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 37. 아웃브레이크(7) >
천호명은 어린 시절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이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면.
이상하게도 몸이 가볍고 힘이 넘쳤다.
처음에는 단순히 컨디션의 차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마법을 익히면서부터 확실하게 두드러졌다.
물의 지배력.
천호명은 태생부터 물의 축복을 받았다.
강민혁의 조언을 받아 정령 계약을 시도했을 때, 운디네는 그에게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당신과 계약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요.]
선명한 목소리.
천호명은 그날 운디네의 힘을 얻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서클을 매개체로 운디네의 힘을 현세에 발현시켰다.
‘정령 빙의.’
휘이익-
마나가 천호명을 중심으로 강하게 휘몰아쳤다.
정령 빙의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들었다. 천호명은 물의 지배력이 대단해서 효과가 폭발적인 대신 그만큼 리스크도 컸다. 오랜 시간 지속할 경우, 속성에 노출된 육체는 그 속성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상태로 변한다. 샐러맨더의 힘을 빌렸다면 몸이 불타오를 것이고, 천호명과 같은 경우에는 몸 안의 수분이 밖으로 터져 나올 것이다. 고로 목숨을 대가로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매섭게 빛나는 천호명의 눈빛은 죽음의 두려움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 목숨을 걸고 가디언 마탑이 옳았음을 증명한다.’
번뜩.
안광이 빛을 발했다.
충만하게 차오르는 운디네의 힘에, 천호명은 일시적으로 물 속성에 한하여 ‘7서클의 경지’에 올랐다.
“아쿠아 블레스(Aqua Bless).”
화악-
천호명의 마나가 사방으로 퍼졌다. 대기 중에 떠다니던 수분이 서로 뭉치더니, 작은 알갱이와 같은 수만 개의 물방울이 사방에 떠올랐다. 물의 힘은 치유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물방울에서 전해지는 힘에 마법사들의 고막이 회복되었고, 동시에 블러드 밴시의 공격을 차단했다.
꺄아아아아아악-
블러드 밴시의 비명.
마법사들을 고통에 빠트렸던 그것이 촘촘하게 형성된 수막(水幕)을 뚫어내지 못했다.
“어라?”
“.........어떻게?”
마법사들이 웅성거렸다.
그들로서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지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천호명의 힘으로 고막이 회복되었고, 블러드 밴시의 공격이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마법사들에게, 천호명의 목소리가 꽂혔다.
“정신 차리고 공격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들이 황급히 캐스팅에 들어가는 사이에, 천호명의 서클은 강한 회전을 일으켰다.
“씨 블라스트(Sea Blaster).”
콰앙!
콰콰콰콰콰콸!
7서클 마법.
허공에서 터져 나온 물줄기가 그대로 해일을 만들어내 몬스터들을 덮쳤다. 성벽 위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몬스터들이 한 번에 나가떨어지는 순간이었고, 그 강력한 위력에 몬스터들이 그대로 물 안으로 가라앉았다. 천호명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스펙터들이 일제히 자신에게로 향하자, 주변에 있는 물을 허공으로 띄우고서는 마법으로 변화시켰다.
“아쿠아 랜스(Aqua Lance).”
수십 발의 창.
그것이 사방으로 발사되었다.
스펙터는 하늘을 날아오르며 천호명의 사각지대를 공략했지만, 도달하기 직전 물의 창이 스펙터의 몸을 관통했다.
퍽!
파사사사삭-
그대로 소멸되는 스펙터.
천호명의 힘이 주변의 공간을 장악했다. 스펙터들이 그에게 접근하는 족족 사라져버렸고, 와이번 킹의 경우에는 물의 대포알에 맞아 황급히 천호명에게서 떨어졌다. 그러는 사이 정신을 차린 마법사들의 마법이 작렬했다. 그들은 천호명의 마법을 보고는 명령하지 않았음에도 전기 계열의 마법을 사용하였고, 물에 흠뻑 젖은 몬스터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한 차례의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일렀다.
블러드 밴시는 붉은 안광을 뿌리며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댔고, 수막은 점점 격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하늘에서 브레스를 뿜어내는 와이번 킹.
팽팽한 접전이었다.
천호명이 다시 7서클 마법을 발현시키자, 서클로부터 밀려오는 충격에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씨 블라스트.”
콰콰콰콸!
이를 악물었다.
현기증이 일었지만, 이대로 쓰러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마탑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구하러 오신다.’
강한 믿음.
강민혁을 믿었다.
천호명이 경험한 강민혁이라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이든 간에 자신의 사람을 버릴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믿었다.
어떻게든 버틸 것이다.
강민혁이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천호명은 입술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거칠게 닦아내더니, 다시 한번 마나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세계 곳곳에서 터진 재앙.
그 상황들은 각 국가의 방송사로부터 라이브로 송출되고 있었다.
[속보입니다. 벨라루스에서 실험의 용도로 사용되던 던전이 모두 개방되면서, 벨라루스에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가 풀렸습니다. 현지 소식통에 의하면 벌써 사망자가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몬스터들을 진압하지 못할 경우 인근 국가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벨라루스.
그곳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강민혁의 눈을 사로잡는 소식이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 S급 던전이 개방되었다는 소식입니다. S급 던전과 게이트에서 출몰한 블러드 밴시와 와이번 킹으로 인해, 독일 마법 협회는 지금 고립된 상황입니다. 독일 정부에서 발 빠르게 지원 병력을 보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부터 보여드리는 영상은 3km 밖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비행기 안.
마력으로 강화시킨 초고속 비행기로 독일로 이동하며, 강민혁은 TV에서 내보내는 영상을 보았다.
프랑크푸르트는 지옥이 되었다.
독일 마법 협회가 궁지에 몰릴 정도라면, 인근 민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수많은 사람의 사체가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시체를 물어뜯는 몬스터들은 얼마나 포식을 했는지, 입가가 피로 흥건하게 물들었다. 그리고 멀리서는 끝까지 저항하는 독일 마법 협회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도망칠 타이밍을 놓친 것도 있지만 처음에는 사람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수호신.
헌터들은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대신에,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걸 의무가 있다.
꽉.
“조금만 버텨라.”
강민혁이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독일.
하필이면, 그곳에 재앙이 겹쳤다.
S등급 던전의 아웃브레이크에, 초월급 몬스터가 나타나는 게이트까지.
강민혁은 상당한 준비를 했음에도 독일 마법 협회는 위기를 맞이했다. 그나마 천호명이 현장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강민혁은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 2가지의 대응 방법을 준비했는데, 그중 하나인 천호명의 활약으로 독일 마법 협회는 간신히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마침 고영철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화를 받자,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세계 마법 연합에서 화상 회의가 진행되었어. 그리고 네가 예상한 대로, 독일 마법 협회의 지원은 포기한 것 같아. 프랑스는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적 널널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독일로 떠나려는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거든. 결국 선택을 내린 거겠지. 세계 마법 연합의 구성원이 아니라면 도와주지 않겠다는 메시지. 그들은 지금, 재앙을 이용해서 주도권을 확보하려 하고 있어.]
“그렇겠지. 가디언 마탑으로 넘어오는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면, 연합의 힘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 테니까.”
안다.
예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떻게 할 거야?]
인간이란 참으로 잔인하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도, 본인이 얻을 이득을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굴린다.
어느 정도의 이기심은 이해한다.
그러나, 이건 선을 넘었다.
세계 마법 연합은 무고한 인간들의 죽음을 방관하는 것이고, 그건 인간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다.
“어떻게 하긴. 애초에 그들의 도움은 바라지도 않았으니 계획대로 해야겠지. 그러니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어. 이 모든 상황이 끝나고 나면, 그들은 본인들의 선택에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그로 인해 비난을 받아도 상관없어. 인류의 안일한 생각을 완전히 뜯어고치기 위해서는, 나는 기꺼이 피를 흘리겠어.”
끝까지 이기적인 선택.
그것이 강민혁의 안에서 무엇인가를 건드렸다.
재앙은 그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쓰레기들은, 강민혁의 분노를 마주하게 될 날이 찾아올 것이다.
독일의 상황을 지켜보는 것은 강민혁만이 아니었다.
세바스타인 페레스(Sebastian Perez).
벨기에 마법 협회의 협회장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독일 마법 협회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다.
‘이게 정말 옳은 일일까?’
재앙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벨기에는 재앙의 화살이 빗나간 나라였고, 세바스타인 페레스로서는 독일 마법 협회와의 관계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세계 마법 연합에서 독일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세력은 많지 않다. 독일은 유하기보다는 다소 독선적인 기질이 있는 세력이다 보니, 벨기에 마법 협회를 제외하고는 다들 거리가 있다.
그래서 독일 마법 협회를 버리자는 말에, 벨기에 마법 협회만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다른 이들은 인간적인 감정이 덜했지만, 세바스타인 페레스는 독일과의 관계를 떨쳐낼 수 없었다.
[콰르르르르르릉.]
건물이 무너지고 있었다.
언제 함락당할지 모르는 상황.
세바스타인 페레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문득, 독일 마법 협회장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우리는 가디언 마탑을 따르기로 했네. 사실, 예전부터 세계 마법 연합에 대한 의문이 있었어. 연합의 시작은 마법 학계의 발전을 위해서였지만, 최근에 세계 마법 연합의 행보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거든. 앞으로는 다른 길을 걷게 되겠지만, 자네를 결코 잊지 않을 걸세.”
선택의 갈림길.
독일 마법 협회장이 위험한 도박을 택할 때, 세바스타인 페레스는 차마 한 발을 내딛지 못했다.
그리고 현재.
세바스타인 페레스는 이를 악물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도 용기를 내지 못했던 자신이, 세계 마법 연합을 등지는 선택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세바스타인 페레스의 시야에 한 물건이 보였다.
그건 독일 마법 협회장이 보냈던 선물이다. 평소에 술을 즐겨 마시던 독일 마법 협회장은, 관계가 틀어졌음에도 마르코 도슨이 한국에서 구해왔다는 담금주를 보내주었다. 그러면서 선택이 달라졌다고 서로를 원망하지 말자고 덧붙였던 그의 모습에, 세바스타인 페레스는 결단을 내렸다.
‘인간처럼 살자, 세바스티안.’
당연히 살고 싶다.
이왕이면 부귀영화가 계속되길 바란다.
하지만.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는 동물이다.
자신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부여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고도, 세바스타인 페레스는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세바스타인 페레스가 수하를 호출했다.
삑-
“지금 당장 병력을 집결시켜.”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항상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다.
세바스타인 페레스는 적어도, 인간적인 선택을 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후회는 하고 싶지 않았다.
콰앙!
쿠르르르릉.
건물이 크게 흔들렸다.
재앙에 대비하면서 건물 강화에 상당한 돈을 들였지만, 그것조차도 지금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독일 마법 협회장.
발터 게르하르트(Walter Ge「ha「dt)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인정해야만 했다.
천호명이 정말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지만, 독일 마법 협회에게는 얼마의 시간이 남지 않았다.
‘끝인가.’
살고 싶다.
그래서 독일 정부에 연락을 넣어보았지만, 독일 정부와 독일 내의 무력 단체는 본인들을 지키기에 바빴다. 위험한 것은 독일 마법 협회만이 아니었다. 독일은 아웃브레이크의 영향을 크게 받은 국가였고,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독일 마법 협회가 아니라 자신의 안위라는 사실은 이해한다.
그리고 세계 마법 연합은 독일 마법 협회를 버렸다.
희망적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죽음이라는 결과에 도달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피할 수 없다면 명예롭게 죽자.’
프랑크푸르트의 수호자.
발터 게르하르트는 프랑크푸르트의 사람들이 대피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항전을 택했고, 협회의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그 명령을 따랐다. 프랑크푸르트의 사람들은 독일 마법 협회의 희생을 기억할 것이다. 그 기억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끝까지 독일인의 자긍심을 보여주고 싶었다.
최후의 항전.
지휘를 포기하고 발터 게르하르트도 전선에 나서려는 순간, 무전기에 빨간빛이 들어왔다.
삑, 삑-
[들리십니까?]
낯선 목소리.
발터 게르하르트가 무전기를 잡았다.
“누구십니까?”
[에이글의 수장 마테오 파블로비치(Mateo Pavlovic)라고 합니다. 강민혁 마탑주의 부탁을 받고, 현재 연합군을 이끌고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약 10분이면 현장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도착하는 대로 반격에 나설 준비를 하십시오.]
".........."
순간 말을 잃었다.
에이글.
그들은 프랑스의 강화 전사 단체다.
독일 마법 협회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그들이, 느닷없이 독일 마법 협회를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마테오 파블로비치의 말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강민혁.’
그가 부탁했다고 했다.
강민혁이 천호명을 독일에 배치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무언가 조치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
감정이 울컥했다.
조국인 독일조차도 협회를 버리는 상황에서, 강민혁은 연합군이라는 이유만으로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크윽.”
눈물이 핑 돌았다.
살 수 있다.
희망이 살아났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도착하는 것에 맞춰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한때는 강민혁을 의심했던 시절이 있다.
그의 능력을, 그의 진위를.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세계 마법 연합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체계를 만든다고 했었지.’
만약 독일 마법 협회가 재앙에서 살아남는다면.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발터 게르하르트는 강민혁이 하는 모든 일을 위해 앞장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