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180화 (180/197)

179화.  < 42. 격동하는 세계(3) >

며칠 전.

바브루이스크에서 벌어진 전투 영상을 확인한 엘리샤는, 순간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홍염(紅德)의 마법을 사용하는 거지?”

강민혁.

영상 속의 그는 분명히 홍염의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숙련도였다. 처음에는 화염을 기반으로 한 다른 마법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정령 빙의와 더불어 세상을 뒤덮는 강력한 화염은 홍염의 마법이 분명했다.

말이 되질 않았다.

홍염의 마법은 일인전승으로 내려오는 것이고, 자신을 제외한다면 딱 한사람밖에 알지 못한다.

설마 클리스만이 알려준 걸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클리스만과 강민혁이라는 인물의 연결고리가 전혀 없는 데다, 무엇보다도 엘리샤가 경험한 클리스만은 남의 비기를 함부로 퍼트리고 다닐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본인이 아니라면 클리스만이 유포한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애써 현실을 부정하던 엘리샤는, 강민혁이 기자들 앞에서 발표한 내용을 확인하고는 클리스만과의 연결고리가 있음을 확신했다.

강민혁.

그가 발표한 것은 마법 지식만이 아니었다.

“장벽 너머에서 저는 클리스만을 만났습니다. 그는 제게 수호의 검을 전수해주었고, 그의 부탁에 따라 수호 검법 또한 세상에 공개하겠습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정의(正義)를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 클리스만의 의지에 따라 옳은 일에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강민혁은 단순히 클리스만의 것만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수호 검법의 핵심 기술도 공개해버렸다.

검과 마법.

지금은 어떤 힘이든, 인류가 강해질 방법이 필요하다. 수호 검법은 초보자가 익히기에는 위험성이 상당한 기술이지만, 강민혁은 벤자민 케인즈를 비난한 것처럼 선택은 사람들에게 맡겼다. 기술을 공개하면서 위험성에 대해서는 경고했으니, 그걸 감안하고 선택하는 것은 사람들의 몫이다.

홍염의 마법.

수호 검법.

엘리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그녀로서는, 하던 일을 모두 중단하고 강민혁이 머물고 있다는 비쳅스크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샤의 표정은 복잡했다.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던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실 지금 상당히 혼란스러워요. 알다시피 홍염의 마법은 대대로 내려오는 일인전승의 비기에요. 저는 그러한 룰을 어기고 클리스만에게 홍염의 마법을 알려주었고, 얼마 전에 강민혁님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홍염의 마법을 사용했어요. 제가 생각하는 게 맞나요? 클리스만은 어째서, 홍염의 마법과 수호 검법을 강민혁님에게 가르쳐주었던 거죠?”

설명이 필요했다.

엘리샤가 경험했던 클리스만은, 본인이 직접 공개하면 공개했지 타인을 대리인으로 내세우진 않았다.

‘엘리샤.'

강민혁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클리스만의 계획에 마법사로서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러나 자신으로 인해 새로운 인생을 찾은 인물.

엘리샤는 강민혁에게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녀를 여자로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꽉 막힌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던 그녀가 클리스만과 자신 사이에서 혼란한 삶을 살았다. 만약 자신과의 연결고리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승승장구하면서 7서클의 경지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8서클의 비밀을 알고 있는 화이트 캐슬의 소속이기에, 그녀에게는 밝은 미래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지.’

마나의 상실.

강민혁은 엘리샤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다.

끝끝내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마나를 잃은 사건은, 엘리샤를 전혀 다른 삶으로 인도했다.

그래서 고민했다.

엘리샤가 찾아온다면 뭐라고 말할지.

이 세상에 한 명쯤은, 자신의 비밀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야.”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클리스만과 자신이 만난 최초의 시작점부터, 둘과의 관계로 인해서 생겨난 여러 일에 대해서.

강민혁은 느리지만 차분하게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다.

상대가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엘리샤는 적어도 진실을 알 권리는 있다고 생각했다. 강민혁은 이번 마법 혁명을 일으키면서 많은 것을 내려놓았고, 자신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 엘리샤를 위해 ‘진실’을 말해주었다.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엘리샤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처음에는 말도 되지 않는다며 듣지 않으려던 그녀가, 둘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오면서부터는 체념한 반응을 보였다.

결국.

“이러면 믿을 수밖에 없잖아.”

엘리샤.

그녀가 강민혁, 자신이 클리스만이라고 기억하는 사람을 보았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분명히 친해졌다고 생각했던 클리스만이, 어느 때만 되면 쌀쌀하게 굴었던 모습이 말이다.

“그런데 왜 내게 진실을 말해주는 거지? 네가 클리스만이라는 사실을 밝혀서 좋을 것이 없잖아.”

다른 차원의 인간.

문제가 복잡했다.

강민혁도 그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단 한 사람 정도는 괜찮다고 판단했다.

“내가 다른 차원의 인간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문제가 복잡해지겠지. 사람들은 내 진의를 의심할 테고, 증명하느라고 한참의 시간을 소비하게 될 거야. 그런데도 네게 진실을 말해준 이유는, 이 세상에 나와 클리스만의 진실을 아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전쟁이 시작되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나와 클리스만은 몸을 사릴 생각이 없고, 그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어. 그러니, 우리가 모두 죽는다면 클리스만이라는 사람의 인생을 기억해줄 사람이 한 명은 필요하잖아. 그가 얼마나 오랜 세월 이 세상을 위해 헌신했고 노력했는지를, 나는 두 사람을 모두 경험한 네가 기억해주기를 바라.”

클리스만.

말이 2000년이지, 그가 살아온 삶은 상당한 고통을 동반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내주었고, 본인은 음지에서 남들 모르게 목숨을 걸었다.

안타까운 삶이었다.

가족을 잃은 후로부터 그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상실했고, 오로지 복수를 위해 짐승처럼 살았다.

그래서 말했다.

어차피 진실을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클리스만의 정체를 세상에 공개해도 문제가 발생될 것은 없겠지만, 강민혁은 그가 원하는 것처럼 진실을 보호해주었다. 전쟁이 모두 끝나고. 그때는 엘리샤에 의해 진실이 공개될 것이다. 평화가 찾아온 세상에서 밝혀지는 진실은 클리스만으로서도 싫어하지 않을 테고,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을 구하러 왔던 엘리샤라면 믿을만하다고 판단했다.

속이 시원했다.

그간 정말 답답했었다.

엘리샤라는 인간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그녀를 농락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엘리샤.

그녀는 강민혁과 클리스만을 동시에 경험한 인간이지 않은가.

엘리샤가 말했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 만약 세상이 평화를 되찾는다면, 그리고 내가 그때까지도 살아남았다면 너와 클리스만의 일을 세상에 알려줄게. 그런데 앞으로의 계획은 뭐야?”

그녀는 질문을 삼켰다.

본인도 복잡할 것이다.

그런데 강민혁과 클리스만이 겪었을 고통을 알기에, 되묻는 질문으로 상대를 괴롭히지 않았다.

이래서 그녀를 택했다.

모든 것이 조심스러울 때도 수호 검법을 전수해주었던 것처럼, 강민혁은 엘리샤라는 사람을 믿었다.

“계획이라.”

있다.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 계획이.

“곧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생각이야. 그리고, 다시 돌아오기 전에 그쪽에서 먼저 전쟁을 시작할 거고.”

강민혁의 눈빛이 변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강민혁은 엘리샤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살아있어. 절대, 먼저 죽는 그런 위험한 일은 벌이지 말고. 이제 네가 아니라면, 나와 클리스만을 추억할 사람이 없잖아?”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강민혁도 엘리샤도.

곧 닥쳐올 시련에, 죽음이라는 단어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엘리샤가 떠나고.

강민혁은 뜻밖의 방문자를 만났다.

“너 정말 당돌한 녀석이구나?”

메리 그레이스(Mary Grace).

바로 블랙캣의 리더이자, 8서클 마법사이기도 한 그녀가 강민혁을 찾아왔다.

“용건부터 말씀하시죠.”

“용건이랄 게 있나. 가브리엘이 엄청나게 분노하고 있을 모습에, 어떤 녀석이 화이트 캐슬이 통제하고 있던 지식을 세상에 까발렸는 지 확인하려고 왔지. 재밌네, 재밌어. 깔깔깔깔.”

그녀는 정말 마녀처럼 웃었다.

마법사는 로브라는 편견과는 다르게,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검은색 수트와도 같은 것을 쫙 빼입었다.

예쁜 외모.

아름다운 몸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실제로는 50년 이상의 세월을 살았으며, 그 이상의 나이일지도 모른다고 알려진 사람이 바로 메리 그레이스였다. 사실 가브리엘 칼데론과 메리 그레이스는 어느 정도 3대 세력의 수장으로서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그레이 로브는 구성원부터 수장까지 정확한 정보가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그레이 로브의 수장이 본인의 힘을 발휘했을 때, 세상은 8서클 마법사가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통제되어 있던 지식이라.’

메리 그레이스의 말.

그것에서 진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강민혁의 예상대로, 화이트 캐슬은 심연의 악마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메리 그레이스도 진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법의 3대 세력은 모종의 거래가 있는 것일까?

새로운 정보에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을 때, 메리 그레이스는 속을 알겠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어. 어차피 가만히 기다리다 보면 그 능구렁이의 속을 알게 될 테니까. 그나저나 내가 너를 위해 선물을 하나 준비했어.”

“선물이요?”

“그래. 기대해도 좋아.”

그녀는 신기한 인물이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메리 그레이스는, 그렇게 선물을 예고하고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날 저녁.

메리 그레이스의 선물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강민혁의 기자회견 이후.

사실 모두가 강민혁의 말을 신뢰했던 것은 아니다.

마법 지식이야 확실하지만, 마나의 결정체가 정말 그런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따라붙었다.

그런데.

[나 메리 그레이스는 과거에 심연의 악마와 싸움을 벌였던 적이 있다. 그때는 그것이 심연의 악마라는 사실을 몰랐고, 전투 끝에 얻은 마나의 결정체를 통해 8서클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강민혁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내가, 직접 그것을 경험한 산증인이니까.]

메리 그레이스의 증언.

그것이 그렇지 않아도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메리 그레이스 정도의 인물이 사실이라고 말한다면, 마나의 결정체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 터.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강민혁이 공개한 마법 지식과 검술을 빠르게 습득하면서 성장하였고, 이번만큼은 장벽 너머의 악을 소탕하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끓어오르는 전쟁의 분위기는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인류는 반년 뒤에 있을 전쟁을 받아 들인 상태였고, 어린아이들조차도 전쟁에 도움이 되겠다며 각자의 방식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의문이 제기되기는 했다.

[그렇다면 지난번에 쓰러트린 심연의 악마에서 나온 마나의 결정체는 어떻게 됐지?]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사건.

심연의 악마는 인간에게 쓰러졌지만, 마나의 결정체가 발견되었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화이트 캐슬이 몰래 가져간 걸까?

의문은 있었으나, 화이트 캐슬은 해명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의 질문이 따라붙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힘이 있었다.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강민혁은 이제,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할 때임을 알았다.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전쟁이 시작되었겠지. 그러니, 강화 문명에서도 반드시 결판을 내야 해.’

때가 왔다.

이제는 자신의 역할을 행할 차례.

돌아가는 대로, 강화 문명을 한바탕 뒤엎어버릴 것이다.

화악-

하얗게 일어나는 불빛에, 강민혁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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