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163화 (163/197)

163화.  < 39. 장벽 너머의 땅 >

아주 잠시, 강민혁은 현실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정말 클리스만의 세상일까?’

당연한 의문이었다.

자신의 본능은 이곳이 클리스만의 세상이라 말했지만, 비현실적인 상황은 정확한 확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를 다닐 당시 머물렀던 숙소와 비슷한 형태였는데, 더욱 허름하고 방음이 잘 안 되는 모양인지 문밖에서 남정네들이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일단 가디언 마탑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강민혁은 조심스럽게 창가로 다가가서 문밖의 풍경을 보았다.

“...진짜구나.”

문밖의 세상.

특별한 건 없었다.

일반 사람들이 사는 소소한 풍경이었지만, 그 안에는 마법 문명의 흔적들이 녹아들어 있었다. 강화 문명과 마법 문명은 생활 양식이 다르다. 두 세상을 수년간 경험했던 강민혁이기에, 간단한 마법 물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모습만으로도 강민혁은 마법 문명을 알아보았다.

그러자 의문이 생겼다.

대체 왜?

자신은 클리스만의 몸이 아니라, 강민혁의 몸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클리스만은 언제고 나를 이 세상에 소환한다고 말했어. 하지만, 지금은 그 시기에 걸맞지 않아.’

클리스만이 말한 시점.

강민혁이 세력을 이루고 강화 문명에서 몬스터를 공격하면, 힘이 필요한 타이밍에 자신을 소환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강민혁은 아직 강화 문명의 힘을 하나로 뭉치지 못했고, 마법 문명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엔 7서클의 경지에 불과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소환 타이밍에는 걸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자연스레 자신이 던진 마지막 물음과 연관을 지었다.

‘설마 내 경고 때문인 걸까.’

클리스만의 몸을 떠나기 전.

강민혁은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앞으로 우리의 관계가 계속 지속되려면, 적어도 화이트 캐슬과의 관계와 네가 생각하는 계획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말해주어야 할 거야. 신뢰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네가 나로서는 공감하지 못하는 행동들을 계속한다면, 나도 너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건 일종의 경고였다.

강민혁은 클리스만에게 진실을 바랐고, 클리스만의 대답은 황당하게도 자신을 소환하는 것이었다.

이게 그의 대답인 걸까?

아니면, 클리스만은 대답을 회피한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사실 강민혁은 클리스만으로부터 힘을 얻었지만, 최근에는 그를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클리스만은 화이트 캐슬과 연결고리가 있을 만큼 강한 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몰락을 방관하였다. 그것은 클라스만의 목적과는 다른 행보였다. 몬스터를 증오하고 그들의 몰락을 바란다면, 적어도 방관하는 선택을 내려서는 안 됐다.

“후우.”

숨을 깊게 내뱉었다.

폐부 깊숙이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들어서자, 잠깐이지만 맑아진 머리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걸음을 돌렸다.

숙소 안.

이곳에 클리스만의 메시지가 남겨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나 다를까.

옷장을 뒤적거리자, 그 안에 하나의 책과 편지가 보였다.

[장벽 너머의 지도]

책은 지도였다.

장벽 너머의 지리를 기록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세세하고 장벽 너머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옳은 길을 안내할 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의 특성과 위험한 요소와 같은 다양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걸 읽으며 강민혁은 놀란 기색을 보였다. 클리스만이 장벽 너머의 땅을 완벽하게 파악한 것도 대단했지만, 장벽 너머는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땅이었다. 적어도 이 책의 내용 ㅜ대로라면, 왜 그곳이 지옥의 땅이라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한 장소.

한때는 블라디미르(Vladimir)라 불렸던 도시에, 심연(深制)의 통로라고 기록되어 있는 장소가 있었다.

‘심연의 통로라면,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성벽을 무너트렸던 그 악마와 연결되어있는 장소인가.’

심연의 통로와 심연의 악마.

이름에서 둘의 연관성이 보였다.

책은 이만 덮었고, 편지를 확인하자 클리스만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너에게는 앞으로 30일의 시간이 허락될 것이다. 장벽 너머, 심연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

“...심연이라.”

신뢰에 대한 물음.

그에 대한 대답으로, 클리스만은 자신의 소환과 심연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그를 믿어야 할까.

아니면, 그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그렇다고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었다.

‘일단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자.’

클리스만의 세상.

그간 얼마의 시간이 흘렀고, 어떤 일이 있었을까.

강민혁은 책과 편지를 품 안에 챙기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상대로 숙소는 허름한 여관이었다.

아래는 식당처럼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들을 통해 생각보다 쉽게 주변의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흑맥주를 들이킨 거한은, 수염에 거품을 묻힌 채로 떠들어댔다.

“이곳이 어디냐고? 이런 얼빠진 친구를 보았나. 이곳은 벨라루스에 있는 블랙 캐슬(Black Castle)이야. 흔히들 장벽 안의 마을이라고도 부르지.”

장벽 안.

이곳이 바로 몬스터 랜드와의 경계선이었다.

벨라루스와 러시아의 국경에 장벽이 설치되었고, 블랙 캐슬이 위치한 비쳅스크(Vitsebsk)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몬스터와의 전쟁을

삶의 업으로 삼았다. 거한은 아마도 블랙 캐슬의 경비병인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그의 말동무를 자처하자 대략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은 왕실 아카데미의 재앙이 발발한 지 1년 반이 지난 시점이야. 내가 1년 동안 클리스만으로서 살았으니, 내가 떠난 후로부터 6개월의 시간이 지났어.’

생각보다 시간은 오래 지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자잘한 정보는 많았다.

장벽 너머로 향하는 정찰대가 번번이 실패하는 바람에 그간 육성한 강화 전사들도 본격적으로 현장에 투입되기 시작했고, 보급형 골렘들도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었다. 인류는 강민혁이 기억하고 있던 대로 착실하게 3년 후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클리스만의 소식도 있었다.

“최초의 검사인 클리스만님? 그분은 6개월 전쯤에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내셨어. 그때 몬스터들의 공격이 있었는데, 클리스만님의 검술에 몬스터들이 아주 도륙을 당해버렸지. 그날 완전히 반해버렸다니까? 마법이 발전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그런 검술을 연마했는지 신기하더라고. 그러고 한 3개월간 블랙 캐슬에서 활동하다가, 얼마 전부터는 장벽 너머에서 모습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있었어.”

정보는 그게 끝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클리스만이 아직 살아있으며 장벽 너머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클리스만의 요구였다.

장벽 너머.

심연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은, 현재 그의 위치가 블라디미르라는 말일 터.

‘알려진 바에 의하면 블라디미르는 아직 파악되지 않은 땅이야. 정찰대는 1년 반 동안 끊임없이 장벽 너머를 탐색해보려고 했지만, 아직도 모스크바 너머의 땅에는 발길이 닿지도 못했어.’

정찰대.

그들의 실패는 지금 전 세계적으로 걱정거리였다.

전쟁을 대비하고 있지만, 장벽 너머의 험난한 환경에 정찰대는 그간 유의미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몬스터 랜드는 러시아를 시작으로 한국까지 이어져 있다. 그 넓디넓은 땅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을 모두 소탕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모스크바도 넘지 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였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몬스터와의 전쟁은 시기상조라는 우려의 목소리와 더불어, 다시 장벽 안에서 안전을 도모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여러모로 복잡한 상황.

지금과 같은 시점에, 클리스만은 대화의 장소로 블라디미르를 바랐다.

‘내가 사람들에게 옳은 길을 제시하길 바라는 걸까.’

장벽 너머의 지도.

그것의 목적은 명백했다.

강민혁은 고민에 빠졌다.

클리스만은 자신이 이 지도를 가지고, 사람들을 이끌고 블라디미르로 향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

대답을 회피한 클리스만을 믿어도 되는 걸까.

‘적어도, 그와 한번은 대화할 필요성이 있어.’

강민혁의 힘.

그것은 클리스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의 행보에 의문이 떠오르지만, 적어도 바로 끊어내기엔 그간 클리스만과 쌓아온 관계가 있다.

그리고 심연이란 단어에 본능적으로 이끌렸다.

쿵쿵 뛰는 심장이, 블라디미르행을 바라고 있었다.

‘딱 한 번. 이번이 마지막 타협이다.’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곧바로 길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

강민혁에게 주어진 시간은 30일.

들은 소문에 의하면, 앞으로 정찰대의 모집 기간은 5일 정도가 남았기에 시간적인 여유는 충분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마법 문명.

강민혁은 이곳에 존재하는 절호의 기회를, 그냥 허무하게 날릴 생각이 없었다.

강민혁은 항상 클리스만의 세상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에, 그러한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강민혁은 마법 문명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행한 일은, 암암리에 거래가 이루어지는 특수한 상점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딸랑.

“어서 오십시오!”

허름한 간판.

‘한스네 잡화점’이라는 현판을 내건 곳을 방문하자, 평범한 얼굴의 사내가 환한 얼굴로 강민혁을 반겨주었다. 이곳은 안이나 밖이나 특별한 것이 없었다. 실제로도 강민혁보다 먼저 온 손님은 평범하게 목공용 물품을 몇 개 사고 나갔지만, 강민혁은 잡다한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른 손님이 모두 나가자.

강민혁은 한스에게 다가가 말했다.

“로브, 그 안의 물품을 확인하길 바랍니다.”

“...로브요?”

한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로브 안의 물품.

그것은 특수한 암호였다.

그걸 말하면 보통은 상대를 손님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한스가 마땅치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디서 암호를 주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레이 로브는 아무나 거래를 진행하지 않습니다. 본인의 신분을 보증할 방법이 있습니까? 그게 없다면, 거래는 진행할 수 없습니다.”

그레이 로브.

마법의 3대 세력.

그들은 전 세계에 비밀 상점이라는 곳을 운영하였다. 일반적으로는 구할 수 없는 특수한 마법 물품을 판매하는 곳인데, 보통 그레이 로브의 암호를 아는 사람들은 신원이 증명되는 고위직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딱 보아도 일반인으로 보이는 강민혁이 말을 걸자, 한스의 반응이 좋을 수가 없었다.

강민혁도 예상했던 반응.

사실, 이 세상에서 강민혁의 신분을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그레이 로브의 암호도, 클리스만으로 살아가던 시절에 그들이 먼저 암호를 알려주어서 알게 되었다.

특별한 신분.

그들에게만 허락되는 거래.

강민혁은, 그레이 로브의 상점에 마법 문명의 정수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내가 이 세상으로 이동하면서 M-1이 같이 옮겨졌어. 그 말은, 이곳에서 아티팩트를 얻으면 내가 사는 세상에 가져갈 수 있다는 뜻이 되겠지. 이번에는 클리스만이 내게 마법 지식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아티팩트를 얻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야. 강화 문명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기술의 한계로 아티팩트 제작에는 번번이 실패했었으니까.’

장인의 기술력.

그들의 능력을 강화 문명에서 발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에, 강민혁으로서도 벽에 부딪힌 부분이었다.

문제는 자신의 이름에 힘이 없다는 것이다.

강화 문명에서는 세계 최강의 마법사라 불리지만, 클리스만의 세상에서는 강민혁은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했다.

한스의 눈빛에는 불신의 기색이 역력했다.

‘신원을 증명하기 힘들다면 상대가 탐낼만한 물건을 제시하면 돼. 그리고, 내게는 그에 어울리는 것이 있어.’

강민혁이 웃었다.

“혹시 물물교환은 가능하겠습니까?”

“예?"

한스가 표정을 찌푸렸다.

물물교환.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간이 거래하던 단순하지만 정확한 방식.

하지만 한스의 입장에서는 개수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평범한 물건을 취급하는 곳이 아닙니다.”

명백한 거절.

네까짓 것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 얼마나 대단하던, 우리의 수준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뉘앙스였다.

“그거야 확인하면 될 일이지 않습니까?”

강민혁이 무언가를 꺼냈다.

허름한 책 하나.

한스는 처음에는 확인도 해보지 않으려 했으나, 강민혁의 강한 눈빛에 결국 책장을 펼쳐보았다.

그러자.

“이, 이걸 거래하겠다고요?”

경악으로 물드는 한스의 얼굴.

강민혁이 건넨 책.

그 안에는, 최상급 7서클 마법이 있었다.

강민혁은 빈털터리다.

하지만 머릿속의 지식은 다르다.

클리스만이 알려준 지식은 마법 문명에서도 대단한 것이 많았고, 강민혁은 그것을 적절하게 활용했다.

최상급 7서클 마법.

강민혁은 십수 가지의 7서클 마법을 알고 있기에, 그중 몇 가지를 거래의 품목으로 삼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식이야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7서클 마법의 경우에는 이 세상에서도 보물이라고 할만한 것이기에 그레이 로브라 할지라도 반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였다.

한스의 태도가 변했다.

“손님, 그레이 마켓(Gray market)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극진한 태도였다.

한스는 잡화점의 지하로 통하는 통로를 개방하였고, 마법 불빛을 밝히며 조심스럽게 안내했다.

이동하는 길에, 그가 슬쩍 물었다.

“혹시 따로 원하는 물품이 있습니까?”

“글쎄요. 그건 직접 보고 판단할 생각입니다.”

“그렇습니까? 아마,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세상에서 그레이 마켓보다 대단한 마법 물품을 보유한 곳은 없습니다. 이 한스의 이름을 걸고, 아니 그레이 로브의 이름을 걸고 자부합니다.”

탕탕-

가슴을 내리치는 한스.

사실 7서클 마법을 확인하고부터는 그의 심장이 격하게 뛰고 있었다.

최상급 7서클 마법.

그건 엄청난 보물이었다.

그리고 마법서는 다른 아티팩트들과는 다르게, 다양한 사람이 터득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드시 붙잡아야 해.’

생각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웬 날파리가 꼬인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특급 고객으로 보이는 상황.

그리고 강민혁은 분명히, 보유하고 있는 7서클 마법이 이것보다 많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머릿속에 종이 울렸다.

본능이 말했다.

이번 거래는 대박일 거라고.

그래서 그는 가장 높은 등급의 상점으로 안내했다.

어차피 그레이 마켓의 특성상, 상대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도난은 불가능할 터.

그가, 상점의 문을 개방했다.

“웰컴 투 유토피아!”

그의 말대로였다.

그레이 마켓.

그곳엔, 마법사들의 유토피아가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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