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 38. 심판의 시간(5) >
처음에는 그럴듯한 계획이 있었다.
벨라루스의 생존자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강민혁이 상당수의 병력을 잃는다면,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힘으로 무너트릴 생각이었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강민혁이 세계 최고의 마법사라 할지라도, 세계 마법 연합의 힘을 하나로 모은다면 마냥 불가능한 싸움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여론이겠지. 하지만 쓰레기라 불리는 한이 있어도, 지금 끝내지 않으면 기회는 없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벨라루스의 구출 작업을 포기한 순간부터, 세계 마법 연합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강민혁은 강화 전사들을 끌어들임으로써 큰 피해 없이 구출에 성공했다. 가디언 연합의 세력은 아직도 건재한 데다, 사람들이 강민혁을 영웅으로 추대하고 있는 상황.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 승산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도 있지만, 지금 강민혁을 공격하면 단순히 비난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외통수.
막다른 길에 몰렸다.
싸울 수도 없고, 싸운다 해도 승산이 회박하다.
곧 죽어도 자존심을 내세우겠다던 앙투안 발라르지만, 지금은 결국 최후의 수단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투항.
모두의 의견이 모였다.
세계 마법 연합이 주최한 회담은, 강민혁에게 백기를 내걸기 위한 자리였다.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문지기의 말.
앙투안 발라르는 들끓는 속을 가라앉혔다.
마법 학계의 지배자였던 그가, 이러한 선택을 내리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단 한 번의 패배일 뿐이다, 앙투안. 지금은 고개를 숙이고 강민혁을 쓰러트릴 때를 노리자. 강민혁은 이제 너무나도 위험한 존재로 성장했어. 자존심을 버리고, 실리를 택하는 것이 옳아.’
주변을 살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세계 마법 연합의 수뇌부들은 다들 착잡한 표정을 보였다. 나름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목에 힘을 주고 살았던 사람들이, 투항이라는 선택을 내리는 것에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그런데 그중에는 빈자리가 있었다.
원래는 벨기에 마법 협회장의 자리였는데, 그는 일방적으로 불참 통보를 보냈다.
‘벨기에 그 녀석들은 감히 세계 마법 연합의 명령을 어기고 지원을 나섰었지. 지금이야 강민혁의 편에 서서 권력을 움켜쥐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한순간이다. 반드시 복수를 해주마.’
“입장하십니다.”
끼익-
문이 열렸다.
앙투안 발라르는 표정을 바꾸고, 안으로 들어서는 강민혁을 바라보며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앉으시지요. 강민혁 마탑주님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 일단 간단하게 차를 준비했습니다.”
뚜벅뚜벅.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강민혁은 말없이 걸음을 옮기더니, 앙투안 발라르의 맞은 편에 앉았다.
밖으로 나가는 문지기.
철컥, 하고 문이 닫히자 강민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본론부터 말씀하시죠.”
“...알겠습니다. 일단 얘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그간 저희가 저질렀던 만행을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만약 강민혁 마탑주님이 사과를 받아주신다면, 기자들 앞에서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고 가디언 마탑을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겠습니다.”
숨을 골랐다.
차에는 손도 대지 않는 강민혁의 모습에, 앙투안 발라르는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운이 일었다.
“사실 저희도 벨라루스의 생존자들을 포기하려는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당장은 저희만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강화 전사들이 나서면 그때 가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절대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저희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지 말씀하십시오. 세계 마법 연합의 이름으로 약속하건대, 앞으로의 화합을 위해서 어떤 조건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비굴했다.
앙투안 발라르를 비롯해, 세계 마법 연합의 일원들은 감히 강민혁의 심기를 거스르지 못했다.
세계적인 영웅.
사람들의 희망으로 떠오른 강민혁을 적대했다간, 어떤 일을 당할지 그들은 잘 알았다.
강민혁의 시선이 앙투안 발라르를 향했다.
살짝 말아 올라가는 입술이, 차가운 시선과 더불어 냉혹한 느낌을 풍겼다.
“그게 끝입니까?”
“...예?”
“지금부터 제가 생각하는 시나리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예상치도 못한 전개에, 그들은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앙투안 발라르 협회장님은, 가디언 마탑이 벨라루스 생존자들을 구하는 것을 보고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아, 이대로는 세계 마법 연합이 무너지겠구나. 막다른 길에 몰렸으니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을 테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저만 없어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그게 무슨?”
“일단 들어.”
태도가 돌변했다.
강민혁이 사나운 기세를 보이자, 메두사라도 마주한 것처럼 앙투안 발라르의 몸이 굳었다.
“가디언 마탑은 나로부터 비롯된 세력. 너는 나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다가, 투항하는 척 나를 유인해서 처리하는 방법을 생각해냈어. 변명이야 만들면 되는 것이고, 일단 나만 처리하면 어느 정도는 상황이 호전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겠지. 그래서 나는 반격을 할 수밖에 없었어. 회담을 진행하는 도중에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마법을 사용하는 너의 모습에, 나로서는 가만히 당할 수 없었거든.”
“설마."
수뇌부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강민혁의 말은 타협안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진행될 상황의 시나리오.
불길한 기운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앙투안 발라르는 자리를 박차며 소리를 질렀다.
“당장 공격해!”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마나.
그들의 모습에, 강민혁이 히죽 웃었다.
그들의 반응은 빨랐다.
그러나 강민혁은 7서클 마법사다.
서클의 상관관계로 4서클 마법을 캐스팅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그에게, 서클의 차이는 절대적이었다.
“플레임.”
화륵.
화르르특!
“크악!”
“뜨, 뜨거워!”
강민혁의 마나에서 일어난 불길이 주변을 휩쓸었다. 마법을 사용하려던 수뇌부들은 속절없이 불길에 휩싸였고, 몸이 타오르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수뇌부들이 다급해졌다. 그들은 황급히 마법을 사용했지만, 강민혁의 실드는 한발 먼저 그들의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반격.
“화우.”
화르륵.
콰앙!
너무나도 손쉬운 싸움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4~5서클의 마법사들이다. 그들이 빠르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들로서는 캐스팅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일방적일 수밖에 없는 싸움. 강민혁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상대의 마법은 허무하게 막히는 데 반해, 강민혁의 마법이 작렬할 때마다 영혼을 잃은 수뇌부들이 시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학살.
바닥에 피가 흘렀다.
참혹한 현장이 눈에 빨려 들어왔지만, 강민혁은 그에 개의치 않았다.
“히익.”
앙투안 발라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대항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상대는 워 메이지.
그것도 강화 전사들을 쓰러트릴 정도로, 근접 전투에 특화된 무려 7서클의 워 메이지다.
앙투안 발라르는 상황 판단 능력이 빨랐고, 그는 반격하는 것이 아니라 황급히 문으로 달려갔다.
나가야만 한다.
살길은 밖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야속하게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쾅쾅쾅!
“열어, 이 개새끼들아! 이 안에서 강민혁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어! 우리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강민혁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고!”
발악했다.
제발 밖에 전달되기를 바라며, 그는 간절하게 소리쳤다.
그사이 어느새 다른 수뇌부들은 모두 정리되었다.
나름대로 반격을 시도했던 그들은, 그간 마법을 수련했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허무하게 당했다.
이제 마지막.
강민혁은 앙투안 발라르에게로 걸어갔다.
“소용없어. CCTV 화면은 네가 일어나는 장면에 맞춰서 끊겼을 테고, 이 공간은 사일런스(silence) 마법으로 인해서 내부의 소리가 외부로 빠져나가지 않거든. 그냥 너는 계획대로 죽어주면 되는 거야. 내 목숨을 노렸지만, 멍청하게도 당해버린 그런 녀석으로 남는 거지.”
“왜,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거야! 네 목적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라며! 그렇다면 우리의 힘이 필요하지 않겠어? 강화 전사들을 상대로 마법 학계가 자리를 잡으려면, 우리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고!”
앙투안 발라르가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검에 벌벌 떨며 소리쳤지만, 강민혁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아니, 너희는 필요하지 않아.”
처음에는 고민했었다.
세계 마법 연합.
이들을 품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그러나 그들이 선을 넘고 벨라루스의 생존자를 포기하는 것을 보며, 강민혁은 확신을 내렸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어. 그러나 너희들이 저지른 일들은 그와는 다른 문제야. 사람들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고, 이득을 위해서라면 인류의 안위 따위는 전혀 상관치 않았지. 그런 너희들이 필요할 거라고? 개 같은 소리 하지 마.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적은, 강력한 상대가 아니라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쓰레기 같은 것들이야. 회생이 불가능하다면, 당연히 처리하는 게 옳은 일이겠지. 그리고,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야.”
선택에는 명분이 필요하다.
충분히 고민하고 결단을 내렸을 때, 강민혁이라는 사람은 망설이지 않는다.
살인.
옳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강민혁은 자신이 저지른 일들에 대한 업보를 짊어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제, 제발 살려.........."
“룬 플레어.”
콰양-
화르르르륵!
그대로 작렬하는 화염.
더 이상 앙투안 발라르의 목소리로 귀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툭, 떨어지는 앙투안 발라르의 손.
마법 학계를 지배했던 세계 마법 연합 지배자의 최후라기엔, 그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했다.
끼익-
강민혁이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몰려들었다.
이건 참사였다.
언뜻 보이는 수뇌부들의 시체에, 그들은 강민혁에게 마이크를 들이밀며 상황에 대한 해명을 바랐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앙투안 발라르는 애초에 저와 회담을 진행할 생각이 없었는지, 자리에 앉자마자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반격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변명은 구구절절하지 않았다.
짧은 대답.
사건의 진실이라고 보기에는 시원한 대답이 아니었으나, 기자들로서는 감히 의심을 내비치지 못했다.
강민혁.
현재 영웅이라 불리는 사람이다.
그에 반해 앙투안 발라르는 어떤가?
벨라루스의 생존자를 포기하면서부터, 그들은 악인(惡人)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영웅과 악인의 싸움.
그 이면에 어떤 진실이 있었다 할지라도, 사람들로서는 영웅의 말만 믿고 영웅을 지지할 것이다.
그래서 명분과 평판은 중요하다.
강민혁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서늘한 기세를 드러냈다.
“그간 저는 세계 마법 연합의 만행을 참아왔습니다. 독일 마법 협회의 구조 요청을 일부러 방해하고, 벨라루스 마법 협회를 버릴 때도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참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세계 마법 연합에게 경고하겠습니다. 당장 투항하십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가디언 마탑은 세계 마법 연합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할 것입니다.”
선전포고.
평화로울 것이라고 예상되었던 회담 자리가, 강민혁의 발언에 발칵 뒤집혔다.
기사가 쏟아졌다.
뒤늦게 출동한 경찰이 사건의 진실을 밝혔지만, 강민혁의 잘못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앙투안 발라르 협회장이 먼저 공격을 하려는 장면이 CCTV 화면에 포착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는 마법의
충격으로 CCTV 화면이 끊겼지만, 강민혁 마탑주의 말대로 그들이 일부러 강민혁 마탑주를 유도해서 처리하려는 의도로 보이며..
세계 마법 연합의 선택에 전 세계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강민혁은 재앙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영웅이며, 사람들은 모두 거리로 나와 세계 마법 연합을 비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뉴스의 내용.
강민혁의 시나리오 대로였다.
명분을 가진 사람의 발언은, 1%의 진실만으로도 자신의 알리바이를 완벽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세상이 들끓었다.
세계 마법 연합을 비난하며, 강민혁에게 힘을 실었다.
재앙을 기점으로 세계 마법 연합이 와르르 무너지는 상황에,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표정이 굳었다.
“사람들이 강민혁에게 놀아나는구나.”
회담 장소는 독일의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였다.
사람들에게 하이델베르크의 참사라고 불리는 사건에,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진실을 꿰뚫어 보았다.
앙투안 발라르의 계획?
웃기는 소리다.
앙투안 발라르는 판단이 빠른 사람이고,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 강민혁이 판을 만들었겠지. 세계 마법 연합은 가디언 마탑의 행보를 방해하는 암적인 존재고, 그들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지금이야말로 완벽한 타이밍이었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놓고 학살을 벌이다니. 강민혁, 그는 무서울 정도로 과감한 인물이야.’
강민혁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실력이야 애초에 인정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강민혁은 지도자로서의 과감함마저 갖추었다.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인생을 살면서, 강민혁과 같은 사람을 패왕(覇王)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표현한다.
고로.
‘앞으로 마법 학계는 강민혁에게 그대로 흡수되겠지. 우리가 개입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그리고 강화 전사들은 선택해야 할 터. 그와 적대할지, 아니면 적정선을 받아들일지.’
호승심이 꿈틀거렸다.
벨라루스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전자 쪽으로 마음이 조금 기울었다.
아직은 확실히 결단을 내리지 못한 상황.
그때였다.
수하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삑-
[가디언 마탑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강민혁이 주군을 직접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이를 어떻게 처리할까요? 기자들에게는 만남 사실을 알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히죽.
“이것 봐라.”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웃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자신이 지금 두 가지의 선택지를 저울질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강민혁은 대담하게 만남을 요청했다.
그것도 비밀리에.
인정하지 않으려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접 만나봐야겠어.’
패왕의 자질.
어떤 선택을 내리든, 그와의 만남은 필요했다.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말했다.
“수락하겠다고 전해. 아무래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보고 싶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