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 39. 장벽 너머의 땅(4) >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재앙.
수많은 학생이 죽어 나갔던 그 사건이 끝나고, 사람들은 멸망의 위기감과 동시에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바로 검술.
강민혁이 등장하기 전만 하더라도, 마나를 다루는 힘은 마법사들에게만 허락되는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재앙의 혼란 속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었던 강민혁의 모습에, 사람들은 너도나도 검술을 익히겠다고 나섰다. 그야말로 검술 혁명이 일어나는 순간이었고, 세상에 마법만이 답이 아니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수호 검법을 공개하지 않았다.
엘리샤만이 제대로 된 수호 검법을 하사받았는데,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빠르게 발전하자 그들에게 가르칠 다음 레벨의 기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수호 검법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었다. 엘리샤처럼 자신이 1대1로 가르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강민혁은 위험하지 않은 대신에 위력적인 면도 떨어지는 새로운 형태의 수호 검법을 만들었다.
그로 인해 강화 전사는 네 가지의 부류로 나누어졌다.
1. 아카데미 출신
2. 엘리샤의 수호문
3. 1, 2의 사람들을 통해 검술을 익힌 사람들
4. 이도 저도 아닌 어중이떠중이들
2야말로 적통(嫡統)이라고 불리지만, 어찌 되었든 사람들은 수호문에 뿌리를 두고 검술을 익혔다.
파벨 쿠베스의 경우에는 3에 해당했다.
블랙 캐슬의 경비병이었던 그는, 반년 전에 아카데미 출신의 검사를 만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당시에 아카데미 출신의 검사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강민혁 이후에 처음으로 그럴듯한 검사들이 배출되는 시기였고, 그들은 실제로 장벽에서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강민혁처럼 일격에 몬스터들이 우수수 나가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법사와의 차이점을 보여주었다.
그때.
파벨 쿠베스는 검사를 졸졸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청했다.
어차피 마법에는 재능이 없으니, 수호 검법이라도 익혀서 강해지고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검술을 하사받았고, 6개월이 지난 지금 생각보다 뛰어난 수준의 경지에 올랐다.
나름 재능이 괜찮았다.
보통은 한 다리를 거쳐서 가르침을 받으면 엉성하기 마련인데, 파벨 쿠베스의 자세는 제법 좋았다. 애초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 편이었고, 최근에 자신의 무력이 비약적으로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파벨 쿠베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대단하신 마법사님들처럼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파벨 쿠베스의 세상에서 그는 강자로 분류되고 있는 상황.
파벨 쿠베스의 기세는 당당했다.
정찰대의 선임으로서, 강민혁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었다.
“지금부터 내가 사용하는 검술은 ‘수호 검법’이라고 한다. 네가 생각하는 그 수호 검법이 맞아. 후후후후, 그러니 내게 패배해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아도 돼.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고, 난 승리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네가 본인의 몸을 지킬 수 있는지 확인하려는 거니까.”
탁.
땅을 강하게 디뎠다.
공격 초식의 자세.
“시작!”
심판의 외침에, 파벨 쿠베스는 곧바로 땅을 박찼다.
강민혁으로서는 황당한 상황이었다.
자신이 전파한 수호 검법을 익힌 사내가, 그것도 어설프게 익혀놓고는 실력을 확인하겠다고 덤비는 꼴이라니.
‘엉성해.’
파벨 쿠베스의 자세는 정말 처참했다.
본인은 만족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저런 자세로 공격 초식을 시도하면 위력이 반감될 수밖에 없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파벨 쿠베스를 앉혀놓고 자세의 문제점을 세세하게 지적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포지션은 신입이자 길잡이다.
수호 검법과 관련된 과거가 드러나면 괜히 상황이 복잡해질 터.
입은 다물되, 어떻게 할지는 결정을 내렸다.
‘수호 검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하지만 확실하게 상대해줄 필요성은 있겠지.’
새로운 집단.
처음으로 남정네들이 득실거리는 집단에 들어갈 때, 발언권을 얻기 위해서는 얕보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남자들만의 암묵적인 룰이다. 강민혁은 길잡이로서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길 바라기에, 이번 기회를 활용해 상황을 어느 정도 정리하는 것으로 갈피를 잡았다.
고로.
타닥!
땅을 박차는 파벨 쿠베스의 모습에, 강민혁은 정면에서 맞받아쳤다.
카앙!
파벨 쿠베스의 표정이 움찔거렸다.
그로서는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방금 그가 사용한 공격은 수호 검법의 공격 초식으로서, 뒷발에 마나를 폭발시켜서 상대를 순간적으로 베어버리는 아주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그의 동료들은 백이면 백 넋을 잃고 당했던 기술인데, 방금 강민혁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공격을 막았다.
강민혁에 대한 판단을 수정했다.
제법 실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파벨 쿠베스는 전진 스텝을 밟으며 상대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카앙!
카카캉!
공격은 현란했다.
하지만 실속은 없었다.
애초에 파벨 쿠베스에게 가르침을 내렸던 검사도 진짜 수호 검법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런 사람에게 검술을 하사받은 파벨 쿠베스의 공격이 강민혁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정신없는 공방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강민혁은 흔들림이 없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확하게 파벨 쿠베스의 공격을 모조리 쳐냈고, 그러한 모습에 상황을 지켜보던 정찰대원들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와."
“제법인데?”
“파벨 쿠베스의 공격이 먹히질 않아.”
예상외였다.
파벨 쿠베스.
그는 정찰대에서는 나름 실력자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호전적인 성향과 특유의 공격적인 검법에 검술로는 그를 이기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그런 파벨 쿠베스가 지금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입이 달리 보였다.
그러한 시선을 느꼈던 걸까.
파벨 쿠베스가 이를 악물었다.
선임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발악했지만, 어떠한 공격을 하든 강민혁은 정확한 방어법을 보여주었다.
카앙!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회심의 일격이었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방어해내는 강민혁의 모습.
소름이 돋았다.
이해가 되질 않았다.
‘대체 어떻게?’
수호 검법.
그것이 각광받는 이유는 처음으로 마나를 사용하는 검술에 ‘체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몰아붙이는 검술은 웬만해서는 막기 힘든데, 강민혁의 대응은 완벽했다.
마치, 참 쉽죠? 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대체 이 녀석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강민혁을 공격하는 순간, 파벨 쿠베스의 시야에 강민혁의 검이 번뜩였다.
서걱-
일섬(一閑).
파벨 쿠베스의 앞머리가 파사삭 날아갔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상황에, 파벨 쿠베스는 그만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털썩.
“이, 이게 무슨.”
사람들이 경악했다.
그제야 인정했다.
이번에 합류한 신입은, 평범하지 않은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민혁이 히죽 웃었다.
“이 정도면 통과한 겁니까?”
기억의 한순간.
파벨 쿠베스는 확신했다.
자신에게 검술을 가르친 그 대단한 검사도, 지금의 강민혁을 상대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상황이 정리되었다.
숙소로 이동하는 길에, 본인을 정찰대의 대장이라 밝힌 모건 폭스(Morgan Fox)가 다가와 말했다.
“죄송합니다. 웬만해서는 저도 갑자기 대결을 진행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은데, 대원들의 주장이 워낙 완강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원들의 주장이 어느 정도는 옳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괜찮습니다.”
“사실 이번 정찰대는 원래 예정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저번에 정찰을 나섰던 팀이 모두 전멸을 당하면서, 다들 정찰대 합류를 망설였거든요. 그런데 뭐 어쩌겠습니까. 목이 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저와 파벨 같은 사람들은 돈이 매우 궁합니다. 파벨은 부양해야 할 가족을 위해 결국 정찰대 임무를 수락했고, 그렇다 보니 살아서 돌아가기 위해 동료의 실력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통과 의례.
그것이 처음부터 생겼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간간이 진행되었던 것인데, 지난번 정찰대가 전멸을 당한 이후로 사람들의 성향이 변했다.
정찰대는 사지(死地)에 들어가서 정보를 얻는 임무를 맡는다. 언제 어디서 어떤 위험이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등 뒤를 맡길 사람의 실력을 확인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 과정이 다소 과격해질 수 있다 할지라도, 모건 폭스 또한 파벨 쿠베스의 주장이 틀리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건 소꿉장난이 아니다.
잠깐의 실수가 생명으로 직결되기에, 모건 폭스는 무언의 승낙으로 대결이 진행되는 걸 방관했다.
강민혁으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실력을 확인하는 것.
짧은 시간에 호흡을 맞추어야 하는 정찰대의 입장에서는 피치 못 할 선택일 것이다.
모건 폭스가 말했다.
“그런데 그게 사실입니까? 세르게이 루덴코님의 말로는, 스몰렌스크와 야르체보, 사포노보의 세 가지 포인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야르체보의 지름길까지 제시했다고 말씀하시던데. 어떻게 장벽 너머의 상황을 그리도 세세하게 알고 계신 겁니까?”
모건 폭스의 태도가 호의적인 이유였다.
뛰어난 길잡이.
매우 중요한 요소다.
정찰대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포인트이기 때문에, 모건 폭스는 강민혁의 합류를 진심으로 반겼다.
“특별한 건 없습니다. 제 피가 2000년 전에 멸망했던 대한민국에서 비롯되었다 보니, 예전부터 장벽 너머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가문 대대로 장벽 너머를 탐색했고, 그래서 남들보다 조금은 많이 알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은 그래서 조금 기쁩니다. 세상이 드디어 장벽 너머를 바라보는 상황이 되었기에, 제가 가진 지식이 가치 있게 발휘되는 것이니까요.”
미리 만들어둔 스토리.
그것을 말하자, 모건 폭스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렇군요. 강민혁님이 정찰대에 합류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살기 위해서라면 모두가 강민혁님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를 테니,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간절한 음성.
정찰대의 사람들은 인류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목적을 위해, 그들은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알면서도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강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합숙 기간은 금방 지나갔다.
강민혁이 인정을 받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파벨 쿠베스를 압도적으로 쓰러트리면서 이미 무력으로는 인정을 받았지만, 강민혁의 역할은 길잡이다.
처음에는 의문을 가지던 사람들이, 장벽 너머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사를 터트렸다.
“어쩌면 이번에는 모스크바 너머의 땅에 도달할지도 몰라.”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말이었다.
만약 그 정도의 성과를 낸다면, 인당 최소 100만 파운드(14억) 이상의 보상이 지급될 것이다. 그만큼 인류는 장벽 너머의 세계를 파악하길 바랐고, 성과만 있다면 보상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시각.
세르게이 루덴코는 블랙 캐슬의 화상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블랙 캐슬의 지휘관인 프레디 로드리게스(Freddy Rodriguez)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번 정찰은 매우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세계 정부가 전쟁의 시작점이라고 말한 3년으로부터 벌써 1년 반이 지났습니다. 절반이 지나가고 있는 이 시점에, 아직도 모스크바도 벗어나지 못한 정찰대의 행보에 우려의 목소리가 큽니다. 그래서 이번 정찰에 세계인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만약 이번에도 정찰에서 이렇다 할 성과가 없다면, 전쟁은 무기한 연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화면 너머.
블랙 캐슬의 담당자들이 다들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걸 입 밖으로 내뱉기에는, 프레디 로드리게스의 단호한 태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특히 모길료프(Mogilyov)의 정찰대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모길료프.
비쳄스크와 마찬가지로 벨라루스 안에 형성된 블랙 캐슬이었다. 프레디 로드리게스는 사람들의 비난에 모길료프에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하였고, 이번에 정찰대 인원을 섭외하는데 무려 2000만 파운드(294억)라는 예산이 소모되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시선을 피하는 것과는 다르게 모길료프의 담당자는 당당한 태도로 프레디 로드리게스의 물음에 대답했다.
“믿어주십시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여기에서 끝났으면 좋았을 일이다.
모길료프의 담당자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보이던 프레디 로드리게스가, 콕 집어 한 인물을 말했다.
“세르게이.”
“에, 예?!”
“저번과 같은 일은 절대 안 됩니다. 비쳄스크의 정찰대가 전멸당한 후로부터, 여론의 분위기가 정말 좋지 않습니다. 만약 이번에도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세르게이 루덴코가 고개를 푹 숙였다.
지난 정찰.
전멸이라는 결과는 족쇄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기대를 걸기는커녕, 안전하게 복귀만 하더라도 성공이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이번에는 자신이 있는데.........'
강민혁.
그의 존재에 믿음이 생겼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죄가 있기에, 감히 자신이 있다고 섣불리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났다.
그리고 날이 밝았을 때.
[지금 정찰대가 길을 떠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방영되는 채널.
그곳에서, 길을 떠나는 블랙 캐슬 정찰대의 모습을 비추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