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 39. 장벽 너머의 땅(8) >
매일 정오.
전 세계에 정찰대의 영상이 방송되었다.
인류가 본격적으로 몬스터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세계 정부는 동기 부여를 위해 사람들에게 충격을 선사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것이 바로 정찰대의 영상이었다. 장벽 안의 삶에 안주하는 사람들에게, 장벽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이 무엇인지 직접 보여 주었다.
의도는 반만 적중했다.
생각보다 절망적인 상황에, 사람들은 오히려 의욕을 잃었다.
그러한 상황에 강민혁이 나타났다.
정찰대로서 성과를 얻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돌연변이를 처리하는 압도적인 모습에 사람들이 열광했다.
[새로운 영웅이 나타났다!]
방송이 끝난 직후.
한 신문의 1면을 장식한 글이었다.
사람들의 반응도, 그 신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체 강민혁이라는 사람의 정체가 뭐야?
-난세(亂世)에는 영웅이 탄생한다는 말이 옳았어. 멸망해버린 대한민국의 후손이라니. 몬스터와의 전쟁을 대비하고 있는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후손이 나타난 건 마치 필연처럼 느껴져.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강민혁의 역할이야. 들리는 말에 의하면, 강민혁은 장벽 너머의 지식이 해박해서 길잡이의 역할을 맡았어. 인류에게 필요한 사람이, 정확히 필요한 시점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어. 강민혁은 하늘이 내려준 영웅이고, 그가 무사히 귀환해야만 해.
영웅.
사람들이 들끓었다.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힐 새로운 이름의 등장에, 그들은 들불처럼 일어나며 강민혁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자 마법 학계가 바쁘게 움직였다.
세르게이 루덴코의 예상처럼, 현재 마법 학계는 한 명이라도 더 뛰어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몬스터와의 전쟁은 인류 전체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전력의 확보가 중요한 이유는, 갖추고 있는 힘에 따라 전쟁에서 입는 피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A, B, C 세 구역에서 전투가 일어났다고 치자.
B구역의 사람들은 다른 곳보다 강한 세력을 갖추었고,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승리를 쟁취했다.
그렇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하겠는가?
전쟁이 끝나고.
B구역의 사람들이 이후의 미래를 장악할 것이다. A와 C 구역 사람들의 희생을 대가로 그들은 비교적 힘을 보존할 수 있을 테고, 전쟁으로 인해 어수선해진 분위기는 힘의 논리에 단번에 휘어 잡힐 가능성이 크다. 현재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무려 7서클 대마법사가 등장했다는 말에 다들 난리가 났다.
그중에는 마법의 3대 세력도 있었다.
화이트 캐슬, 블랙캣, 그레이 로브.
그들도 강민혁을 영입하기를 바랐고, 강민혁은 장벽으로 복귀하자마자 그들의 환대를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무렵.
사람들 사이에 진부하지만 인상적인 얘기가 퍼졌다.
-오래전부터 장벽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이 돌았었어. 세상이 심연(深制)의 지옥에 빠져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었을 때, 재앙의 시작점으로부터 탄생한 영웅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그의 마법은 땅을 가르고 하늘을 뒤덮나니, 그야말로 세상을 구할 영웅이라고.
근원을 알 수 없이 사람들에게 떠도는 말.
사람들은 그것이 강민혁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심연의 지옥이란 몬스터와의 전쟁을 뜻하고, 재앙의 시작점은 바로 대한민국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억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웅을 원했고, 강민혁은 그러한 조건에 부합했다.
블랙 캐슬의 지휘관인 프레디 로드리게스는 영상을 확인하고는 세르게이 루덴코에게 명령을 내렸다. 7서클 대마법사는 반드시 포섭해야만 하는 존재. 다른 개인 세력이 강민혁을 차지하기 전에, 무조건 먼저 강민혁과의 자리를 만들어서 그를 블랙 캐슬의 일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강민혁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더 이상 정찰대의 성과는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한시라도 빨리, 강민혁이 무사히 장벽으로 복귀하길 바랐다.
모스크바로 향할수록 안전한 선택지는 사라졌다.
피치 못할 전투가 잦아졌지만, 강민혁이 힘을 드러낸 후로부터 전투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적을 맞닥트리면.
“사일런스.”
강민혁은 일단 주변의 소리를 차단했다.
모스크바 주변에는 수많은 몬스터가 득실거리기 때문에, 자칫 잘못했다간 퇴로가 완전히 차단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는 사이 정찰대원들이 몬스터와 전투를 벌였다. 장벽 너머의 몬스터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지만, 약간의 가르침으로 인해 파벨 쿠베스를 비롯한 이들의 검술이 제법 위력적으로 변했다.
푹!
푸화악!
파벨 쿠베스의 검이 피를 뿌렸다.
확연히 달라진 검술의 위력에, 제일 놀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본인이었다.
‘수호 검법은 클리스만에게서 비롯된다고 했어. 그런데 강민혁은 어떻게 정확히 알고 있는 거지?’
의문은 많았다.
그러나 확실한 건 강민혁은 믿을 수 있는 동료라는 것이다. 위기의 상황에서 끝까지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데도 수호 검법을 알려주었다. 그건 이 세상에서도 보물이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강화 문명이 새로이 싹을 틔우고 있는 상황에서, 강민혁은 가장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기술을 대가 없이 가르쳐주었다.
은인.
강민혁을 마음으로 섬겼다.
그렇게 파벨 쿠베스를 선두로 격렬하게 싸우는 사이, 강민혁의 마법은 상황을 단번에 종결시켰다.
“폭발.”
콰앙!
콰콰콰쾅!
그것으로 끝이었다.
초월급 이상의 몬스터가 아닌 이상, 폭발에 휩쓸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없었다. 떼로 몰려들었던 몬스터가 그대로 증발되었다. 강민혁의 화력이 있는 이상, 수백 마리의 몬스터와 맞닥트린다 하더라도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자신감이 붙은 정찰대는 행군 속도를 높였고, 그렇게 장벽을 떠난 지 열흘 정도가 지났을 즈음에 마침내 모스크바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가 모스크바구나.”
조금 떨어진 거리.
모스크바가 내려다보이는 동산 위에서, 모건 폭스는 감격 어린 표정을 보였다.
모스크바.
한때는 러시아의 수도였던 장소.
그곳을 일차적으로 점령해야 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면서, 모건 폭스를 비롯한 정찰대에게 모스크바의 의미는 매우 특별해졌다. 그런데 예상대로 모스크바는 아름다운 환상의 나라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폐하가 되어버린 땅에는 수많은 몬스터가 배회하고 있었고, 멀리서 봐도 그 숫자는 확실히 많았다. 일행은 일단 안전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고, 며칠간 그곳에서 머무르며 모스크바의 정보를 착실하게 모았다.
며칠 뒤.
이제는 복귀의 시점이 되었다.
강민혁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이 정도면 정보는 충분히 모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텔레포트 마법진을 준비해드릴 테니, 여러분들은 장벽으로 복귀하시면 됩니다.”
“설마 이곳에 남으시려는 겁니까?”
강민혁의 뉘앙스가 이상했다.
여러분들은.
그 범위에 강민혁은 포함되지 않았다.
파벨 쿠베스의 물음에, 강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모스크바까지는 서로의 목적이 같아서 동행했지만, 지금부터는 제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제 걱정은 마시고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그게 저를 위해서도, 그리고 여러분들을 위해서도 옳은 선택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강민혁의 태도가 완강하자, 그들로서는 결국 강민혁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정찰대는 본인들이 강민혁에게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애초에 강민혁은 정찰대의 도움이 없더라도, 혼자만의 힘으로 모스크바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돈이 목적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다.
7서클의 경지는 부와 명예가 보장되는 자리다.
강민혁의 의도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떠나기 전.
파벨 쿠베스가 말했다.
“꼭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그들을 텔레포트로 보냈다.
장벽 너머의 좌표는 불안정했지만, 길라잡이의 반지가 제 역할을 해주어서 크게 문제는 없었다.
이제는 혼자 남은 상황.
강민혁은 미리 파악해두었던 길을 떠올렸다.
‘블라디미르로 가자.’
미지의 땅.
그곳에서, 클리스만이 기다리고 있다.
모스크바와 블라디미르까지의 거리는 상당하다 .
이동 수단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강민혁으로서는 그 머나먼 거리를 도보로 이동해야만 했다.
딱히 위험할 것은 없었다.
사실 정찰대와 같이 다니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부분이 많았지만, 강민혁은 인류가 몬스터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직접 경험 해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들과 헤어진 이후로 강민혁의 행군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웬만한 몬스터는 마법 없이 검으로만 처리하는 것이 가능했다.
푹!
고르륵.
몬스터가 피거품을 물려 쓰러졌다.
그 뒤로, 넓게 펼쳐진 블라디미르의 모습이 보였다.
목적지에 도달한 강민혁은, 이미지 메모리 마법을 사용해서 지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블라디미르는 뱀파이어(Vampire)가 지배하는 땅이다. 밤에는 그들의 감각이 예민해져서 비밀리에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는 뱀파이어의 힘이 극도로 약해진다.]
이어서 심연의 위치가 표시되었다.
블라디미르의 지하.
그 깊은 곳에 심연이 존재하고 있었다.
사방에 뱀파이어들이 도사리고 있어 조금이라도 방심한다면 위험에 처하겠지만, 강민혁은 이미 위험을 감수할 각오가 되었다. 클리스만과의 만남. 수년 전에 시작되었던 그와의 관계는 확실하게 정리해야만 한다. 이제는 그가 아니더라도 몬스터의 멸살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겠지만, 강민혁은 그러한 목표를 클리스만과 같이 이루어내길 바랐다.
하루는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지도에 나온 대로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 강민혁은 지도에 나온 장소로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마침내 도착한 장소.
그런데.
“...이게 심연이라고?”
강민혁의 눈이 커다래졌다.
믿을 수 없었다.
심연.
악마가 살아가고 있는 공간.
그것의 모습은, 마치 ‘차원의 균열’을 보는 것만 같았다.
차원의 균열.
강민혁의 인생에 2번이나 경험했던 공간이다.
처음에는 영국에서였다.
강민혁은 성장을 위한 도박으로 아비드에게 차원의 균열에 들어가는 권한을 얻었고, 고통 끝에 분뇌라는 엄청난 능력을 얻었다. 그때부터 강민혁에게 차원의 균열은 수련의 공간과 같은 개념으로 생각되었고, 이후에 프랑스 마법 협회와의 분쟁을 각오하고 두 번째 도전을 했었다.
마법사로서의 성장.
차원의 균열은 그것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런데 차원의 균열과 심연이 동일한 형태라니.
강민혁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심연.
그 안에는 악마가 산다.
클리스만이 이제껏 암시한 내용대로라면,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성벽을 무너트렸던 악마는 심연에서 비롯되었다.
그때였다.
문득, 강민혁은 처음 차원의 균열에 발을 들였을 때가 떠올랐다.
‘클리스만은 차원의 균열에 들어가고도 압력을 전혀 느끼지 못했어. 그리고 인류에게 공개되지 않은 미지의 존재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클리스만은 애초에 심연과 관련이 있었는지도 몰라. 그 예로 내 몸은 차원의 압력을 받아들이지 못했어. 정신의 발전 덕분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 클리스만의 육체와는 다르게 균열은 내게 친절하지 않았어.’
조각조각 나누어진 퍼즐.
그것들이 하나의 형체를 이루었다.
아직 정확한 그림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간 의문으로 남았던 것들이 맞추어지는 기분이었다.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블라디미르까지 왔다.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강민혁은 이대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클리스만.’
처음에는 단순히 그가 복수의 화신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클리스만이라는 이름에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그가 살아온 세월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 강민혁은 자신이 직접 진실의 문을 열어야만 했다.
“마지막이다, 클리스만.”
마지막.
그를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이번뿐이다.
강민혁이 앞으로 걸음을 내디였다.
그러자, 차원의 균열과 마찬가지로 심연의 어둠이 그대로 강민혁을 집어 삼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