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 42. 격동하는 세계 >
조나단 랜돌프는 강민혁의 위치를 수소문한 결과, 현재 비쳅스크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건 기회였다.
아직은 강민혁에 대한 비난의 여론이 남아있는 상태라, 남들보다 먼저 선수를 칠 수 있는 타이밍은 지금밖에 없었다. 영입으로 인해 잡음이 생기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8서클 마법사의 영입은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조나단 랜돌프는 곧바로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예상치도 못한 난관에 부닥쳤다.
“큰일 났습니다. 지금 비쳅스크로 향하는 텔레포트 마법진에 예약자가 밀려서, 앞으로 하루는 꼬박 기다려야 이동할 수 있다고 합니다."
“뭐라고?”
조나단 랜돌프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비쳅스크는 절대 텔레포트 이용자가 몰려들 만한 지역이 아니다. 장벽이 형성된 ‘블랙 라인’은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격하게 제한하기 때문에, 타당한 이유가 없다면 텔레포트의 사용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몰렸겠는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에, 조나단 랜돌프는 수하에게 바락 소리쳤다.
“당장 인맥을 동원해서 그 명단을 가져와. 어떤 녀석들이 비쳅스크로 가려는지 확인해야겠어.”
“알겠습니다.”
수하가 황급히 움직였다.
이윽고.
명단을 확인한 조나단 랜돌프는,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빌 로저스]
[파블로 데르키]
[세르히오 알바레스]
.
.
.
쭉 이어진 이름들.
하나 같이 익숙했다.
빌 로저스(Bill Rogers)는 미국의 유명한 마법 세력을 이끄는 수장이었고, 파블로 데르키(Pablo Derqui)도 다르지 않았다. 알만한 이름들. 배리어와 마찬가지로 마법의 3대 세력보다는 한 끗발 떨어진다고 평가받는 세력의 수장들이, 벌써 냄새를 맡고 텔레포트를 신청했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이들이 명단에 벌써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먼저 비쳅스크에 도착해서 강민혁과 접촉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일 터. 조나단 랜돌프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래도 나름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그만큼 8서클 마법사의 희소성이 대단하다는 것이었고, 무소속이라는 조건은 강민혁의 가치를 대폭 상승시켰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
조나단 랜돌프가 소리쳤다.
“비쳅스크가 아니라면 그 주변 지역의 텔레포트라도 신청해, 어서!”
“예!”
조나단 랜돌프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가장 가까운 포인트는 이미 예약자가 밀린 상태였고, 인맥을 사용해서야 겨우 폴라츠크(Polatsk)의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부터는 도보로 이동해야만 했는데, 도착하자마자 경쟁자들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이, 이런!”
눈이 팽팽 돌았다.
강민혁의 영입을 자신한 것은 정말 안일한 마음가짐이었다. 3대 세력 외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8서클 마법사이니, 이 정도의 열기를 예상했어야만 했다. 조나단 랜돌프는 바락바락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이동 수단을 확보하였고, 경주를 하는 것처럼 빠르게 비쳅스크로 이동했다.
그곳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검문소에서부터 보이는 마법사들의 행렬.
그들이 모두 경쟁자라는 생각이 들자, 조나단 랜돌프에게는 마음의 여유가 조금도 허락되지 않는다.
‘반드시, 반드시 우리가 강민혁을 쟁취해야 해.’
“통과!”
검문소를 통과했다.
원래의 계획은 숙소를 잡고 간단하게 점심을 즐길 생각이었으나, 지금은 계획이 전면 수정되었다.
“빨리, 빨리 강민혁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강민혁.
지금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그를 만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조나단 랜돌프는 강민혁과 연락이 닿았다.
혹시라도 이미 다른 세력과 얘기가 끝났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만남 요청을 받아주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앉으시죠.”
상대는 절대적인 갑(甲).
조나단 랜돌프의 태도는 공손했다.
칼자루를 상대가 쥐고 있는 상황에서, 같잖은 권력으로 목에 힘을 세울 만큼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왜 저를 보자고 하셨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 바브루이스크의 장벽을 무너트리는 모습을 보고, 저는 마법사로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강민혁님을 배리어로 모시고 싶습니다. 배리어는 항상 강민혁님과 같은 뛰어난 마법사와 함께 하기를 바라며, 저희도 강민혁님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벌어질 재앙에 큰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그러니 배리어로 오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강민혁님이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지를 알기에 섣불리 조건을 제시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만약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맞추어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노골적인 제안이었다.
그리고, 본인의 위치를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배리어가 아무리 3대 세력 바로 밑이라 할지라도, 강민혁이 이 정도로 관심을 받는 상황에서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조나단 랜돌프는 비쳅스크로 향하는 길에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였고, 강민혁을 마주하는 지금은 자신의 위치를 내려놓고 최대한 비위를 맞추는 선택을 내렸다.
8서클 마법사.
그를 영입함으로써 얻는 효과는 대단하다.
배리어의 위상이 단번에 상승할 뿐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 8서클의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다.
조나단 랜돌프는 슬쩍 강민혁의 눈치를 보았다.
제발 혹하길 바랐지만, 상대는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강민혁이 말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이번에 벌어질 전쟁에 인류의 명운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저를 영입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는 겁니까? 방금 말씀하신 조건은 매우 좋습니다만, 그런 조건을 제시한 세력은 배리어 뿐만이 아닙니다. 어제저녁부터 지금까지. 저를 찾은 수많은 마법사들이 있었습니다. 본인의 세력을 치켜세우면서도 저에게 한자리를 약속하던 그 사람들은, 모두 웬만한 사람이라면 혹할 만한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저에게 권력을 내어줌으로써, 세력 내에서 조나단 랜돌프님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 줄어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조나단 랜돌프의 제안.
특별하지 않았다.
마법사들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고, 그들은 현실에 걸맞은 제안을 강민혁에게 해왔다.
결과는 모두 거절.
진심을 묻는 강민혁의 반응에, 조나단 랜돌프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의미?
있다.
아주 큰 의미가 있기에, 모두가 강민혁에게 달라붙었다.
“바브루이스크의 장벽이 무너진 것은 의미가 매우 큽니다. 장벽이 견고하지 않다는 사실에, 결국 강민혁님이 의도한 대로 반년 뒤면 전쟁이 시작되겠지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희로서는 아직 인류의 멸망이 피부로 와닿지는 않습니다. 현실을 보았기에 힘을 보태겠지만, 한 세력을 이끄는 저 같은 수장으로서는 전쟁 이후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
그것을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만 한다.
만약 승리한다고 가정했을 때, 전쟁에 얼마나 큰 피해를 받았느냐가 전쟁 이후의 판도를 결정한다.
“강민혁님을 영입해서 배리어의 위상이 상승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배리어의 마법사들을 지켜줄 강민혁님의 힘입니다. 심연의 악마가 그토록 강력한 괴물이라면, 8서클 마법사의 존재 유무에 따라 피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그래서 강민혁님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벌어질 전쟁에서, 저희는 전쟁의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전쟁은 아직 미래의 일이었다.
그것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각 세력의 수장들은 조금이라도 본인들을 보호할 힘을 확보하길 바랐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류를 위해 모든 것을 걸 수도 있겠지만, 수많은 식솔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수장들은 항상 미래를 생각해야만 한다. 그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간절한 조나단 랜돌프의 모습에, 강민혁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였구나.’
이번 사건.
전쟁은 현실이 되었다.
조나단 랜돌프와 같은 사람들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 못하기에, 지금 이렇듯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로서도 전쟁이 싫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떻게든 인류에게 닥친 재앙에서 살아남고자 발악하는 모습에, 강민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의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대신,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조나단 랜돌프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거절이라니.
결국 의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실망한 기색을 보이며 절망하던 그는, 곧바로 이어진 강민혁의 발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려는 것은 8서클을 형성하는 방법입니다.”
“...예?!”
8서클.
그 단어에, 조나단 랜돌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민혁과의 대화를 끝낸 조나단 랜돌프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1년 전만 하더라도 저는 7서클 마법사였습니다. 비쳅스크의 정찰대에서 활약한 영상이 있으니, 그것을 보시면 제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1년 만에 8서클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심연의 악마. 그것을 처리하고 얻은 마나의 결정체를 흡수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전쟁은 단순히 실(失)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전쟁의 선두에서 심연의 악마를 쓰러트리고 결정체를 쟁취한다면, 배리어는 8서클 마법사를 보유한 세력으로 거듭나게 될 겁니다.”
황당한 소리였다.
하지만, 진지한 표정의 강민혁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것이 마냥 헛소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했다.
대체 왜 이런 대단한 비밀을 알려주냐는 말에, 강민혁의 대답은 이랬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제가 원하는 목표는 몬스터들을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8서클의 진실을 감추는 것보다는,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피식, 웃었다.
강민혁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장벽을 무너트림으로써 위험성을 세상에 증명하더니, 이제는 대단한 비밀을 아무렇지도 않게 공개했다.
자신으로서는 강민혁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8서클의 경지는 마법사들이 바라는 평생의 염원이고, 심연의 악마가 그 발판이 된다면 전쟁의 의미는 달라진다. 가치가 있는 싸움.
인류의 위기를 막아낼 뿐만 아니라, 20년간 그리도 바라던 8서클의 경지에 오르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참으로 영리했다.
강민혁이 던진 미끼는 너무나도 매력적이라, 조나단 랜돌프는 결단을 내렸다.
마침 수하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대화는 잘 끝내셨습니까?”
“아주 잘 끝냈지.”
“헉. 그럼 강민혁이 배리어에 입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겁니까?”
“아니,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정보를 얻었지. 그러니 곧바로 오스트리아로 복귀하자. 앞으로 전쟁을 준비하려면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거든.”
걸음을 옮겼다.
전쟁.
앞으로 그것은, 조나단 랜돌프와 같은 ‘8서클’을 바라보는 마법사들의 목표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강민혁의 숙소에서 막 벗어나려던 조나단 랜돌프는, 마법사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모세의 기적.
그리고 그 중심에는.
“화이트 캐슬!”
바람에 펄럭이는 하얀 로브.
그들도, 강민혁을 만나기 위해 비쳅스크를 방문했다.
당근과 채찍.
사람들을 북돋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강민혁은 장벽을 무너트리는 채찍질을 가하더니, 곧바로 8서클의 실마리라는 달콤한 당근을 제시했다.
‘이로써 마법사들은 전쟁에 의욕을 보이겠지.’
강제와 자의는 다르다.
등을 떠밀리듯이 억지로 나섰던 사람들이, 이제는 마나의 결정체를 확보하기 위해 눈을 붉힐 터.
그래서 비밀을 공개했다.
사실 8서클의 실마리는 자신만 알고 있어서 좋을 것이 없다. 만약 강민혁이 부와 명예, 권력 같은 것을 바랐다면, 비밀은 많으면 많을 수록 강민혁의 힘이 된다. 하지만 강민혁이 바라는 것은 인류를 위한 일이었기에, 8서클의 실마리는 공개해야 옳은 것이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의욕을 북돋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추가로 8서클 마법사가 탄생하면 그것만으로도 좋다.
강민혁을 찾는 마법사들.
그들에게 모두 8서클의 실마리를 공개했다.
얼굴 가득 미소를 떠올리면서 물러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앞으로 전쟁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열의가 보였다.
‘이제 중요한 건 화이트 캐슬인가.’
화이트 캐슬.
클리스만과의 대화에서 강민혁은 그들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화이트 캐슬의 리더인 가브리엘 칼데론은, 마나의 결정체를 흡수해서 8서클에 오른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간의 행보와는 부합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화이트 캐슬은 가장 선두에서 인류를 위해 앞장서던 세력인데, 심연의 악마의 존재와 결정체에 관한 그 어떤 것도 밝히지 않았다. 그들의 의도가 의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포인트였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인류의 평화를 바랐다면, 심연의 악마에 대해서는 경고해야만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앞으로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일단 화이트 캐슬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정리해야만 한다.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클리스만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원했던 건지.
강민혁은 마법사들의 만남을 받아들이며, 화이트 캐슬이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예상대로.
“저는 화이트 캐슬의 마법사인 벤자민 케인즈(Benjamin Kanes)라고 합니다."
화이트 캐슬이, 강민혁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