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 38. 심판의 시간(6) >
강민혁은 직접 라 피암마의 본거지인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방문했다. 비밀리에 진행된 만남이었고, 로브를 푹 눌러쓴 강민혁이 신분증을 제시하자 알아서 비밀 공간으로 안내해주었다.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크게 고생한 건 없습니다. 회담 이후에도 유럽에서 지내고 있어서, 그다지 멀지 않았습니다.”
“아하하, 그렇습니까?”
털털하게 웃는 프란체스코 두란테.
그런데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서로의 언행에는 예의가 있었으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은 서로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있었다.
양쪽 세계의 거인.
강민혁은 자리에 앉더니,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곧바로 본론부터 말했다.
“괜히 시간 끌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계 마법 연합의 수뇌부들이 무너지면서, 앞으로 가디언 마탑이 새로운 세계 마법 연합을 이끌어 갈 생각입니다. 새로운 미래에는 새로운 관계가 필요한 법. 유럽을 대표하는 라 피암마의 지도자에게, 몇 가지 선택지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재앙 상황을 대비한 연합의 형성입니다. 이번에 발발한 아웃브레이크 현상으로 인해, 세상의 상식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수만의 몬스터가 던전에서 출몰한 것처럼, 앞으로는 그와 비슷하거나 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안일하게 대응할 수는 없습니다. 명확한 체계가 있어야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류는 위기를 넘길 수 있습니다.”
“흐음.”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묘한 미소를 보였다.
연합의 형상.
매력적인 제안이다.
벨라루스에서 대규모 전투를 치르면서,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마법사의 활용성을 진심으로 인정했다.
과거에는 마법의 위력이 너무나도 약했다. 그들을 지킨다고 심력을 소모하는 것이 손해라고 생각되었을 정도로, 마법사의 가치는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데 마법 혁명 이후로는 상황이 달라졌다. 전체적인 마법 위력의 상승과 6서클의 개방은, 마법사의 가치가 달라졌음을 현실로 보여주었다.
강화 전사와 마법사의 조합.
이상적이었다.
두 세력이 힘을 합친다면, 확실히 웬만한 위기는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가디언 마탑과의 화합은 그들의 세력이 확장하는 것을 도와주는 선택이 되겠지.’
강민혁은 말을 참 재밌게 했다.
가디언 마탑은 아직 세계 마법 연합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런데 강민혁은 마치 그러한 상황을 사실인 것처럼 말하고, 대담하게도 자신과의 자리를 만들었다.
강민혁도 아는 것이다.
자신이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간파했다는 사실을. 그렇지 않고서 이런 언행을 보일 수는 없다. 저 당당한 태도를 보라. 의도적으로 세계 마법 연합의 수뇌부들을 한순간에 쓸어버렸지만, 그런 것을 자신이 알아챘다 하더라도 전혀 상관없다는 눈치이지 않은가. 특히 앞으로 세계 마법 연합을 이끌겠다고 말하는 것이, 강민혁이 어떤 사람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역시 패왕의 자질을 타고 났어.’
강민혁은 맹수였다.
지금이야 협상의 자리라서 날카로운 이빨을 숨기고 있지만, 그는 라 피암마의 이름에도 위축되지 않았다.
“괜찮은 제안이네요. 하지만 선택지는 전부 들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상하게, 첫 번째는 영 끌리지가 않아서.”
애매한 대답.
상대를 떠보려던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곧바로 이어진 강민혁의 대답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두 번째는 전쟁입니다. 라 피암마가 협력을 택하지 않는다면, 우리로서는 앞으로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전쟁.
그 단어에, 분위기가 살벌하게 변했다.
“지금 전쟁이라 하셨습니까?”
날카로운 음성.
방금까지는 그래도 순탄한 분위기였지만, 전쟁이 언급되는 순간부터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예.”
“예라니. 참으로 재밌는 말만 골라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곳은 라 피암마의 본거지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 앞에서, 라 피암마와 전쟁을 벌이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살의(殺意)가 일었다.
위협적인 기세에도, 강민혁은 상대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대화를 위해서는 일단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이번 아웃브레이크 현상은 세계 각국에 똑같은 위기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벨라루스의 민스크,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한국의 구미 등. S등급 던전이나 게이트가 생성된 지역이 아니라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라 피암마의 경우에는 이탈리아의 재앙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요. 그런데도, 라 피암마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라 피암마.
재앙이 발발하고, 그들은 이탈리아의 재앙을 빠르게 정리했다.
그리고는 주변 국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안정을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이탈리아에 남았다.
강민혁은 그것을 지적했다.
라 피암마와 프랑스 마법 협회.
둘은 다르지 않다.
양쪽 모두 재앙을 이용하려고 했고, 다만 라 피암마는 적어도 자신의 동맹 세력을 버리진 않았다.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세계의 상식이 무너졌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아웃브레이크보다 더한 위험이 세상에 닥치겠지요. 저는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 인간 내부의 불안한 요소를 남길 생각이 없습니다. 믿을 수 없는 동료는, 오히려 적보다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선택을 내리십시오. 첫 번째 제안을 거절한다면, 저는 돌아가는 대로 전쟁을 선포할 것입니다.”
극단적이었다.
화합이냐, 전쟁이냐.
감히 피렌체에서, 강민혁은 프란체스코 두란테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아, 그리고 세 번째 선택지는 없습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상대의 대담함에, 황당한 감정을 넘어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말했다.
“우리의 태도가 못마땅했다는 사실은 인정하겠습니다만, 자신 있습니까? 전쟁에서 이길 자신이?”
“제가 오히려 묻고 싶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벨라루스의 전투에서 경험한 가디언 마탑의 힘은, 제 제안을 무시해도 될 정도의 수준이었습니까? 그렇다면 결단을 내리시면 됩니다. 이 자리에서 제 목을 날리고, 세계 마법 연합을 장악하면 앞으로 강화 전사들을 방해할 걸림돌은 없겠지요. 물론 그냥 당해준다는 말은 아닙니다.”
화악-
마나가 일었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
강민혁은 프란체스코 두란테라는 세계 최강의 강화 전사를 앞에 두고, 근접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담했다.
아니, 무식할 정도로 용감했다.
문제는 강민혁의 발언이 허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할지라도, 강민혁은 어떻게든 반격해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세상에 이런 마법사가 있었던가.
없었다.
강민혁은 돌연변이였다.
강화 전사였던 과거로부터 비롯되었는지, 강민혁의 기질은 명백히 강화 전사의 것이었다.
‘화합과 전쟁이라.’
극단적인 선택지.
사실, 말이 선택지지 선택의 권한은 없었다.
강민혁은 영웅이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강민혁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는 지금, 강민혁을 처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일반인들이 아무리 힘이 없다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모이면 라 피암마라 할지라도 버틸 수 없는 법이다. 지난 과거가, 명분과 평판을 무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었다.
이길 자신은 있었다.
다만, 피해가 만만치 않을 터.
재앙이 정리되고 있는 지금은 피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강민혁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을 걸었다.
웬만한 사람은 알아도 행동에 옮길 수 없겠지만, 대담하게도 강민혁은 상상을 현실로 보여주었다.
‘앞으로 세계의 판도가 재밌게 변하겠어.’
상대를 인정했다.
인류를 위한 선택.
지금은 한발 물러설 가치가 있었다.
“첫 번째를 선택하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마나를 거두는 강민혁.
그 모습에,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씨익 웃었다.
평화가 오래가리라고는 장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시한폭탄과도 같은 관계를, 인류를 위해서라면 당분간 유지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이델베르크의 학살은 계획된 시나리오다.
강민혁은 사건이 발발한 직후, 프란체스코 두란테와 만나기 전에 세계 마법 연합에게 연락을 돌렸다.
“가디언 마탑의 이름으로 새로운 세계 마법 연합을 창설할 생각입니다. 우리가 연합의 구성원에게 바라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같이 재앙을 대비하고, 필요한 상황에 힘을 합치는 것. 그것 하나만 지켜준다면 연합의 울타리로 끝까지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마법사로서의 성장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과 물자도 지원해줄 것입니다.”
조건은 매력적이었다.
프랑스 마법 협회처럼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만 하는 딱 하나의 의무만을 바랐다.
그럼 새로운 울타리를 얻을 수 있다.
앙투안 발라르와는 신뢰도가 달랐다.
벨라루스 마법 협회를 버림으로써 세계 마법 연합의 사람들은 앙투안 발라르를 믿지 못했지만, 강민혁의 경우에는 독일 마법 협회를 구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향했다. 그뿐만인가. 벨라루스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는, 강민혁의 발언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전달된 조건.
그 대상은 각 연합의 2인자였다.
강민혁은 적당한 타협안을 제시했다.
상대가 어떤 인물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선을 넘은 대가는 그들의 우두머리들이 모두 치렀기에, 그 밑의 사람들에게는 변화의 여지를 남겼다.
그들은 엄연히 선택권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모두 깨끗한 인간만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인간의 본질이란 완벽히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만 걸러서 받아들이다 보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래서 강민혁은 항상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만을 허용한다. 그 영역 안에서는, 어떠한 변수가 생긴다고 한들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계 마법 연합.
그들은 이제 강민혁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강민혁의 제안에, 가장 먼저 나선 세력은 바로 벨기에 마법 협회의 세바스타인 페레스였다.
[벨기에 마법 협회는 가디언 마탑을 지지하겠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각국의 마법 협회와 마탑이 가디언 마탑을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강민혁은 순식간에 세계 마법 연합이라는 거대한 덩어리를 집어삼켰다. 그 과정에 반발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앙투안 발라르와 같은 주요 인물들이 사라지면서 강민혁에게 대항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
무혈입성(無血入城).
판도가 변했다.
사람들은 이제, 마법 학계는 강민혁의 손아귀에 있다고 말했다.
재앙이 발발하고 한 달 뒤.
[새로운 세계 마법 연합의 창설을 선포합니다.]
강민혁의 선언.
강민혁이 드디어, 마법 학계 정상의 자리에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바쁜 시간이 지나갔다.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지지를 받은 강민혁은, 각 대륙을 대표하는 강화 전사들과도 협상의 자리를 가졌다.
명분은 재앙을 대비한 합동 훈련.
다들 큰 문제 없이 승낙했다.
한바탕 재앙을 경험하고 나니, 그들은 더 이상 강민혁의 준비가 의미 없다고 말하지 못했다.
재앙은 기회가 되었다.
인간이란 항상 계산기를 두드리는 동물이지만, 재앙의 여파가 잠시나마 순종적인 협상 태도를 유도했다.
그러는 사이 한 가지 이슈가 있었다.
바로 오창석.
경비3팀의 대장인 그를 받아들여 자체적으로 강화 전사 세력을 형성하자, 한국의 강화 전사 단체에서 반발이 있었다. 그러나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예전 같았다면 그들의 압박에 마법사들로서는 백기를 걸 수밖에 없었겠지만, 강민혁의 명성은 결정을 밀고 나가는 힘이 있었다.
마법사의 위상.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아직도 강화 전사들이 우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았으나, 결국 그뿐이었다.
이제 마법사의 가치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클리스만과의 약속.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강민혁은 빠르게 세력을 성장시켰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와 만나게 될 날을.
앞으로의 행보를 명확하게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와의 만남이 한번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짹짹짹.
창밖에서 내리쬐는 햇볕.
강민혁은 눈을 뜨자마자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곳은 가디언 마탑이 아니라, 클리스만의 세상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거울 앞.
강민혁의 얼굴이 당황으로 얼룩졌다.
거울에는 아주 익숙한 얼굴이 놀란 표정을 보였다.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거라 생각했던 현실.
강민혁은 클리스만이 아니라, 강민혁 본인의 몸으로 클리스만의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