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 41. 악역도 때에 따라 필요하다(2) >
2차 장벽.
비쳅스크와 모길료프와 같은 1차 저지선이 무너질 경우, 그 뒤를 막아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바로 2차 장벽이다. 실제로 2차 장벽이 공격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최전선 바로 밑에 존재한다는 이유로 상당히 고된 훈련을 진행하면서 전력 자체는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벨라루스의 바브루이스크(Babruisk).
대표적인 2차 장벽 중 하나였다.
평소에는 훈련으로 정신이 없었을 텐데, 오늘따라 바브루이스크의 경비병들이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정말 2차 장벽을 공격할까?”
“설마 그러겠어?”
“아니, 그래도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공격을 하겠다고 선포했잖아. 강민혁 정도 되는 사람이 허세를 부릴 것 같지는 않은데. 그리고, 우리 지휘관은 언론 앞에서 내뱉은 말이 있잖아.”
강민혁의 선전포고 이후.
2차 장벽의 사람들은 잔뜩 긴장했다.
특히 바브루이스크의 경계가 강화된 이유는, 지휘관 시모네 브란카(Simone Branca)의 발언 때문이었다.
“전쟁은 애들 장난이 아닙니다. 2~3년 준비한다고 해서 장벽 너머의 몬스터를 무너트릴 수 있었다면, 인류에게 닥친 재앙은 진즉에 해결되었을 겁니다. 우리는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몬스터들이 먼저 장벽을 공격하고, 그들의 숫자를 줄인 후에 장벽 너머를 도모해도 늦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보수파.
강민혁의 발언에, 이런 말도 했다.
“혼자서 2차 장벽을 무너트리겠다고? 헛소리! 7서클 대마법사라고 해서 언론이 띄워주니까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인데, 장벽이 그리 쉽게 무너지는 것이라면 인류는 벌써 2000년 전에 멸망했어. 자신이 있다면 어디 바브루이스크의 장벽을 무너트려 보라고. 내가, 현실의 높은 벽을 보여줄 테니까.”
지휘관의 과감한 언행에 고생하는 것은 결국 병사들의 몫이었다.
바브루이스크의 경비병들은 그날 이후로 24시간 경계 태세에 돌입하였고, 시모네 브란카는 매일 같이 사람들 앞에 나서며 바브루이스크의 위용을 보여주자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오히려 강민혁이 공격해주길 바라는 모습에, 바브루이스크의 경비병들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상대는 7서클 마법사다.
강민혁이 아무리 대단한 화력을 보여도 뚫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은 있으나, 그래도 괜히 싸우길 바라는 사람은 없었다. 7서클의 화력은 분명히 피해를 남길 터. 피곤한 상황에 휘말렸다는 생각에 지휘관이 자제하길 바랐으나, 시간이 갈수록 지휘관은 더욱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그들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강민혁은 시모네 브란카와 같이,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강하게 언급하는 대상이 필요했다.
“저길 봐.”
“헉!”
“정말 강민혁이 나타났어.”
삐이이이익-
사방에 울려 퍼지는 경고음.
바브루이스크의 경비병들이 황급히, 강민혁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저 멀리.
바브루이스크의 장벽이 보였다.
거의 10m는 달하는 크기에, 특수한 합금으로 제작한 장벽은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압도했다.
‘필요한 일이다.’
강민혁은 홀로 그곳을 향해 걸었다.
생각이 많았다.
클리스만은 인류에게 경각심을 부여하기 위해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몰락을 방관했다. 당시에 클리스만의 계획에 분노했던 강민혁은, 생각을 거듭할수록 자신도 클리스만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엄연히 말하자면 강민혁은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방관을 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클리스만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경각심의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어느 것이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역사는 방관을 악행이라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강민혁은 이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양쪽 세계에 닥칠 재앙.
클리스만이 경고한 것을 보면 인류를 멸망시킬 만큼의 수준일 것이다. 지금은 사람들의 말에 일일이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확실한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 아직도 장벽이 무적의 요새라는 착각에 빠져 사는 사람들. 그들에게, 장벽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래서 나섰다.
멀리서 울리는 경고음.
당장에라도 공격할 준비를 마친 장벽 위의 사람들을 보며, 강민혁은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였다.
“내가 당신들을 공격하다 죽는다 할지라도 세상은 그 책임을 묻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전력을 다해 막아보십시오. 장벽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당신들의 주장처럼 장벽은 사람들을 보호할 만한 힘을 갖추고 있다고 믿겠습니다.”
확-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마나를 퍼트린 강민혁은, 아직은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는 상대를 향해 마법을 발현시켰다.
“썬더 스톰(Thunder Storm).”
콰릉.
콰르르르르릉.
시작은 전격 계열 마법이었다.
어둑해지는 하늘에서, 수십 발의 번개 다발이 그대로 장벽 위로 작렬했다.
쾅!
콰콰콰쾅!
“막아!”
“실드를 작동시켜!”
마침내 전투가 시작되었다.
장벽의 경비병들은 황급히 마법 방어 장치를 가동했다. 장벽 전체를 둘러싸는 반투명한 막에, 하늘에서 내리치는 번개들의 힘이 장벽까지는 닿지 못했다. 7서클 마법의 위력은 대단하다. 하지만 심연의 악마를 상대한 이후, 마법 문명은 더욱 발달한 형태의 마법 방어 장치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것을 전 장벽에 설치했기에, 마법을 막는 데 문제는 없었다.
“역시!"
“공격해!”
경비병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들은 마법 병기를 가동시켰고, 파란 에너지들이 모이더니 그대로 강민혁에게 발사되었다.
퍼엉!
퍼퍼펑!
일제히 강민혁을 향하는 공격!
강민혁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한 명의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에 과한 감이 있었지만, 막상 근처에 도달하는 순간 허무하게 막혔다.
“블랙홀(black hole).”
클리스만의 지식을 통해 얻은 새로운 마법.
등급 외 마법이 발현되었다.
마법 병기의 공격이 모두 검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로 인해 충만하게 마력이 차오르자, 강민혁은 그 마나를 불어넣으면서 강력한 마법을 폭발시켰다.
“유성우.”
휘이이익-
콰콰쾅!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들이 그대로 장벽을 박살 내버렸다.
빨아들인 마력만큼 마법의 위력을 상승시켜주는 블랙홀과 등급 외 마법 유성우의 시너지는 대단했다.
장벽을 지켜주었던 방어막이 단번에 무너져버렸다.
와르르르, 떨어지는 장벽의 잔해에 사람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위력이라니. 강민혁이 7서클 마법사라서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유성우의 위력은 7서클을 넘어섰다. 어쩌면 8서클에 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장벽의 마법사들이 황급히 마법을 사용했다.
화르르르륵.
사방에서 타오르는 화염.
그것들이 강민혁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강민혁이 손을 한번 휘저어버리자 그 마법들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
“디스펠(dispel).”
강민혁은 8서클에 올랐다.
그 밑의 마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간단한 마나의 파동만으로 상대의 마법을 없앴다.
경악하는 사람들.
강민혁은 제 자리에 서서 상대의 공격을 막았고, 장벽은 처참하게 변할 정도로 부쉬버렸다. 그렇게 변하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브루이스크의 장벽은 나름대로 강한 전력을 갖추었다고 자부하지만, 그런 기준으로 따지자면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철옹성이라 불렸다.
그들조차 무너트린 재앙.
강민혁은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보여주었다.
심연의 악마는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처참하게 무너지는 장벽을 통해서 상대에게 증명했다.
쾅!
콰르르르르릉.
예상치도 못한 전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 곧바로 시모네 브란카에게 상황이 전달되었다.
“뭐라고?!”
시모네 브란카의 눈썹이 홱 올라갔다.
강민혁이 정말 공격을 감행했다는 것도 당혹스러운데, 진행되는 상황은 그를 충격에 빠트렸다.
수하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15분 전부터 강민혁이 장벽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법의 위력이 너무 강해서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플루토의 사용을 허락해주시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이런.”
시모네 브란카는 지금 장벽과 떨어진 거처에 있었다.
사실 대놓고 강민혁을 도발한 이유는, 일개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다.
심연의 악마?
강하다고는 들었다.
실제로 영상을 반복해서 돌려보았지만, 장벽의 힘이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막아내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강민혁이 그런 힘을 보유하고 있을 리도 없다. 자신으로서는 겁을 먹을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보수파의 입장을 대변해서 강민혁을 신랄하게 깎아내리는 발언을 내뱉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라니.
충격적일 정도로 과감한 인물이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와 있지 않고서는, 혼자만의 힘으로 장벽을 공격하겠다는 선택을 내리진 못했다.
“미친 새끼.”
“어떻게 할까요, 지휘관님?”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장벽이 위험하다 할지라도 플루토는 사용할 수 없어. 플루토는 S급 몬스터나 심연의 악마를 상대하기 위해 특수하게 제작된 병기인데, 강민혁을 상대로 플루토 없이 버텨내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우리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겠지. 그러니 그 녀석을 불러. 보상을 두둑하게 해줄 테니, 강민혁의 콧대를 완전히 박살 내달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수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7서클 마법사라면, 그에 걸맞은 상대를 내세우면 공격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터.
상대의 위력이 8서클에 버금간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수하는 일단 물러나는 선택을 내렸다.
시모네 브란카가 언급한 사람.
그의 능력이라면, 강민혁의 대항마로 충분할 것이다.
명령이 전달되었다.
그러자, 마침 현장에 있던 ‘그 인물’이 나섰다.
“물의 장막.”
쾅!
파스스스슥-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길이 그대로 거대한 물의 장막에 잡아먹혔다.
장막은 장벽을 전부 둘러쌀 정도의 크기.
엄청난 방어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면서 목소리에 마나를 실었다.
“이제 그만하는 게 어때? 네 실력은 충분히 알겠다만, 더 이상 선을 넘는다면 나로서도 나설 수밖에 없어. 장벽에는 항상 대마법사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법이잖아. 내가 나서는 것이, 실제 상황에 더 어울리겠지.”
파란 머리의 사내.
그 사내의 모습에, 경비병들의 안색이 환해졌다.
“포세이돈이다.”
“결국 그가 나서는구나.”
포세이돈.
장벽에서 상당한 명성을 떨치는 인물이었다.
그는 용병으로서 활동하고 있는데, 수성에 특화되어있는 능력으로 장벽에서 보수를 받고 일했다.
그 또한 7서클 마법사.
포세이돈의 합류는 강민혁으로서는 불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홍염의 마법과 마찬가지로 일인전승의 마법을 사용하는 그의 힘이라면, 이곳의 장벽은 철옹성이 되어버릴 터.
그리고 시모네 브란카는 특수부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강민혁이 멀리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고만 있지 말라고 말이다.
그런데.
포세이돈의 등장에, 강민혁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이게 무슨 느낌이지?’
이상했다.
포세이돈에게서 흘러나오는 정령의 기운은, 익숙하면서도 상당히 불쾌한 느낌을 풀풀 풍겼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샐러맨더.
그가, 말을 걸 때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운디네를 .........도와줘라.]
처음 있는 일이었다.
소환하지도 않은 샐러맨더가, 정령계의 차원을 넘어 강민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운디네는.....강제로 계약을 맺었다.....도와준다면.....은혜를 갚겠다.]
‘설마.’
강제.
강민혁은 포세이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포세이돈은 정령이 사라진 세상에서 유일하게 일인전승의 명맥을 유지하는 마법사였다. 사실, 엘리샤와 대화할 당시에 그게 의문이기는 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걸까. 정령계와의 연결고리가 희박한 이 세상에서, 그들은 나름대로 계약 방법을 찾았던 것일까.
그런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샐러맨드의 반응으로 유추해보았을 때, 그들은 부정적인 방법으로 운디네를 억압하는 것 같았다.
‘포세이돈이라.’
한번 보고 싶었던 인물이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으나, 강민혁은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한 충격 요법을 위해서는 상대의 상식을 뛰어넘는 결과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포세이돈은 물론이고 플루토마저 동원하고도 실패를 경험해야만, 상대는 현실을 인정하게 되겠지.’
씨익, 웃었다.
승부욕이 들끓었다.
8서클에 오른 이후, 자신의 힘을 시험해볼 무대가 마침 필요했다.
강민혁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어디 한번 막아봐. 네가 나선다고 해도,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
화악-
마력을 끌어올리는 강민혁.
그러한 모습에, 포세이돈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