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 41. 악역도 때에 따라 필요하다(5) >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그래도 너무 극단적인 선택인 거 아니야? 우리는 인간이잖아. 짐승처럼 무력으로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대화를 통해서 타협을 봤어야지. 이번 사건으로 인해 바브루이스크의 장벽은 기간트 2대와 플루토 1대, 그리고 7서클 마법사인 포세이돈을 잃었어. 앞으로 남은 6개월의 시간 동안 그 정도의 전력을 메우려면 엄청난 노력과 자원이 필요할 텐데, 인류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엄청난 손해라고 생각해.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바브루이스크의 장벽과 강민혁.
둘은 서로 원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극단적인 상황을 맞이했다.
소수의 사람에게는 의미 없는 소모로 보였다.
현재 발등에 불이 떨어질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라면, 그들의 죽음이 아까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 번째 의견은 그들과 달랐다.
-강민혁은 너희 같은 녀석들이 문제라고 말하는 거야. 말로 타협하자고? 대체 언제 그 타협이라는 것이 이루어지는데?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재앙이 발발하고 난 이후, 인류는 3년 뒤에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그때의 고통을 잊고 또다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잖아. 강민혁의 말처럼 장벽 너머에 정말로 심연의 악마 같은 몬스터들이 득실거리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갉아먹는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 거라고. 난 그래서 강민혁의 선택이 옳다고 생각해. 그가 직접 장벽을 무너트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망상 속에 살았을 거야.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그들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보다는, 장벽 자체가 무너졌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철옹성이라 불리는 장벽의 붕괴와 더불어, 무적의 병기로 찬양받던 플루토마저 쓰러지고 말았다.
상식이 와르르 무너졌다.
보수파가 주장하던 안전은,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이번 일로 모두가 깨달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철옹성이라 불릴 정도로 견고한 방어 시스템을 갖추었지만, 심연의 악마가 나타난 그 날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장벽과 플루토의 힘은, 아직 진정한 위기를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장벽 너머의 위험을 없애야 합니다.
한 명사(名士)의 발언.
현실을 인정했다.
마주할 수밖에 없는 처참한 현실에, 사람들은 강민혁의 주장에 동조했다.
애초에 첫 번째 의견을 내놓은 사람들도, 극단적인 선택을 비난할 뿐 전쟁에 대한 생각은 변했다.
전쟁은 현실이 되었다.
사람들이 들끓었다.
모두가 목소리를 높이며, 전쟁이 준비되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강민혁의 위상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전쟁을 앞둔 지금 이 시점에서, 혼자만의 힘으로 바브루이스크를 무너트린 강민혁은 엄청난 전력이었다.
8서클 마법사.
정점의 경지.
강민혁의 등장에, 마법 학계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법 학계의 3대 세력.
화이트 캐슬과 블랙캣, 그레이 로브 말고도, 세상에서는 수많은 마법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중에 배리어(barrier)라는 이름을 가진 집단은 오스트리아를 거점으로 활동하며, 가장 많은 숫자의 마법사를 보유함으로써 3대 세력 바로 밑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3대 세력의 자리에 오르길 바랐지만, 그들을 번번이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문제가 있었다.
‘8서클, 8서클 마법사를 보유해야만 3대 세력과 동등해질 수 있다.’
배리어의 수장.
조나단 랜돌프(Jonathan Randolph)의 생각이었다.
그는 20년도 전에 7서클의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지만, 아직도 8서클의 경지는 넘보지도 못했다.
그게 문제였다.
마법의 3대 세력이 어떻게 탄생했는가?
그들은 최초의 재앙이 벌어지던 시점부터 강력한 힘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그들의 수장은 모두 8서클의 경지에 올라섰다. 7서클과 8서클은 하늘과 땅의 차이다. 배리어가 아무리 정치적인 활동으로 세력을 부풀린다고 한들, 8서클을 보유하지 않았기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했다.
자신이 8서클에 오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천외의 경지는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한 시점에.
조나단 랜돌프는 강민혁의 영상을 보았다.
홀로 장벽을 무너트리는 강민혁의 모습에, 그는 발끝에서부터 짜르르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 녀석이다.”
네 번째 8서클 마법사.
강민혁의 마법은 황홀할 정도로 대단했다.
대한민국의 후손이라고 밝힌 그는, 방어에 특화된 포세이돈이 나섰음에도 힘으로 장벽을 무너트렸다. 그리고 플루토와의 전투! 강민혁은 8서클의 경지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었다. 무적의 병기라고 불리던 플루토가 마법이 폭발할 때마다 휘청였고, 결국 새카만 연기를 뿜어내며 쓰러지고 말았다.
쿵.
쿠르르르릉.
플루토의 패배.
강민혁은 진짜였다.
그가 어디 출신이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든, 조나단 랜돌프는 진짜 8서클 마법사라는 게 중요했다.
‘강민혁만 영입하면 우리도 4대 세력으로 도약할 수 있다.’
현재.
마법 학계는 3대 세력이 독식하는 판이다.
특히 가브리엘 칼데론은 엄청난 영향력으로 마법 학계를 장악하고 있는데, 그로 인해 밑의 세력들은 불만이 많았다. 가브리엘 칼데론은 다른 세력들의 이득 관계는 전혀 생각해주지 않았다. 이번 전쟁을 준비할 때도 무작정 밀어붙이는 그의 선택에, 밑에서는 불만의 말이 많았다.
그 판도를 바꾸고 싶었다.
강민혁이라는 대항마만 얻는다면, 그것이 마냥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당장 수하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강민혁에게 연락할 방법을 찾아. 배리어의 수장인 내가, 아주 매력적인 제안을 할 것이라고 말해.”
“알겠습니다.”
배리어가 움직였다.
그런데, 그것은 배리어만의 일이 아니었다.
배리어를 비롯해서, 마법의 3대 세력 자리를 노리는 많은 세력들.
그리고 3대 세력의 장본인들조차도, 8서클 마법사의 등장에 무거운 엉덩이를 뗄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6개월 앞둔 시점.
클리스만의 세상에서는 영입 대란이 예고되고 있었다.
텅 빈 숙소.
격렬했던 순간과 수많은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난 강민혁은, 침대에 누워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옳은 일을 하는 걸까.’
항상 반복되는 질문이었다.
자신은 인류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죽었고, 그들의 가족이 겪을 감정을 생각한다면 과연 그게 정의일까?
사실 잘 모르겠다.
강민혁이 아무리 명분을 떠들어도, 죽은 이들의 가족은 강민혁의 행보를 악행(惡行)이라 부를 것이다.
머리가 아팠다.
강민혁도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대화로 타협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자신에게 2천 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말하는 클리스만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경험한 시간이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직접 경험해야만 움직이는 그들에게, 말로서는 진심을 끌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전쟁.
한두 사람의 의견이 필요한 일이 아니다.
수십억의 인구가 힘을 합쳐야 하는 문제에서, 강민혁은 오랜 시간을 두고 말로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확실한 결과.
그리고 메시지 전달.
그러한 행보는 사람들을 설득하기에 적절했다.
자신의 선택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강민혁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고 싶었다.
‘클리스만.’
그의 감정.
절망하고, 한탄했던 지난 세월을 간접적으로 겪었다.
어느새 그의 감정을 같이 공유하고 있는 강민혁은, 자신의 손에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받아들였다.
현실이다.
영웅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들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나섰을 때, 누군가는 영웅의 업적을 위해 죽어야만 한다.
강민혁은 영웅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비난과 출혈이 무서워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계약자여.]
샐러맨더였다.
장벽에서의 사건 이후로, 그와의 유대감이 매우 강해졌다.
전과는 다르게 선명한 목소리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어 정말 고맙다. 덕분에 운디네는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포세이돈의 죽음.
목숨을 건 싸움에 당연한 결과기도 했지만, 강민혁의 공격에는 샐러맨더의 감정이 깃들기도 했다.
샐러맨더는 포세이돈의 죽음을 바랐다.
전투를 진행하는 내내, 강민혁의 귓가에 그가 얼마나 악한 인물인지를 설명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벽파(善波)의 마법사들은 운디네를 강제로 억압해서 대대로 계약하는 전통을 이어왔다. 그래서 그들은 정령계와의 링크가 끊어졌음에도, 운디네를 현세에 남겨두고 정령의 힘을 발휘하는 특권을 사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로 인해 운디네가 겪은 고통이다. 정령계로 돌아가지 못한 운디네는 육체와 정신이 피폐해졌고, 오랜 세월 동안 극심한 고통 속에서 살았다. 우리로서는 운디네를 도울 방법이 없었는데, 덕분에 운디네가 본래의 삶을 되찾을 수 있었다.]
벽파.
그들이 정령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항상 의문이었다.
그 이면에는 잔인한 진실이 있었고, 운디네의 희생으로 포세이돈은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정말 고맙다. 그리고 대가로 너에게 보상을 주겠다.]
화악-
강한 빛이 일었다.
아득해지는 정신 사이로, 샐러맨더의 목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너는 운디네의 힘을 사용할 수 있으며......]
홱-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강민혁의 의식.
그것이 육체와 분리되어, 일순간 정령계에 닿았다.
그리고 강민혁의 귓가에는, 샐러맨더가 아니라 생소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나, 카산드라(Kassandra)의 계약자가 될 것을 허락한다.]
카산드라.
그것은 바로 불의 정령왕의 이름이었다.
불의 마녀.
카산드라는 미지의 존재였다.
홍염의 마법을 전수받은 엘리샤조차도, 카산드라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말했다.
“확실한 건 카산드라는 샐러맨더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존재야. 예전에 카산드라의 힘이 현세에 발휘되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때 그녀의 마력에 수십 개의 활화산(活火山)이 폭발했다고 했어. 마법의 경지로 따지자면, 카산드라의 힘은 8서클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이라고 봐야겠지. 그래서 궁금하기는 해. 그녀와 계약을 맺는다면, 홍염의 마법이 얼마나 강해질지.”
엘리샤가 말했던 존재.
카산드라가 강민혁의 앞에 있었다.
카산드라는 타오르는 불길의 머리를 펄럭이며, 강민혁을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재앙의 시작점이었던 인간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재앙은 시작되지도 않았을 테니까.]
정령계.
그 세계는 예전과 달랐다.
심연의 악마가 나타나면서, 정령계는 지옥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너라면 믿을 수 있다. 너는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가장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인간이며, 실제로 행동으로서 그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번에 운디네를 구해준 너의 모습에, 나 카산드라는 강민혁이라는 인간은 믿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니 앞으로 나아가라. 나의 힘을 보태줄 테니, 절대 흔들리지 말고 너의 의지를 실현시켜라.]
화악-
화르르르르륵.
불길이 일었다.
강민혁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의식만 정령계에 닿았을 뿐, 강민혁에게는 움직이거나 말할 권한이 허락되지 않았다.
쿵, 쿵, 쿵!
심장이 뛰었다.
화려하게 피어오른 불길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더니, 일점에 모여 그대로 강민혁의 심장에 흡수되었다.
그러자.
번뜩.
현실에서 강민혁이 눈을 떴다.
주변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강민혁은 화염의 서클에서 충만하게 차오르는 힘을 느꼈다. 강력한 불의 지배력. 화염의 서클의 힘을 발휘한다면, 세상의 모든 불의 속성은 강민혁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를 것이다.
‘기연이구나.’
의도치도 않았던 성과였다.
우연이 운명이 되어, 강민혁은 카산드라의 힘을 얻었다.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
강민혁의 머릿속에 그것이 깊은 여운을 남겼다.
“알겠습니다.”
흔들려서는 안 된다.
적어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갈등하고 불안해하는 것에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심연의 악마.
그들의 몰락을 위해.
인류의 생존을 위해.
강민혁은, 의지를 새로이 다졌다.
8서클 마법사의 등장으로 한참 이슈가 되고 있는 시각.
강민혁이 카산드라의 힘을 얻었을 때, 배리어를 비롯한 마법 세력들이 마침내 비쳅스크에 도착했다.
그들의 목적은 같았다.
강민혁의 영입.
강민혁의 등장이, 마법 학계의 판도를 뒤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