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165화 (165/197)

165화.  < 39. 장벽 너머의 땅(3) >

자리를 옮긴 세르게이 루덴코는, 넓은 탁자에 지도를 펼치더니 세 가지 포인트에 점을 찍었다.

“한때는 러시아의 수도였던 모스크바로 향하는 길목에, 이렇게 세 가지의 포인트가 있습니다. 스몰렌스크와 야르체보, 사포노보라고 불리는 곳이지요. 세 포인트의 거리는 스몰렌스크를 기준으로 북동쪽으로 약 102km 정도인데, 이곳의 특성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질문은 간단했다.

그러나 무심한 눈빛을 보이는 세르게이 루덴코는, 강민혁이 절대 맞추지 못하리란 확신이 있었다.

최초의 재앙으로부터 2000년.

현재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장벽 너머의 세상에 대해서 조금도 알지 못한다. 장벽 너머에는 수많은 위험이 득실거리기 때문에, 불과 1년 반 전만 하더라도 인류는 장벽 너머를 금지(禁地)처럼 여겼다. 그러나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몰락으로 상황이 바뀌었고, 본격적으로 정찰대를 편성하면서부터 장벽 너머가 생각보다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02km?

현실에서는 하루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장벽 너머에서의 102km는, 무려 수백의 사상자와 반년이라는 시간을 소모하게 만들었다.

‘세 가지 포인트는커녕, 스몰렌스크라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겠지.’

그건 확신이었다.

그간 막대한 보상에 현혹되어 길잡이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중에 진짜로 장벽 너머에 빠삭한 사람은 없었다. 사실 세르게이 루덴코도 그런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길잡이는 보통 그나마 길을 찾는 데 능숙한 사람으로 선별하였고, 그렇게 장벽 너머로 떠난 길잡이들은 1회의 정찰을 끝내고 나면 넋이 빠진 얼굴로 정찰대를 떠나버렸다.

장벽 너머의 지옥.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표정에, 강민혁은 지도를 살폈다.

‘스몰렌스크, 아르체보, 사포노보.’

알고 있는 이름이다.

강민혁의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장벽 너머의 지도에서 그에 관한 정보를 보았다.

덕분에, 정답을 말함에 있어 막힘이 없었다.

“장벽 너머가 지옥의 땅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2000년 전에 있었던 핵폭발과 게이트의 여파로 상식과는 다른 세상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몰렌스크의 경우에는 주변 일대가 전부 평평한 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땅 밑에 흐르는 엄청난 양의 가스로 인해서 산소의 농도가 희박하고 불을 피울 경우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스몰렌스크는 야영에 적합하지 않으며, 스몰렌스크에 진입하기 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한 번에 그곳을 통과해야 합니다.”

세르게이 루덴코의 눈빛이 변했다.

예상치도 못한 정답에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는 그의 모습에, 강민혁은 이어서 다른 포인트를 말했다.

“야르체보는 스몰렌스크와는 다르게 수십 개의 작은 동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야르체보를 조금만이라도 벗어나면 고산(高山)으로 뒤덮인 험난한 지형이 펼쳐지기 때문에, 정찰대의 목적이 모스크바라면 야르체보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입니다. 문제는 야르체보에 사냥꾼 몬스터들이 즐비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동산의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끊임없이 공격하기에, 출혈을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제가 지름길을 알고 있습니다. 고산을 통해 가는 길목이지만, 그 길을 통해서라면 피해 없이 통과할 수 있습니다.”

지름길.

지도에 나온 정보였다.

고산의 중턱에 형성된 길이었는데, 그곳을 이용하면 야르체보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

“사포노보는 뭐 특별할 게 없습니다. 사포노보의 밤은 매우 위험하기에, 낮 시간대를 골라서 빠르게 이동하면 크게 위험할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아는 정보는 여기까지입니다.”

설명이 끝났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건 완벽한 대답이야. 아니, 야르체보의 지름길은 정찰대조차 알아내지 못했어.’

세르게이 루덴코의 표정은, 예상치도 못한 대어를 발견했다는 사실에 경악으로 얼룩져있었다.

세르게이 루덴코의 태도가 변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그가, 말랑말랑해진 음성으로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정말 완벽한 대답입니다. 그런데 야르체보의 지름길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겁니까? 강민혁님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야르체보를 통과하는 것은 정찰대에게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스몰렌스크와 사포노보는 몇 가지 포인트만 조심한다면 무사히 통과할 수 있지만, 야르체보는 그런 요령이 통하지 않습니다. 만약 강민혁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 엄청난 성과입니다.”

“길을 알려 드릴 테니 패밀리어(familiar)를 보내 확인하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믿어야죠.”

세르게이 루덴코의 표정이 환해졌다.

상대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야르체보에는 정말로 지름길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웬만해서는 말뿐인 말을 믿지 않겠지만, 강민혁은 세르게이 루덴코가 알고 있는 정답을 정확하게 말해주었다. 99%의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니, 야르체보에 대해서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어.

진짜 길잡이였다.

정찰 일정이 얼마 남지 않아서 길잡이는 포기한 상태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성과를 얻었다.

“그런데 어떻게 장벽 너머에 대해 그리 빠삭하게 알고 있으신 겁니까?”

“제 이름만 봐도 아시겠지만, 집안에 먼 조상이 대한민국의 출신입니다. 지금은 멸망해버려서 그 명맥이 완전히 끊겨버린 나라지만, 조상의 뜻을 따라 장벽 너머의 세상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장벽 너머를 조사한 세월에 제법 됩니다. 제가 나이를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았습니다만, 장벽 너머에 대한 지식만큼은 세계 제일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역시!"

감탄사를 터트리는 세르게이 루덴코.

이제는 강민혁에게 완전히 빠졌다.

강민혁의 신상을 알기 위해서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강민혁은 그 과정에서 본인을 검사라고 밝혔다.

마법사라는 사실은 일부러 숨겼다.

H-7의 효과로 강화 전사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 마법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 굳이 공개하지 않았다. 어차피 정찰대에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길잡이의 역할. 뛰어난 신체 능력만 있으면 무리 없이 해낼 수 있는 역할이기에, 괜히 고서클의 마법사라는 사실을 밝혀서 경계를 받을 이유는 없었다.

세르게이 루덴코가 말했다.

“정찰대의 일정이 많이 늦어진 상태라, 7일간의 합숙 기간이 끝나면 곧바로 실전에 투입될 예정입니다. 보수는 파운드를 기준으로 30만 파운드(4억 4,255만) 정도이고, 성과에 따라 그 이상의 보상도 지급해드리겠습니다. 보통 초행 길잡이들은 10만 파운드 아래로 지급하는데, 강민혁님은 그만한 대우를 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건은 괜찮으십니까?”

“예."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손을 내미는 세르게이 루덴코.

강민혁도 웃는 얼굴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날 저녁.

강민혁은 내일부터 정찰대에 합류하는 것으로 일정을 잡은 뒤에, 숙소로 돌아와 지도를 확인했다.

[장벽 너머의 지도]

수백 페이지로 이루어진 두꺼운 지도에는 장벽 너머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있었다. 세르게이 루덴코가 대단한 성과처럼 여기던 세 가지 포인트는 초반에 잠깐 나오는 정도로 비중이 떨어지는 정보였고, 그 외에도 모스크바를 넘어서 넓은 땅덩어리에 대한 정보가 한눈에 보였다.

대단했다.

클리스만은 어떻게 이러한 정보를 모을 수 있었을까.

자신과 빙의하기 전의 육체적인 능력을 생각한다면, 사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것들은 말이 되질 않았다.

‘화이트 캐슬과 연관이 있는 걸까.’

사실 그들이라 할지라도 장벽 너머의 지도는 명확한 해답이 되지 않는다. 화이트 캐슬은 세상의 평화를 위해 앞장서는 집단이기에, 그들이 알고 있었다면 지도는 이미 공개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미스터리한 상황.

확실한 건, 강민혁은 사람들에게 지도를 공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도의 정보는 과했다.

이걸 사람들에게 공개했다간 출처를 의심받을 확률이 높을 테니, 당분간은 길잡이의 역할에 충실할 생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데다, 길잡이라는 포지션이라면 강민혁으로서 이 세상에서 기반을 형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7서클 마법사라는 사실을 밝힌다면 금방 높은 위치에 올라설 수 있겠지만, 클리스만의 의도를 모르는 상황에서는 조심스럽게 행동할 필요성이 있었다.

차락-

책장을 넘겼다.

두뇌 능력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지만, 지금은 지도의 정보를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읽고 또 읽었다.

혹시라도 놓친 부분이 있는지.

이미지 메모리(image memory) 마법으로 지도의 내용을 저장해두었고, 강민혁은 한참이나 지도의 정보를 읽은 뒤에 불태워버렸다. 클리스만이 전달한 방식은 그의 존재가 노출될 수도 있기에, 나중에 사람들에게 지도를 전파할 생각이라면 그때 상황에 걸맞게 새로 만들 계획이었다.

‘넌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거냐.’

창밖.

하늘에 걸친 달을 바라보며, 강민혁은 클리스만을 떠올렸다.

어쩌면.

강민혁은 이번에 그를 직접 만날지도 모른다.

머릿속의 기억으로 그를 더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클리스만을 말이다.

심장이 뛰었다.

이번에야말로.

강민혁은 클리스만이 감춘 진실을 알아내길 바랐다.

다음날.

정찰대에 합류한 강민혁은, 세르게이 루덴코의 안내를 받아 정찰대로 보이는 사람들 앞에 섰다.

“저는 강민혁이라고 합니다. 정찰대에서는 길잡이의 역할을 맡았고 당분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짝짝짝-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강민혁을 신경 써서 챙겨주라는 세르게이 루덴코의 신신당부에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지만, 그들의 눈빛은 아직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보통 정찰대에 합류하는 사람들은 블랙 캐슬에서의 활동을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번 정찰대는 새로운 인원으로 편성되지만, 블랙 캐슬에서 오가며 얼굴을 본 사이이기 때문에 크게 마찰이 일어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뉴페이스는 다르다.

정보가 없다는 것은 불신을 의미하고, 그런 경우에는 정찰대의 통과 의례 같은 것이 있었다.

한참을 떠들어대던 세르게이 루덴코가 자리를 떠나자마자,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드디어 길잡이가 들어왔는데 실력을 한번 확인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이, 길잡이. 어때? 너만 괜찮다면, 내가 직접 상대해주고 싶은데.”

파벨 쿠베스(Pavel Kubes)라는 이름의 사내였다.

흔히 있었던 일인 모양인지, 파벨 쿠베스의 말에 다른 정찰대원들은 흥미 어린 눈빛을 보였다.

남정네들이 모인 자리.

실력의 확인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서로의 실력을 알아야 위기의 상황에서 효율적인 대처를 할 수 있기에, 강민혁은 파벨 쿠베스의 요청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벽 너머는 정말 위험한 세상이다. 목숨을 걸고 정찰의 임무를 맡은 사람들에게, 세르게이 루렌코와 같은 명령권자의 말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그러죠.”

“오오.”

“깡 좋은데?”

주변에서 열광적인 반응이 터져 나왔다.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

그것만으로도 강민혁을 반길 이유로는 충분했다.

파벨 쿠베스는 강화 전사인 모양인지, 적당한 크기의 장검을 들고 강민혁을 마주 보았다.

어느새 정찰대원 중 한 명이 심판을 자처했다.

“이건 목숨을 건 결투가 아니라, 서로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한 간단한 대련이야. 둘 다 그 사실을 명심하라고.”

“당연하지.”

척-

자세를 잡는 파벨 쿠베스.

그런데 그 모습에, 강민혁은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설마.’

파벨 쿠베스.

그의 자세가 매우 익숙했다.

어깨너비로 벌어진 다리와 어느 방향에서든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최적화가 되어 있는 자세.

수호(守護)의 묘리가 담긴 자세가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강민혁은 클리스만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검술을 알려주기 위해 수호 검법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을 전파하였다. 그 말인즉, 파벨 쿠베스는 수호 검법을 터득한 검사라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

파벨 쿠베스는, 수호 검법의 시조를 알아보지 못한 채 진지한 표정으로 강민혁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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