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173화 (173/197)

173화.  < 41. 악역도 때에 따라 필요하다 >

현재 클리스만의 세상에서 가장 핫한 이슈는 바로 전쟁이었다.

모 TV 프로그램.

나름 장벽 너머의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이, 상당히 단호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반년 뒤에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시기상조입니다. 1년 전에 모스크바의 정찰을 성공한 덕분에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지만, 그렇기에 인류는 더욱 조심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목표로 설정한 구역에만 하더라도 수십 만의 몬스터가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제대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지옥의 구렁텅이로 병력을 밀어 넣는다면, 인류는 심각한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1년 전.

비쳅스크 정찰대의 업적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지만, 전쟁을 앞두고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카메라 너머.

땅을 디딜 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몬스터가 득실거렸다. 저 많은 몬스터가 겨우 시작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분주하게 전쟁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는 의견을 말했다. 지금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람은, 그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대표적인 예였다.

반대 패널.

한 여성이 말했다.

“위험하다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합니다. 하지만 차일피일 기간을 미루다 보면, 우리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 사건과 같은 재앙을 또 다시 맞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왜 3년이라는 시간을 정해두었습니까? 전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했고, 3년 뒤에는 반드시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 스스로가 시간적인 제한을 걸었던 겁니다. 만약 위험하다는 이유만으로 예정되었던 선택을 뒤로 미룬다면, 인류는 앞으로 영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건 비약입니다. 딱 1년 정도만 더 준비의 시간을 가져도, 인류의 피해를 대폭 줄일 수 있습니다.”

“그게 안 된다는 겁니다. 1년이 2년이 되고, 2년이 3년이 되는 법이다. 모스크바를 점령할 수 없다면, 적어도 스몰렌스크에는 인류의 깃발을 꽂아야 합니다. 전쟁의 전문가시니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전쟁이라는 것은 예정된 때에 시작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트립니다.”

“그래도.........."

양쪽의 의견에 불이 붙었다.

방송이 진행되는 내내, 두 사람은 조금의 물러섬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바로 인류의 현실이었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사건 이후로 인류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막상 전쟁을 준비하자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무려 2000년이다.

장벽을 세우고 평화에 안주하던 세월이 길었기 때문에, 겨우 3년의 준비만으로는 모두가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준비 기간을 더 가지자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대부분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참사를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표출했다.

전쟁은 수많은 죽음을 대가로 한다.

시작하는 순간 끝을 봐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때가 다가오는 상황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막을 내린 방송.

방송이 끝날 때까지 타협의 여지가 없었던 모습이, 바로 인류의 현주소였다.

그 시각.

한참 전쟁에 대한 주제로 세상이 시끄러울 그때, 비쳅스크의 경비병들은 평소와 같은 시간을 보냈다.

“후우.”

경비병의 입김이 하얗게 일었다.

벌써 겨울이었다.

전쟁의 시기는 봄이 끝나는 시점으로 잡았기에, 6개월 전인 지금은 러시아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몸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장벽 너머를 경계하는 시선은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다. 최근에 몬스터들이 공격하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경비병들의 신경이 잔뜩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그때였다.

경비병의 눈빛이 변했다.

“저게 뭐지?”

“어디?”

옆에 있던 부사수의 시선도 사수를 따라 옮겨졌다.

저 멀리.

차가운 바람 사이로 인간의 형체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경비병은 곧바로 경고음을 울림과 동시에, 검을 강하게 움켜쥔 상태로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인간의 형태라는 사실은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장벽 너머에는 인간 형태의 괴물이 수두룩한데다, 얼마 전에는 특이하게도 인간의 흉내를 내는 도플갱어(Doppelganger)라는 몬스터가 출몰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빌어먹을 몬스터 새끼들. 전부 죽여버려야 하는데.”

장벽 너머다.

그곳에서 다가오는 인간 형태의 무언가가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망원경으로 상대를 확인하던 부사수는, 형체가 눈에 확실히 들어오자 망원경을 황급히 내렸다.

"정말 인간인데?”

"그래도 혹시 몰라. 끝까지 주시해.”

걱정은 우려에 불과했다.

결국 장벽 앞까지 다가온 사람의 얼굴을 실물로 확인하자, 경비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헉."

익숙한 얼굴.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얼굴이라 절대 잊을 수 없었다.

특히 비쳅스크에서는 더더욱.

장벽 아래.

강민혁이 말했다.

"정찰대의 생존자입니다. 문을 열어주십시오.”

강민혁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 경계의 기색을 보이던 경비병이 황급히 문을 열며 외쳤다.

뎅뎅뎅-

"영웅이 돌아오셨다! 영웅의 귀환을 맞이하라!”

영웅.

1년 동안, 강민혁의 평판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강민혁의 귀환.

그 사실이 알려지자, 비쳅스크의 수뇌부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정말이었어!”

비쳅스크의 경비대장.

모건 폭스가 눈을 부릅떴다.

허름한 행색의 강민혁을 발견한 그는, 미리 챙겨온 모포를 가지고 황급히 강민혁에게 덮어주었다.

“살아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오랜만입니다.”

그는 들끓는 감정에 울먹이는 반응을 보였다.

1년 전.

모건 폭스와 정찰대원들은 강민혁의 배려로 무사히 장벽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를 발견했다는 업적에 그들은 영웅의 대우를 받았고, 모건 폭스가 경비대장으로 특진했을 정도로 다들 후한 보상을 받았다. 그때만 하더라도 참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강민혁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모건 폭스를 비롯한 정찰대원들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강민혁님을 혼자 보내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어차피 죽을 시한부 인생, 강민혁님 곁에서 뭐라도 도움을 드렸어야 했는데

...대체 장벽 너머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무려 1년간 소식이 없었기에, 저는 강민혁님이 결국 몬스터에 당해버렸다는 못

된 생각을 했습니다.”

모건 폭스의 태도는 극진했다.

생명의 은인.

강민혁은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었다.

애초에 모건 폭스의 개인적인 인연이 아니라 할지라도, 강민혁을 바라보는 경비병들의 시선은 남달랐다.

영웅.

현재 강민혁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였다.

원래 과거는 미화가 되는 법이고, 애초에 대단했던 강민혁의 업적은 영웅의 일대기처럼 퍼져나갔다.

당시.

강민혁에 관해 이런 기사도 있었다.

[강민혁은 대체 어떤 인물일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나타난 그는, 부와 명예가 보장되는 대단한 실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장벽 너머로 떠나는 선택을 내렸다. 그의 희생 덕분에 인류는 모스크바라는 미지의 땅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강민혁과의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인류는 강민혁과의 추억이 짧다. 하지만 나는 강민혁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 생각하며, 절대 그의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강민혁을 영웅이라 불렀다.

그래서 최근에 그의 희생을 기리는 추모식을 진행했기에, 강민혁의 귀환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사실들을 모건 폭스를 통해 들었다.

“아마 강민혁님이 귀환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파벨 그 자식이 정말 좋아할 겁니다. 정찰이 끝나고 난 직후, 강민혁님의 복수를 하겠다고 따로 용병단을 창설한 녀석이거든요. 그때 이후로 실력이 비약적으로 향상해서, 현재 유럽에서 제법 명성을 날리고 있습니다.”

“그래요?”

달라진 현실.

그런데, 강민혁은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자신이 심연에 머무르는 동안 무려 1년이 지났지만, 인류는 전쟁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었다.

‘인간은 역시 망각의 동물이구나.’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참사 직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들은, 황급히 세계 정부를 소집하며 전쟁이라는 결단을 내렸다.

당연한 결과였다.

문제는 그 이후에 특별한 위험이 없었다는 사실이고, 사람들은 또 다시 과거를 망각하고 말았다.

시간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

그래도 과거에 경험했던 것이 있어서 전쟁을 무르자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수의 사람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참으로 웃긴 상황이었다. 재앙의 현장을 직접 경험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1~2년의 시간을 더 준비해도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상황이 말이다.

‘클리스만은 옳았어.’

그의 말대로였다.

2천 년간 인류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그는, 인류를 한데 뭉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강제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민에 빠졌다.

클리스만의 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쪽 세계에 엄청난 위험이 닥친다고 했기에, 시간을 끄는 것은 좋지 않다.

하루라도 빨리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여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목숨이 걸린 이 긴급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모두가 전쟁에 가담할 것이다.

‘이를 어떻게 한다.’

머리를 굴렸다.

영웅이라는 위치.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은 어떨까.

‘아니야. 내 세계에서 그 방법이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어. 가디언 마탑의 강민혁이라는 사람은 충분한 발언권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현실을 외면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어.’

강민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곧바로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은 데는,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강민혁의 귀환 소식이 알려지면서, 비쳅스크로 많은 숫자의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의 목적은 강민혁의 취재.

장벽 너머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강민혁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담아보고자 했다.

강민혁은 그들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수많은 카메라를 앞에 두고, 대표로 나선 기자의 질문을 받았다.

“대체 장벽 너머에서 1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이는 바람에 퇴로가 차단당했고, 좌표도 불안정해서 텔레포트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년간 몬스터들과 지루한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처리하고서야, 저는 비로소 장벽으로 돌아올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 질문은..............."

예상 범주에 있는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그러다, 드디어 기다리던 질문이 나왔다.

“현재 전쟁이라는 주제로 세상이 시끄러운 상태입니다. 장벽 너머를 직접 경험했던 강민혁님으로서는,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선이 집중되었다.

어떤 식으로 말하든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강민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쪽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체 무엇을 근거로 인류에게 그리도 많은 시간이 허락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재앙은 예상할 수 없기에 그 단어적 의미가 있는 것이고, 왕실 마법 아카데미와 같은 사건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경험한 장벽 너머의 몬스터들은 점점 장벽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장벽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기에, 인류는 한시라도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좋은 말씀입니다만, 오히려 장벽을 두고 싸우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변화무쌍한 기후는 공격하는 입장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장벽이 무너질 일은 없을 테니, 그들이 먼저 공격해온다면 우리로서는 좋은 일이지 않습니까?”

강민혁이 웃었다.

장벽.

그것에 대한 신뢰가 느껴졌다.

2000년간 유지해왔던 장벽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착각에, 강민혁의 눈빛이 변했다.

하나의 계획.

강민혁은 생각을 바꾸었다.

영웅의 이미지를 소모하는 것만으로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면, 악역(惡役)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장벽은 무너지지 않는다라. 그럼 지금부터 한 가지 실험을 하겠습니다. 제가 무작위로 2차 장벽 중 하나를 공격하겠습니다. 이로 인해 저를 비난하거나 처벌하는 것은 감내하겠습니다. 심연의 악마는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괴물이고, 저 하나도 막지 못한다면 장벽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겠지요. 어디 한번 증명해보십시오. 장벽이, 절대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이라는 사실을.”

탁.

인터뷰를 끝냈다.

그리고 일어나는 강민혁의 모습에, 기자들이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강민혁의 발언.

장벽을 직접 공격해서 무너트리겠다니!

금세 정신을 추스른 기자들은, 인터뷰의 내용을 빠르게 퍼트렸다.

불과 1시간 전만 하더라도 영웅이라 찬양받던 강민혁이, 순식간에 악역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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