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171화 (171/197)

171화.  < 40. 클리스만의 진실 >

심연(深洞).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못에 빠지자, 강민혁은 엄청난 압력에 숨이 턱 막혔다.

"....흐읍!”

과거 두 차례.

강민혁이 경험했었던 차원의 균열과는 압력의 수준이 달랐다. 몸 전체가 짓이겨질 것처럼 사방에서 공간이 밀려 들어오는 느낌이었고, 끈적한 액체와도 같은 공기가 기도를 가득 메웠다.

역했다.

감당할 수 없는 압력에, 내부 장기를 웩하고 모두 내뱉어버리고 싶었다.

‘버텨야 해.’

빠득.

이를 악물었다.

코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고, 핏발 선 눈은 아득해지는 정신의 끈을 간신히 붙잡았다. 예상했던 일이다. 클리스만의 육체로는 금방 적응했었지만, 프랑스에서는 상당한 고비를 넘겼었기에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도 도전할 수밖에 없었다. 클리스만이 말하는 심연을 직접 경험해야만 했기에, 강민혁은 악착같이 심법의 구결을 행했다.

“후욱, 후욱.”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힘겹게 빨아들이는 숨은 제 역할을 다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일말의 숨으로 강민혁은 버텨냈다.

심연의 공간.

차원의 균열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강민혁과 같은 일반 사람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 곳이다. 고로 클리스만의 육체는 상식 밖의 영역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는 심연의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일까. 처음에는 단순했던 의문이, 지금에 와서는 반드시 해결 해야만 하는 문제로 변했다.

화악-

주변의 기운이 강민혁을 감쌌다.

심연과 비슷한 성질의 심법을 사용하면 할수록, 심연은 강민혁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주었다.

동화.

어쩌면 강민혁이 시련의 탑에 도전했던 것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첫 번째 도전으로 심연의 공간에서 버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고, 두 번째 도전으로 자신의 육체를 심연에 익숙하도록 변화시켰다. 덕분에 강민혁은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을 되찾았다. 만약 앞선 두 번의 도전이 없었다면, 강민혁은 차원의 미아가 되어 정신과 육체가 갈기갈기 찢겨나갔을 것이다.

시간이 흘렀다.

클리스만은 잠시 잊었다.

지금은 심연에 적응하는 것에만 집중하였고, 점차 사라지는 고통에 강민혁의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때였다.

공간이 폭발했다.

마치 빅뱅이라도 일어나는 것처럼, 세상이 변하며 강민혁의 눈으로 빨려 들어왔다.

화악-

팽팽 돌아가는 세상.

이윽고 안정을 되찾았을 때.

“드디어 직접 보는구나.”

클리스만.

그가, 바로 앞에서 강민혁을 지켜보고 있었다.

참으로 낯선 광경이었다.

수년간 빙의의 대상이었던 클리스만이, 살아있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강민혁의 앞에 섰다.

웃기게도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클리스만에 대한 의문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지만, 강민혁은 지금 이 순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감정을 억눌렀다.

지금은,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가 있다.

“클리스만. 난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원한다.”

단호한 음성.

클리스만이 웃었다.

강민혁이 이렇게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듯이, 그는 심연을 걸으며 강민혁에게 말했다.

“너와 나의 관계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진실을 밝혀야겠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믿을지, 믿지 않을지는 전적으로 너의 판단에 맡기겠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임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진실.

마침내, 그것이 공개되었다.

“너에게 말했던 괴를리츠(Gomtz)의 사건은 사실 나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게이트가 처음 발생했을 때, 내 가족은 애초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였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나는 이미 그때 닥친 재앙으로 인해 가족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2000년 전이라고?”

“그래, 난 최초의 재앙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최초의 재앙.

예상치도 못한 단어에, 강민혁의 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2000년 전이라니.

클리스만에 대한 다양한 시나리오를 예상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은 그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다.

상식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최초의 재앙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재앙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세상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2000년 전에 차원을 붕괴시킬 정도의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고, 그때 일어난 균열에서 심연(深制)이라 불리는 공간이 탄생했다. 그것이 재앙의 시작이었다. 아직은 진화하지 못한 심연의 악마들은, 다른 차원의 몬스터들을 이용해 인간 세상을 공격했다. 과학 문명이 발달했던 세상으로서는, 그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지.”

차원 폭발.

생소한 말이었다.

폭발이 있었다면, 분명히 원인도 있었다는 뜻이 된다.

“괴를리츠의 사건은 가상의 이야기지만, 내가 겪은 상황은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에 나타난 몬스터들에게 내 가족은 몰살을 당했다. 연약한 인간의 육체는 내가 보는 앞에서 갈기갈기 찢겨나갔고, 방금까지만 해도 내게 사랑을 속삭이던 가족들은 한낱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버리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나를 잡아먹겠다고 이빨을 들이미는 몬스터들의 모습에, 그리고 핵폭탄을 떨어트리겠다고 경고하는 다른 나라들의 태도에, 나는 살기 위해서 가족들의 시체를 수습하지도 못한 채 도망치고 말았다.”

그때는 다들 그랬다.

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혈육을 포기하고, 인간성을 포기하고.

최초의 재앙에 존재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인간성이 무너진 상태에서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클리스만은 살았다.

하지만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매일 고통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미쳐버리고 말았다.

“난 도저히 내 가족을 몰살시킨 몬스터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장벽 너머로 향했다. 그곳은 핵폭발로 인해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땅이 되었지만, 나는 가족을 잃은 고통에서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때부터 철검 한 자루를 들고 무작정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심연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평범했던 인간.

그의 삶의 뒤바뀐 순간이었다.

심연은, 그에게 다른 삶을 선사했다.

“심연에서는 늙지도, 그렇다고 바깥세상의 시간에 구애받지도 않는다. 나는 심연에서 살아갔다. 당시에 심연의 악마들은 그다지 강하지 않은 상태였고, 인간의 육체라도 심연의 압력을 버텨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들과의 싸움으로 얼마의 시간을 보냈는지는 모르겠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내가 수십의 악마를 처리했을 즈음, 나는 달라진 세상을 목격하게 되었다.”

일기의 한 페이지.

그때의 순간이 떠올랐다.

[검을 들고 몬스터와 싸우던 그 시절, 로브를 펄럭이며 마법을 사용하는 선택받은 자들의 모습은 내게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심연에 그들이 나타났다.

로브를 펄럭이던 사내 중 한 명은, 클리스만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나는 그때, 알렉산드르 도브첸코(Aleksandr Dovzhenko)를 만났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라고?”

강민혁이 눈을 부릅떴다.

아아.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라니.

어떻게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있겠는가.

“넌 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거야?”

2000년의 마법 역사.

그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해준 시작점 중 한 명의 이름이 바로, 대마법사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였다.

예전에.

강민혁은 책에서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의 이름을 접한 적이 있었다.

[마나 룸]

[마나로 구성한 공간. 이 안에서 훈련하면 성장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으며, 마나 룸이 개발된 이후로 서클의 업그레이드 기간이 대폭으로 줄어들었다. 마나 룸을 개발해낸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는, 마법 학계의 혁명을 일으킨 대마법사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 읽었던 글이다.

마나 룸의 충격이 대단했기에, 강민혁은 알렉산드르 도브첸코라는 인물을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의 만남.

클리스만의 인생이 변했다.

심연의 공간에서, 그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심연의 악마는 점점 강해졌고, 내 힘으로는 그들을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때부터는 그들을 피해 도망칠 수밖에 없었지.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와의 만남은 내가 마법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시작점이었다. 그는 나에게 마법을 알려주었지만, 나는 태생적인 한계로 마법을 익힐 수가 없었다. 알렉산드르 도브첸코가 떠난 후로도 나는 도망자의 삶을 살았고, 어느 순간부터 그와 마찬가지로 심연의 공간을 방문하는 마법사의 숫자가 늘어났다.”

한 시대를 호령했던 마법사들.

클리스만은 그들과 만났다.

바로 차원의 균열.

그것이 사람들에게 훈련의 용도로 사용되면서부터, 클리스만으로서는 사람들을 만날 길이 생겼다.

“너에게 알려준 마법 지식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들에게서 마법 지식을 배웠고, 심연의 공간에서 억겁(德却)의 시간을 보내며 나는 지식을 발전시켰다. 내가 배울 수 없다는 사실에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날도 있었지만, 복수를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이제야 이해되었다.

클리스만의 지식.

그것은 2000년 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클리스만은 살아있는 마법 역사였고, 그의 지식이 압도적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미스터리한 부분도 있었다.

클리스만이 만난 사람들은 심연 밖으로 나가서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게 어떠한 현상인지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고, 클리스만은 자신조차도 밝혀내지 못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진실은 거대했다.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고, 들으면 들을수록 상식의 세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클리스만.

그는 이제껏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바깥세상이 2000년의 문명을 쌓아 올리는 동안, 클리스만은 심연이라는 깊은 어둠에서 살아갔다.

강민혁이 말했다.

“그런데 왜 나지? 어째서,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던 마법 지식을 내게 알려주었던 거지?”

궁금했다.

클리스만은 여러 마법사들을 만났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마법을 전달해주지 않았던 그가, 강민혁을 직접 찾아와 지식의 전수를 택했다.

“심연의 악마는 차원을 조종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몬스터를 세상에 불러들인 힘이고, 심연에서 머무른 덕분인지 나 또한 차원에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너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지. 차원 너머에서도 그 존재감을 알 수밖에 없을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재능. 너는 대마법사의 자질을 타고 났다. 심연의 악마를 몰살시키기 위해서는 신(神)의 경지라고 불리는 9서클의 힘이 필요하고, 나는 너라면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화이트 캐슬의 그 녀석조차도 9서클의 경지에 오르지 못해 절망했지만, 너의 재능은 그와는 차원이 다르다.”

화이트 캐슬.

그와의 연결고리가 드러났다.

마법을 익힐 수 없었던 클리스만은, 자신을 대신해서 복수를 이루어줄 사람을 찾아다녔다.

그 결과가 강민혁이었다.

그때부터 계획은 시작되었다.

클리스만은 심연을 떠나 바깥세상으로 나갔고, 강민혁의 성장을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주었다.

“최초의 심연은 나처럼 연약한 인간도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그 힘이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2000년이 흐른 지금 심연의 악마들은 엄청난 힘을 갖추었고, 심연 너머에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득실거리고 있다. 그들이 힘을 드러내는 순간, 이 세상은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하고 최초의 재앙과 마찬가지로 몰살을 당하고 말겠지. 그래서 네 힘이 필요하다. 너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단순히 진실을 말해주기 위함이 아니다. 네게 심연의 악마를 처리하는 방법과, 더 높은 경지로 인도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나는 너와의 만남을 택했다. 그러니.........."

탁!

손가락을 치는 클리스만.

그러자.

풍덩!

강민혁의 의식이 심연에 빠졌다.

“네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마.”

아주 오래전.

심연의 공간에서 있었던 한 장면이, 강민혁의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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