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181화 (181/197)

180화.  < 43. 공백의 일 년 >

이학범은 최근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새로운 세계 마법 연합.

가디언 마탑이 마법 학계의 정점에 오르면서, 예전과는 다르게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

그러나 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이학범은 착실하게 맡은 일을 모두 처리했다. 자신으로 인해 마법 학계가 발전한다고 생각하자, 매일 밤을 지새우는 현실이 마냥 기쁘기만 했다. 그날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마탑 업무로 밤을 새운 상태였는데, 낮에 일정이 있어서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좋네.”

창밖의 햇살.

잠을 이겨내기 위한 커피 한잔.

정신은 피곤함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이학범은 몸을 무겁게 하는 이 감각이 좋았다.

그건 자신이 열심히 살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가디언 마탑은 쑥쑥 성장하고 있었고, 예전에는 상상으로만 떠올리던 현실이 실제가 되어간다는 사실에 피곤한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강민혁과의 만남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주었다.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던 고리타분한 학자가, 이제는 말 한마디에 마법 학계를 발칵 뒤집었다. 그러한 권력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힘이 생김으로써 마법 학계를 이상적인 방향으로 인도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학범은 커피를 다 마시고서야, 호출기를 눌렀다.

삑-

“명호야.”

[말씀하십시오.]

강명호는 이학범의 개인 수행비서였다.

원래는 마법 학과의 제자였으나, 가디언 마탑을 창설하는 과정에서 이학범에게 미래를 맡겼다.

“강민혁 마탑주는?”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1시간 뒤에 일정이 시작되는지라 미리 연락을 드렸는데, 무엇을 하시는 모양인지 아무런 답장도 받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혹시라도 수련에 몰두하느라 일정을 잊으실 수도 있으니, 제가 직접 강민혁 마탑주님의 저택에 다녀올까요?]

“흐음, 강민혁 마탑주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 네 말도 일리가 있으니, 늦지 않게 다녀오거라.”

[예.]

연락을 끊으면서도 이학범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강민혁은 가디언 마탑을 세우면서부터 거처를 옮겼다. 가끔 예전에 살던 저택을 오가기는 했지만, 오늘과 같은 중요 행사가 있는 날에는 늦지 않도록 신경을 써주었다. 그런데 약속 1시간 전에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니. 평소 강민혁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래도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이학범은, 강명호로부터 강민혁을 만나지 못했다는 대답을 받았다.

“대체 어딜 간 거지?”

강민혁은 간혹 예측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인다.

문제는 약속을 앞두고는 무조건 언질을 주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강민혁의 부재로 인한 문제를 그가 처리해야만 했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강민혁을 믿었다.

그의 부재는 특별한 사정으로 인한 것일 터.

평소에 돈독한 신뢰 관계를 맺었기에, 이학범은 크게 의심하지 않고 그의 빈자리를 해결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이학범은 예상하지 못했다.

강민혁의 부재.

금방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던 상황이, 상상 이상으로 길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강화 문명.

마법 문명.

두 세계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그것은 정확한 기준이라는 것이 없다.

그래도 이제까지는 강민혁이 마법 문명으로 넘어갔을 때, 강화 문명의 시간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강민혁은 마법 문명에서 며칠 보내지 않았는데, 강화 문명은 어느새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강민혁의 부재?!]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강민혁!]

[줄줄이 취소되는 행사, 강민혁에게 대체 무슨 일이?]

기사가 연달아 쏟아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핑계로 행사를 취소할 수 있었다.

문제는 강민혁은 세계 마법 연합의 수장으로서 얼굴을 비출 일이 많았고, 그때마다 행사가 취소되다 보니 사람들로서는 말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강민혁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냐는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오르자, 이학범은 일단 특단의 대책을 내렸다.

[가디언 마탑에서 알려드립니다. 강민혁 마탑주는 갑작스러운 깨달음으로 인해, 폐관 수련에 돌입한 상태입니다. 그로 인해 주요 행사들이 취소된 점에 대해서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폐관 수련이 끝나는 대로, 직접 해명하고 사죄하는 자리를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폐관 수련.

좋은 명분이었다.

강민혁 정도 되는 마법사가 성장을 위해 수련을 한다는데, 그것 가지고 따져 물을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급한 불은 진화되었다.

폐관 수련이라는 명분에 강민혁은 얼굴을 비추지 않아도 되었고, 이학범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강민혁의 빈자리를 메워주었다. 다행히도 가디언 마탑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유재명도 적극적으로 이학범을 도왔고, 강민혁이 없다고는 하지만 가디언 마탑이 흔들릴 일은 없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면서부터 문제가 점점 생겨났다.

폐관 수련이 길어도 너무 길었다.

강민혁은 상당한 위치에 오른 인물이고, 그의 공백은 다른 사람들과는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반년의 공백이라니.

사람들은 다시 한번 강민혁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했다. 아무리 7서클이라는 대단한 경지에 오른 강민혁이라지만, 6개월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의문을 무마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그러다, 결국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촌역 근처에서 레드 게이트가 생성되다!]

게이트.

그건, 피할 수 없는 시련이었다.

가디언 마탑의 대응은 빨랐다.

S급 몬스터가 생성되는 레드 게이트는 재앙이라 불릴 만한 것이었지만, 상대에 따라 결과는 다르다.

“빠르게 움직여!"

“플랜 D를 발동해!”

플랜 D.

비상 대응 체계.

마탑의 마법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잡았고, 밀려오는 몬스터들을 향해 마법을 사용하였다.

“인페르노.”

“스파이럴 토네이도.”

“번 플레어.”

화륵, 화르르르르륵.

콰콰쾅!

키에에에엑!

강력한 화력에 몬스터들이 일제히 휩쓸렸다. 레드 게이트에서는 무려 수천 마리의 몬스터가 나타났지만, 마탑의 마법사들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아웃브레이크. 세상을 발칵 뒤집었던 재앙을 경험한 이후로, 사람들에게 이 정도 규모의 공격은 감당하지 못할 현실이 아니었다. 그간 재앙에 대비한 훈련을 착실하게 진행했기에, 강민혁이 없다 할지라도 무너질 일은 없었다.

그리고.

“어디서 감히!”

“모조리 쓸어주마, 씨 블라스트.”

콰콰콸!

유재명과 천호명.

가디언 마탑의 대마법사들이 나타나자 마탑은 레드 게이트로도 뚫지 못하는 철옹성(鐵甕城)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재앙 대응 상황에 걸맞은 대처가 이루어졌다. 강민혁이 새로운 마법 연합을 창설한 이후로 1년의 시간이 지났고, 재앙 앞에서는 마법사와 강화 전사의 구분이 사라졌다. 그렇기에 가디언 마탑의 위험에 수호문과 같은 강화 전사 단체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디펜더 연합은 가디언 마탑의 수성을 도와주었다면, 그들은 레드 게이트를 직접 처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상황이 반전되었다.

수호문이 전장에 나타나자, 가디언 마탑도 문을 활짝 열고 반격에 나섰다.

“공격하라!”

“반격이다!”

콰콰쾅!

화르르르르륵.

전투의 열기는 대단했다.

아무리 준비가 잘 되었다지만, 수천 마리의 몬스터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출혈이 없을 수는 없다.

한 사람이 죽으면.

그 대가로 수십의 몬스터가 죽었다.

인간의 반격은 거셌고, 레드 게이트는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그렇게 끝난 상황.

사람들은 성공리에 레드 게이트를 진압했다는 사실에, 너도나도 기쁜 마음으로 축배를 들었다.

[이촌역에서 발생한 레드 게이트가 상황 발생 3시간 만에 진압되었습니다. 이는 매우 고무적인 성과이며, 그간의 훈련이 효과가 있었다는 사실이 실전에서 증명되었습니다. 한편, 일부의 사람들은 레드 게이트 상황이 발생했는데도 강민혁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을 지적하며,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불똥이 튀었다.

레드 게이트는 재앙이다.

잘 막았다 할지라도, 여러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상황에서 마탑주라는 사람은 보이지도 않았다.

이상했다.

폐관 수련?

이제는 그걸 믿는 사람은 없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다는 의심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그것은 이윽고 사망설에 도달하고 말았다.

[공백의 일 년. 그것은 어찌면, 강민혁의 죽음으로 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가설.

그것이, 평화로웠던 분위기에 불을 붙였다.

유럽 강화 전사 연합.

그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의 수장 격인 라 피암마의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수십의 구성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부른 이유는 바로 강민혁의 공백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저도 단순히 의심하는 정도였습니다만, 레드 게이트 사건 이후로 그에게 정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맞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강민혁 같은 사람이 레드 게이트 상황을 외면했을 리가 없습니다.”

다들 동조했다.

강민혁.

강화 전사들에게는 공공의 적이라 불리지만, 그들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있다.

바로 강민혁이 세계 평화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것.

강민혁이 아웃브레이크를 저지하고 재앙 대응 체계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지난 1년간 벌어진 숱한 사건들의 피해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사건은 확신으로 이어졌다. 그 누구보다도 세상의 평화를 외치던 강민혁이, 가디언 마탑의 위험마저 외면한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폐관 수련.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고 수련에 몰두하는 그것은, 정말로 완전히 연락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특별한 상황에 연락할 수단은 당연히 있다.

그리고 레드 게이트는, 강민혁이 어떤 상황이든 간에 반드시 나서야만 하는 그런 문제였다.

그런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이에나와도 같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강민혁의 공백이 기회로 직결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말했다.

“아웃브레이크 현상으로 인류가 큰 피해를 입는 바람에, 지난 1년간 강화 전사들은 강민혁의 행보에 동조해주었습니다. 진정한 위험 앞에서는 잠시 이권 다툼을 내려놓을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법 연합의 힘이 너무나도 강해졌습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의 비위를 맞추던 것들이, 지금은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우리와 맞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못마땅했다.

강화 문명.

세상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강화 전사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화 전사들의 권력은 타당한 것이라 생각하건만, 마법 연합이 지금 그걸 홀랑 집어삼키려 했다.

용납할 수 없는 일.

하지만 그동안은 자제했다.

그만큼 앙투안 발라르의 사건은 충격적이었고, 당분간은 재앙을 대비할 필요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훈련은 충분했고, 강민혁은 사라졌다.

이건 기회였다.

회담을 소집한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그간 꾹꾹 눌러두었던 호승심을 오랜만에 표출했다.

“이제 슬슬 판을 뒤집을 차례입니다. 그간 이 세상은 강화 전사들로 인해 올바르게 유지되고 있었지만, 강민혁을 필두로 마법사들이 겨우 1년 남짓 활약한 것으로 사람들은 마법사들을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참 못마땅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현실을 바로잡을 필요성이 있습니다. 강화 전사들은 힘이 없기에 마법사들을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평화를 위해 타협을 택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잠시 양보해두었던 우리의 권리를 다시 가져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동의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마법 학계는 예전과는 달리 고분고분하게 나오지 않을 겁니다.”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웃었다.

강민혁이 있었다면.

두 세력의 충돌은 엄청난 출혈로 직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민혁이 사라진 마법 학계라면, 그건 단순히 한 사람의 부재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강민혁은 상징적인 인물.

구심점을 잃은 세력은, 와르르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

“일단 한번 건드려볼 생각입니다. 강민혁에게 정말 문제가 생겼는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그때는 다시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하겠지요.”

아웃브레이크.

그로 인해 1년간 눌러두었던 욕망들이, 마침내 본격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