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172화 (172/197)

172화.  < 40. 클리스만의 진실(2) >

강민혁은 심연의 악마를 목격한 경험이 있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 나타났던 그 존재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인간 형태의 괴물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심연의 악마는 달랐다.

그때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이 의심될 정도로, 어둠의 농도와 크기가 현저하게 떨어졌다.

캬아아악-

심연의 악마가 괴성을 질러댔다.

그러자 공간이 뒤틀렸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어둠의 파편이 바로 앞에 있는 인간들을 공격했다.

“크윽.”

“그레이트 실드.”

콰앙!

그들의 대응은 재빨랐다.

한 마법사가 로브를 펄럭이며 사용한 마법이 파편을 막아주었고, 동시에 금발의 사내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강민혁은 금발의 사내를 난생처음 보았지만, 클리스만의 기억은 그가 바로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익스플로전.”

화르륵.

콰콰콰쾅!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를 비롯한 마법사의 숫자는 5명이었는데, 그들의 마법이 심연의 악마를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했다. 화끈하게 피어오르는 화염. 이 정도라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주변으로 빠르게 확장하는 어둠의 힘에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런.”

심연의 악마.

그들은 심연에서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특히 차원을 넘나드는 그들의 권능은, 마법사들로서는 대항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화악!

파바바바박!

“커억!”

“컥!”

차원을 뚫고 나온 어둠의 가시가 마법사들의 몸을 관통하였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막았지만, 2명의 마법사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그대로 심장이 관통당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목숨을 건 전투가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를 필두로 마법사들은 악착같이 심연의 악마에 대항했고, 심연의 악마는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마법사들을 몰아 붙였다. 그 과정에서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엄청난 마법들을 보여주었다. 현재 마법 문명을 지탱하는 근간이 되는 마법들이, 그의 손에서 발휘되었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의 명성은 헛되지 않았다.

마법을 발전시켰다고 알려진 위대한 마법사는, 심연의 악마를 상대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브로큰 (broken).”

파사사삭-

차원의 균열을 부숴버렸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의 마법에 심연의 악마는 힘이 제한되었고, 접전 끝에 결국 일격을 당했다.

콰앙!

콰르르르르릉.

심연의 악마에게 작렬한 마법.

아직 소악마(小惡魔)에 불과했던 심연의 악마는 그렇게 자신의 영역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마법사들은 동료의 희생을 대가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창백하게 질린 그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심연.

이 안에는 수많은 악마가 살아간다.

그들이 모두 이처럼 괴물 같은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인류의 앞날엔 희망이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방법이 필요했다.

당시 마법 학계는 7서클이 인간의 한계라 말하던 시점이었고,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마법의 발전을 위해서 아주 위험한 선택을 내렸다. 바로 악마의 심장. 심연에서 형성된 마나의 결정체를 흡수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그렇게 심장의 마나를 받아들였고, 엄청난 고통을 호소한 끝에 환골탈태를 이루었다.

8서클.

마법 학계에, 새로운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화악-

본래의 세계로 돌아왔다.

클리스만이 말했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최초로 8서클을 형성하는 방법을 알아낸 위대한 마법사다. 그는 마법 문명의 근간을 만들어내고, 살아생전 끝까지 심연의 악마와 싸우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의 죽음에 확신했다. 8서클 마법사인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조차도 심연의 악마를 상대로 역부족이었다면, 그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네게 심연을 보여주었다. 심연은 재앙의 시작점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재앙을 해결할 방법 또한 심연에 있다.”

악마의 심장.

심연에서 자라난 그들의 심장에는 엄청난 마나가 축적되어 있다. 그것은 순수한 마나의 결정체고, 상급의 마나석은 악마의 심장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보통의 정신력으로는 악마의 심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기에, 클리스만은 강민혁이 성장할 때를 기다렸다.

“그간 너의 선택들은 우연이 아니었다. 내 몸에 빙의하고 있는 동안은 내가 심어놓은 기억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너는 그렇게 시련의 탑에 도전하는 선택을 내렸다. 그것은 지금의 순간을 위한 과정이었다. 시련의 탑에서 정신과 육체를 단련하면, 심연은 더 이상 너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악마의 심장 또한, 심연의 압력을 버텨내는 자에게는 힘을 허락하지.”

퍼즐이 맞추어졌다.

클리스만.

그는 복수의 화신이었다.

재앙을 일으킨 악마들의 몰살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그는 심연의 공간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복수의 칼로 강민혁을 택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강민혁을 움직일 수 없었다.

“물어볼 것이 있다.”

“얼마든지.”

“너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재앙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고, 그리고 어째서 방관했는지 설명해라. 만약 이유가 타당하지 않다면, 난 너와 타협할 수 없다.”

강민혁이 분노했던 이유.

수많은 학생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에, 강민혁은 클리스만의 의도를 처음으로 의심하게 되었다.

대체 왜.

클리스만은 그런 선택을 내렸을까.

“방관이라.”

클리스만이 피식, 웃었다.

방관.

맞다.

그는 강민혁이 말한 것처럼, 일부러 방관했다.

“나는 최초의 재앙부터 지금까지, 무려 2000년의 세월을 직접 경험했다. 그 세월 동안 내 머릿속을 장악한 생각이 무엇인지 아나? 인간은 나약하고, 언제나 도망칠 핑계를 찾는다는 것이다. 최초의 재앙에서 이 세상의 인간들은 핵폭탄이라는 단순하지만 잔인한 방법으로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 방법이 실패하고 장벽을 세운 이후에는, 확인도 되지 않은 헛된 평화에 젖어 들어 몬스터와의 싸움을 포기했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가 내게 그런 말을 하더군. 장벽은 인간의 안전을 보장해주었지만, 오히려 미래를 포기하는 선택이 되어버렸다고.”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절망했다.

소수의 마법사들은 끝까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지만, 다수의 인간은 현실을 외면해버렸다.

그 결과가 덧없이 지나간 시간이었다.

2000년.

그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인간에게는 많은 시간이 있었다. 심연의 악마가 아직 다 자라나지 않았을 때, 그들이 힘을 합쳤다면 재앙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를 찾았던 마법사들. 그들에게 세상의 재앙에 대해서 경고하고 움직이라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결국 이 사태에 이르고 말았지. 그래서 방관했던 것이다. 심연의 악마들은 곧 움직일 때를 노리고 있는 상황이기에,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몰락이 사람들에게 경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클리스만은 흘러가는 세월에 인격이 상실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악마의 몰살이었고, 그 과정에서 인간들이 죽는 것 따위는 이제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방관했다.

인간을 한데로 뭉치는 계기.

그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강민혁에게는 아카데미의 재앙을 경고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에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재앙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 집중되는 차원의 힘이, 곧 심연의 악마가 그곳을 향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건 다른 세상도 마찬가지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강화 문명에서도 심연의 악마가 나타날 것이고, 곧 마법 문명에는 대규모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진실을 모두 말해주었다.

클리스만의 설명에, 강민혁은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내가 클리스만의 입장이었다면, 그와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

아니다.

절대 그러지 못한다.

당장 강화 문명에서의 일만 보아도,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았기에 강민혁은 방관을 택하고 말았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인간들.

그들은 너무나도 안일하다.

방관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는 알았지만, 강민혁은 그게 해결책이라 생각했다.

클리스만도 다르지 않다.

클리스만은 소수의 죽음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치 있는 죽음이라고 판단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옳은 일은 아니야.’

강민혁의 표정이 참담하게 변했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무어라 말해야 할까.

잘못된 선택이라 비난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에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아직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이 있었다.

“내게 검술을 얻었을 때, 왜 그리도 간절하게 매달렸던 거지? 네게는 그걸 대체할 만한 충분한 힘이 있었을 텐데.”

“내 머릿속에 있는 지식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검술이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너처럼 직접 싸우고 싶었다. 네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심연의 악마를 내 손으로 하나라도 더 죽이고 싶었다.”

검술.

클리스만에게 그것은 새로운 길이였다.

그렇기에 간절했던 것이고, 강민혁에게 마법을 전수하면서도 검술에 악착같이 매달렸다.

이제 세상은 끝을 향하고 있었다.

강민혁에게 자신의 진실을 공개한 클리스만은, 진실의 여파가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선택을 강요했다.

“자, 선택하라.”

화악-

그의 손에서 불빛이 일었다.

검게 일렁이는 구슬.

그것이 바로 악마의 심장이었다.

마나의 결정체가, 강민혁의 시야에서 빛을 발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넌 순수한 마나와 내 모든 지식을 알게 될 것이다. 내 선택에 모두 동의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 힘을 받아들이고 최종 목적인 악마의 멸살만은 잊지 말아라. 그렇게만 한다면, 난 네게 모든 것을 내어줄 것이다.”

강민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아직도 의문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클리스만의 만남은, 강민혁이 생각지도 못한 고민을 남겼다.

‘클리스만.’

복수에 눈이 멀어 인격을 상실한 인간.

소수의 희생을 외면한 그의 선택은 비난받아 마땅하나, 그의 순수한 목적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

빙의했던 시간.

그 시간이 말해주었다.

가족을 잃은 아픔은, 오로지 악마들을 모두 처리해야만 옅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강민혁이 말했다.

“적어도.”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마나의 결정체를 움켜쥐었다.

“과정은 다를지라도, 나 또한 너와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겠다.”

그 순간.

번뜩!

엄청난 불빛이, 그대로 강민혁을 덮쳤다.

마나의 결정체.

그것의 힘은 엄청났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힘에 숨이 차올랐지만, 강민혁은 오히려 서클을 열어 마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심연의 압력과 같은 종류라고 했어.’

거절하지 않았다.

억지로 대항하지 않았다.

흘러가는 힘에 순응하였고, 마음을 열어 몸을 맡기자 반발력이 사라졌다.

강민혁은 그렇게 힘에 동화되었다.

심법을 사용해서 심연의 공간에 적응했었던 것처럼, 엄청난 양의 마나가 빠르게 몸 곳곳에 녹아들었다.

그러자.

후둑.

후두두둑.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떨어졌다.

피부가 녹아내리며 새살이 돋아났고, 강민혁의 몸이 완벽한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환골탈태(換骨奪胎).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강민혁은 자신의 몸에 생겨나는 변화를 받아들였고,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변화가 절정에 달했다.

단단해진 강민혁의 심장에는, 어느새 8개의 고리가 생겨났다.

번뜩.

“...8서클에 오른 건가.”

강민혁의 안광이 빛을 발했다.

서클 가득 차오르는 힘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클리스만의 말은 옳았다.

7서클은 인간의 한계였고, 그 이상의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순수한 마나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8서클.

강민혁은 천외(天外)의 세상에 도달했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클리스만이 남긴 지식으로 충만하게 차올랐다.

‘클리스만.’

그는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떠나기 전.

클리스만은 강민혁의 머릿속에 하나의 메시지를 남겼다.

[양쪽 세상에 곧 엄청난 시련이 닥칠 것이다. 그러니, 네가 그들의 중심이 되어라.]

그는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옳은 길을 걸었든 잘못된 길을 걸었든, 결국 악마의 멸살이라는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고 나아갔다.

어찌 보면 가여운 삶이었다.

가족이 모두 죽은 이후로.

클리스만은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또 어디선가 자신만의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을 그의 모습에, 강민혁은 의지를 다졌다.

“내 방식대로 너의 의지를 받아들이겠다.”

아직 마법 문명에서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은 장벽으로 돌아가야 할 때.

그런데 강민혁으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안에서는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지만, 바깥세상은 강민혁이 장벽을 떠난 지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세계 정부가 선언했던 전쟁을 반년 앞둔 상황.

그 시점에, 강민혁은 심연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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