로 달려나가던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게 무슨.”
8서클.
천외의 경지.
그제야,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