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 38. 심판의 시간(4) >
수만.
만의 단위는, 실제로 보면 상상한 것 이상으로 엄청난 숫자에 압도당하고 만다.
강화 전사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로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에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에게 승리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부여한 요소는 그간 비주류라 치부했던 마법사들이었다.
“번 플레어.”
“파이어 캐논.”
“스파이럴 토네이도.”
화르르르르륵.
콰앙!
강력한 마법이 작렬하자 길이 활짝 열렸다.
정면으로 부닥치기도 전에 수천의 몬스터들이 이미 쓰러진 상태였다. 긴장감이 사르르 녹아내리면서 강화 전사들의 눈빛이 변했고, 본격적으로 부딪치자 그들의 오라가 몬스터들의 사지를 단번에 베어버렸다.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피. 인간과 몬스터가 한데 뒤엉켰다. 훗날 벨라루스의 대전투라고 불리게 될 사건이, 마침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죽어!”
푹!
크아악!
강화 전사의 검이 몬스터의 심장을 꿰뚫었다.
부르르 몸을 떠는 몬스터를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강화 전사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몬스터 무리에 몸을 던졌다. 번뜩이는 검이 수많은 몬스터를 베었다. 강화 전사들은 일당백(一當百)의 위력을 자랑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무적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앞으로 나아가던 강화 전사들 중에서도 몬스터의 공격에 당하는 사람이 속출했고, 사방에서 몬스터와 인간의 시체가 쌓여갔다.
죽고 죽이는 싸움.
애초에 피해를 감안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스무 명도 되지 않는 벨라루스의 생존자들을 살리기 위해서, 벌써 수백의 사람이 시체가 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어스 퀘이크.”
콰앙.
쿠르르르르르릉.
그 와중에 강민혁의 마법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땅이 뒤흔들릴 때마다 수백의 몬스터가 목숨을 잃었고, 강민혁은 끊임없이 마나를 분출하면서 폭발적인 화력을 보였다. 이건 일당백의 수준이 아니었다. 일당만(一當萬)에 달하는 위력. 강민혁 단 한 사람이 보여주는 퍼포먼스로 인해서, 몬스터는 눈에 띄게 줄어갔다.
그리고.
화르르르르륵.
푸확!
프란체스코 두란테를 필두로 한 강화 전사들의 위력도 만만치 않았다.
세계 최강의 검사.
그 명성은 헛되지 않았다.
강민혁처럼 수천의 몬스터를 단번에 쓰러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나, 라 피암마의 특성인 플레임 오라(flame aura)가 주변을 휩쓸 때마다 수십의 몬스터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들은 수많은 몬스터에게 둘러싸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들이 나아가는 걸음이 곧 길이 되었다.
선봉장.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엄청난 위력을 뿜어냈다.
주변을 장악하는 그의 힘에, 몬스터들마저 두려움에 떨며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발악할 정도였다.
‘내가 S등급 몬스터를 처리해야 한다.’
강민혁에게 집중된 관심.
그것을 단번에 휘어잡으려면,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강력한 임팩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던전의 주인.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그를 향해 나아갔다. 막아서는 녀석들을 모조리 베어버렸고, 그 과정에서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는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전투를 목격하고는 광란(狂亂)의 검사라고도 불렀다. 홀로 날뛰는 그의 검에, 그가 나아가는 길을 따라 핏빛 강이 형성되었다.
계속되는 전투.
수많은 인간과 수많은 몬스터가 죽었다.
프란체스코 두란테로서도, 어느 순간부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강민혁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피해가 상당했겠어.’
강화 전사.
마법사.
두 세력의 힘을 합쳐서 이 정도인 것이다.
만약 수만의 몬스터를 강화 전사들만으로 상대하려 했다면, 이보다 더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이건 정말 재앙이었다.
프란체스코 두란테로서도, 방관했던 자신의 선택이 인류에게는 해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결국 목적을 이루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그의 검에 S등급의 몬스터인 바실리스크(Basilisk)가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끼에에에엑-
풀썩!
자욱하게 일어나는 먼지.
끝났다.
판을 뒤집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본 순간,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허망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내가 들러리의 역할을 맡은 것 같군.”
그가 치열하게 싸우는 사이.
저 멀리.
벨라루스의 생존자를 구출한 강민혁이, 수많은 카메라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모습이 보였다.
벨라루스의 전투.
승리는 당연한 결과다.
최고의 강화 전사와 마법사가 힘을 합쳤으니, 피해가 있다 할지라도 실패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부각되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S등급 몬스터?
그건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몫이다.
강민혁이 아무리 강해졌다 할지라도, 하나의 적을 상대로 프란체스코 두란테보다 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을 택했다.
일단 강력한 범위 마법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자신의 마법이야말로 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강민혁은 탐지 마법을 사용해서 벨라루스의 생존자들이 숨어있는 위치를 정확히 파악했다. 그때부터는 강민혁도 전장에 몸을 던졌다. 득실거리는 몬스터의 파도에 직접 들어가서, 그들의 숨결을 코앞에 느끼며 전투를 벌였다.
캬악!
쩍 벌어지는 몬스터의 아가리.
날카로운 이빨이 어깻죽지를 물어뜯으려는 순간, 강민혁이 살짝 뒤로 물러나며 마나를 폭발시켰다.
“파이어 버스트.”
퍼엉!
화르르륵.
몬스터가 뒤로 넘어갔다.
타오르는 불길은 수많은 화염의 마법으로 변했고, 화우의 효과는 주변을 불의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다. 이후부터 진행된 강민혁의 전투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워 메이지가 무엇인지를 똑똑히 보여주는 장면이었고, 강민혁을 따라나선 가디언 마탑의 사람들로 인해 길이 활짝 열렸다.
또 다른 선봉장.
프란체스코 두란테가 S등급 몬스터를 향해 길을 열었다면, 강민혁은 벨라루스의 생존자들을 찾았다.
마법의 특수함.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탐색의 마법이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생존자들이 숨어있는 지하는 탐색하는 것이 매우 힘든 위치였지만, 강민혁의 마법에 불가능이란 없었다. 그렇게 생존자들은 구출되었다. 강민혁이 생존자를 챙겨 나오는 모습에, 멀리 위치한 방송국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저길 봐!”
“벨라루스의 생존자들이야!”
“역시! 결국 강민혁이 해냈어!”
열광하는 사람들.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의도는 빗나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무대의 주인공은 바로 강민혁이었다.
벨라루스의 재앙은 마무리되었다.
전투 끝에 마지막 몬스터까지 모두 소탕하였고, 그러한 소식은 곧바로 TV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세상을 공포에 빠트렸던 벨라루스의 대재앙이 드디어 종결되었다는 소식입니다. 가디언 마탑의 마탑주인 강민혁이 벨라루스의 생존자를 구출하겠다고 선언한 직후, 라 피암마를 비롯해서 수많은 강화 전사들이 참전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벨라루스의 생존자들은 강민혁에 의해 구출되었습니다.]
화면이 변했다.
벨라루스의 생존자들.
그간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증명하듯, 초췌한 기색의 생존자는 바짝 메마른 입을 힘겹게 열었다.
[“사실 저희는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터넷 방송을 통해서 저희의 생존 사실을 알렸지만, 벨라루스에 얼마나 많은 몬스터가 있는지를 듣고는 살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서 햇빛을 보게 될 줄이야. 크윽, 정말 감사합니다. 강민혁 마탑주님이 저희를 위해서 목숨을 걸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더라면, 저희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을 겁니다.”]
강민혁.
그의 이름은 연일 화제가 되었다.
모두가 생존자들의 구출을 포기했을 때.
강민혁은 유일하게 먼저 나서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생존자들을 구출하겠다고 선언한 사람이다.
그리고 구출에 성공한 지금.
강민혁의 결단은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는 프란체스코 두란테를 비롯한 강화 전사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시작과 끝을 마무리한 강민혁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S등급 몬스터를 처리한 프란체스코 두란테의 업적은, 역시 대단한 검사라는 언급 정도로만 끝났다.
벨라루스의 생존자.
그는 열과 성을 다해 강민혁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그러다 세계 마법 연합과 관련된 질문을 받자, 표정을 홱 돌변하더니 사나운 기세를 보였다.
[“세계 마법 연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그들은 인간쓰레기입니다. 벨라루스 마법 협회가 왜 차원 실험을 진행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세계 마법 연합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마법 협회장인 앙투안 발라르가 지원을 약속했고, 그렇게 수년 간 차원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로 인해 벨라루스가 재앙을 맞이하자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처음에는 도와줄 것처럼 행동하다가, 세계 마법 연합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자 곧바로 발을 뺐습니다. 세계 마법 연합은 이제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마법 학계를 발전시키고 마법사들끼리 서로 도와주자는 취지는, 앙투안 발라르의 야욕에 퇴색된지 오래입니다.”]
신랄한 비난.
이번 일의 중심에는 세계 마법 연합이 있었다.
재앙이 없다고 말하던 세력.
막상 재앙이 발발하자 발을 빼버린 곳.
세계 마법 연합의 행보가 부각되면서, 사람들의 비난 어린 시선이 일제히 세계 마법 연합을 향했다.
다음 날.
강민혁은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재앙은 끝났어.’
대재앙.
사람들을 공포에 빠트렸던 이번 사건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 들어가고 있었다. 실질적인 위협은 대부분 정리된 상태였고, 지금은 남아있는 몬스터들을 소탕하고 있는 상황. 당장 목숨을 위협하던 공포가 가라앉고 나면, 재앙으로 인한 피해에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강민혁이 끊임없이 주장하던 위협이 현실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순간, 인간은 변화의 여지가 생긴다.
벨라루스에서 진행된 작전은 적절하게 먹혔다.
프란체스코 두란테는 뒤늦게라도 나서서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어보려고 했지만, 강민혁은 그의 의도를 역으로 이용해서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최상의 결과를 얻었다. 덕분에 강민혁의 발언은 강력한 힘을 얻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지금은 강민혁에 언행에 관심을 보였다.
걸음의 끝.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강민혁을 발견하자, 준비해두었던 카메라를 들어 올리며 일제히 플래시를 터트렸다.
파파팟.
파파파파팟.
“강민혁 마탑주님!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세계 마법 연합이 이번 일로 회담을 요청했습니다.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계 마법 연합은 그간 가디언 마탑의 행보를 비난했습니다. 재앙은 없다고 말하던 그들은, 강민혁 마탑주님이 경고한 재앙이 현실로 닥쳤을 때 비겁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같은 마법 학계의 일원으로서 앞으로 세계 마법 연합이 존재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번 사건으로 인해서, 세계 마법 연합은 그들이 그간 주장했던 서로를 보호하는 울타리로서의 의미를 잃지 않았습니까!”
사방에서 질문이 쇄도했다.
그들의 말대로였다.
벨라루스의 전투가 마무리되고.
세계 마법 연합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간의 업보도 있었지만, 세계 마법 연합의 일원을 매몰차게 버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강민혁은 큰 피해 없이 생존자를 구출한 상황.
막다른 길에 몰렸다.
영웅으로 추대받는 강민혁을 적대할 수는 없는 상황에, 앙투안 발라르는 세계 마법 연합의 이름으로 회담을 요청했다.
그게 현재 상황이었다.
그들은, 강민혁과의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글쎄요. 회담이 끝나고 제가 생각한 것들을 대답해드리겠습니다.”
강민혁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플래시 세례를 뒤로하고 회담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회의실.
그 안의 상황은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된다.
강민혁은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김성호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들어가면 안에 설치된 CCTV 화면을 끊어버리고 곧바로 문을 잠그세요.”
“알겠습니다.”
적당한 타협?
애초에 그딴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세계 마법 연합.
강민혁은 오늘 썩은 뿌리를 완전히 제거해버릴 것이다.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는, 마법 학계는 대대적으로 변화할 필요성이 있다.
끼이익-
쿠웅.
강민혁이 들어가자 닫히는 문.
지금부터는, 심판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