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 37. 아웃브레이크(6) >
파스스스-
뻥 뚫린 구멍으로부터 연기가 폴폴 피어올랐다.
사람들은 그것이 던전의 개방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고, 금세 시선을 거두고 싸움에 집중했다. 지금은 한눈을 팔 여유 따위가 없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마법이 필요했고, 마법사들은 당장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나를 끌어 올렸다.
“프로즌 오브(Frozen orb)."
“스파이럴 토네이도.”
확-
파바바박!
마법의 향연.
건물 외벽을 타고 올라오던 몬스터들이, 강한 바람을 동반한 얼음 파편에 피를 뿌리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독일 마법 협회.
그들은 재앙 대응법 훈련에 따라, 마법사를 세 개의 조로 나누었다. 그래야만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고 순차적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펑펑 터지는 마법에, 사람들의 표정에는 희망이 보였다. 그간의 훈련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서부터 비롯되는 믿음. 강력한 동맹군인 가디언 마탑의 마법사들도 있기에, 재앙이 닥쳤다 할지라도 문제는 없다고 믿었다.
시선 바깥.
변수는 그렇게 형체를 갖추었다.
연기가 바람에 펄럭이는 머리카락으로 변하였고, 붉은 빛깔의 악령(惡靈)은 거친 숨결을 토해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헉!"
“크악!”
귓속을 찢어발기는 비명이 전장을 강타하는 순간, 마법사들이 일제히 귀를 부여잡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현기증이 핑- 돌았다. 대다수의 마법사들이 귀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고, 그로 인해 전장에 마법의 공백이 생겼다. 그건 몬스터들에게 기회였다. 재빠른 몸놀림을 자랑하는 몬스터들이 건물 외벽을 순식간에 타고 올라오더니, 위에 있는 사람들을 덮쳤다.
“막아!”
“이 새끼가.”
퍽!
다행히도 건물 위에는 디펜더들이 촘촘하게 방어 라인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의 즉각적인 대응에 마법사들이 공격당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파사사삭-
붉은 악령.
그것의 권능에, 사방으로 피어오른 연기가 일제히 스펙터(spectre)로 변하였다.
그 괴물들에게 건물의 이점은 무의미했다.
빠르게 쇄도하는 스펙터들이 디펜더를 덮쳤고, 물리력에 강한 그들의 힘에 디펜더들이 당황했다.
“이런!”
“스펙터라니!”
전장이 혼란에 빠졌다.
그제야 사람들은 구멍의 정체를 알았다.
바로 악령 던전.
붉은 악령의 정체는, S등급의 몬스터로 분류되고 있는 블러드 밴시(blood banshee)였다.
독일 마법 협회장.
상황을 파악한 그는, 창백한 표정으로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당장 마나로 귀를 보호하라! 상대는 블러드 밴시다! 귀를 보호하지 않으면......... 쿨럭!”
꺄아아아아악-
다시 퍼지는 비명 소리.
협회장이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블러드 밴시라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블러드 밴시.
그건 매우 특수한 몬스터다.
보통 S등급 몬스터들은 강력한 권능을 행사하는데, 블러드 밴시는 초월급 몬스터에 가까울 정도로 권능의 힘이 그렇게 강력하지 않다. 그렇지만 블러드 밴시는 S등급 몬스터 중에서도 상당히 까다롭다고 알려져 있다. 이유는 바로 스크림(scream)이라는 기술 때문이다. 스크림을 사용할 경우,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마나의 흐름이 불안정해지고 고막이 그대로 파열되는 피해를 받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비명에 여러 번 노출되면, 정신력이 약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미쳐버린다.
‘위험하다.’
마법사의 천적.
하필이면, 독일 마법 협회는 최악의 적을 맞이했다.
수천 마리의 몬스터를 앞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블러드 밴시와 스펙터의 등장은 감당할 수 없었다.
크캬캬캬캭!
“아아...!”
하늘을 뒤덮는 스펙터들.
방어의 이점을 상실해버린 상황에, 독일 마법 협회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황이 달라졌다.
진짜 위기.
어쩌면, 독일 마법 협회가 이대로 멸망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처음으로 표면 위로 떠올랐다.
그 시각.
세계 마법 연합은 화상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앙투안 발라르가 말했다.
"지금은 비상사태입니다. 벨라루스(Belarus) 마법 협회가 몬스터들의 공격으로 전멸당했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실험의 목적으로 수백 개의 던전을 내버려 두었던 것이, 결국 그들의 명을 재촉한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대비해서, 우리는 세계 마법 연합이라는 이름 아래에 힘을 합친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뜻입니까?]
[당장 지원 병력이 필요합니다. 저희는 벌써 협회원의 40%를 잃었습니다.]
화면 너머.
마법 세력의 수뇌부들이 다급한 표정을 보였다.
지금 다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웃브레이크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종류의 재앙이었고, 갑작스레 들이닥친 몬스터들로 인해서 그들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벨라루스의 경우에는 가장 최악의 상황일 뿐이지, 이 자리에 참석한 세력들의 피해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40%라는 수치는 퍼센트로 들었을 때는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알 수 없지만, 해당 발언을 내뱉은 포르투갈 마법 협회는 수십 명의 마법사를 잃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강민혁의 조언을 들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차마 내뱉진 못했다.
앙투안 발라르의 눈빛이 변했다.
“세계 마법 연합의 비상 동원령을 선포하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여력이 있는 연합 세력의 경우에는, 주변의 연합을 도와 문제를 해결해주시길 바랍니다. 저희 같은 경우에는 다행히도 피해가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병력을 편성해서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병력을 보내겠습니다.”
[저희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모두가 위험한 것은 아니다.
프랑스와 같은 곳은 던전이 많지 않았고, 덕분에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안전할 수 있었다.
이건 기회였다.
앙투안 발라르는, 그러한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다들 독일에 블러드 밴시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블러드 밴시가 나타났단 말입니까?]
[허어.]
당황하는 사람들.
예상한 반응이다.
그만큼, 블러드 밴시는 마법사들에게 위협적인 이름이었다.
“예. 세계 마법 연합의 대응 체계에 따르면, 독일이 위험에 처할 경우 저희 프랑스 마법 협회가 도와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도와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저희로서는 세계 마법 연합의 안전이 최우선이고, 우리를 배반한 그들을 도와야할 명분은 없지 않습니까?”
[설마 그들이 모두 죽게 내버려 두자는 말씀이십니까?]
“이건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입니다. 아웃브레이크 현상으로 인해서 우리는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지금의 피해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으로 비추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세계 마법 연합의 힘으로 재앙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그 과정에서 독일을 외면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당장 곁에 있는 그들을 도와주는 것보다, 저는 멀리 떨어진 포르투갈 마법 협회의 위험을 해결하는 것 이 더 중요합니다.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강민혁의 말이 사실로 밝혀진 이상, 지금부터는 세계 마법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결과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들 알았다.
재앙의 발발.
강민혁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세계 마법 연합의 기반이 무너질지도 모르는 상황을, 앙투안 발라르는 오히려 역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위기는 기회로 직결된다.
예상한 것보다 재앙의 규모는 컸으나, 상황을 반전시킬 자신이 있었다.
[정말...독일을 버리자는 말씀입니까?]
벨기에(Belgium) 마법 협회.
그들 또한 독일을 도와야 하는 포지션이고, 평소에 독일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자랑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세계 마법 연합을 포기하지 못한 그들은, 지금만큼은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앙투안 발라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무조건 버리자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그러한 상황을 겪고도, 세계 마법 연합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본인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그들이 먼저 살려달라고 손을 내밀기 전까지는, 절대 그들을 위해 나서서는 안 됩니다.”
서로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교묘하게 ‘핑계’를 만들어내는 앙투안 발라르의 발언에, 벨기에 마법 협회장은 말을 잃었다.
화상 회의는 그렇게 종료되었다.
끝으로, 앙투안 발라르는 신신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가 세계 마법 연합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배신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이유가 없습니다.”
독일 마법 협회의 상황은 빠르게 전파되었다.
아웃브레이크.
게이트.
S등급 던전.
악재가 겹쳤다.
세계 마법 연합은 독일 마법 협회를 외면하였으나, 독일 정부도 그런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당장 독일 마법 협회에 병력을 보내!”
독일 총리의 명령이 떨어졌다.
독일 마법 협회가 붕괴된다면, 그 여파는 독일 전체로 퍼질 것이 뻔하다. 독일 정부로서는 전장을 독일 마법 협회로 제한하고 위기를 막아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결과일 터. 빠르게 편성된 병력이 독일 마법 협회로 보내졌다. 그중에는 강화 전사 세력인 힘멜(Himmel)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현장에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두 세력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니.”
지옥.
현세에 지옥이 펼쳐졌다.
정보로 들었던 것과는 다르게 몬스터의 숫자는 훨씬 많았고, 예상치 못한 변수도 하나 더 있었다.
캬아아아악!
와이번 킹(wyvern king).
게이트에서 등장한 초월급 몬스터 세 마리가 하늘을 날았다.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자 주변에 바람이 일었고, 그들은 힘멜의 전사들을 발견하자마자 거대한 아가리를 쩍 벌렸다.
브레스.
힘멜의 수장이 다급하게 외쳤다.
“피해!”
화륵.
콰콰콰콱!
와이번 킹의 아가리에서 뿜어지는 불길이 지상을 불태웠다. 힘멜의 전사들로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공격이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힘멜의 전사 몇 명이 새카맣게 불탄 채로 죽음을 맞이했고, 와이번 킹은 그것으로도 모자란지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며 그대로 도망치는 힘멜의 전사를 공격했다.
콰직!
인간의 육체가 종이처럼 찢겨나갔다.
힘멜의 전사들도 어떻게든 대항하며 독일 마법 협회 건물로 이동하려 했으나, 적이 너무나도 많았다.
더군다나.
꺄아아아아아악-
블러드 밴시.
그것의 비명이 울려 퍼질 때면, 힘멜의 전사들로서도 마나가 흐트러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하늘에는 와이번 킹이, 멀리에서는 블러드 밴시가. 그리고 수천 마리의 몬스터들이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겨우 300명의 강화 전사들이 현장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는 상황을 해결할 수 없었다.
독일 정부.
그들은 협회의 도움을 명령했으나, 그 또한 전력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결국 그들로서도 본인의 안위가 중요하였고, 딱 보내도 될만한 수준의 병력을 프랑크푸르트로 보냈다.
그 모습.
지원군이 당하는 장면은 고스란히 건물 위로 전달되었다.
독일 마법 협회장으로서는, 마탑원을 모두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자존심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세계 마법 연합에 연락해!”
자신의 선택.
이로 인해 가디언 마탑의 상황이 난처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일단 살아야만 했다.
강민혁이 준비한 재앙 대응법에서는, 정말 위험한 상황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뭐?!”
협회장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처음에는 통신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의도적으로 연락을 차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개새끼들이!’
앙투안 발라르.
그는 독일 마법 협회가 본보기가 되기를 바랐다. 그들의 터전이 불타오르는 모습이, 세계 마법 연합의 탈퇴가 어떠한 결과로 이어지는지 보여주는 예가 될 터. 겉으로 말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들은 독일 마법 협회의 통신망을 끊어버렸다. 멀리서 방해 전파를 내보내는 것은, 프랑스 마법 협회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은 채 독일 마법 협회를 고립시켜버릴 것이다.
완벽한 명분이다.
독일 마법 협회가 도움을 청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테니, 책임을 질 이유도 없다.
건물 위.
전투의 양상이 격렬해졌다.
몬스터들은 이미 상당수가 건물 위를 장악했고, 스펙터들의 공격에 마법사들이 무력하게 당했다.
콰직!
“크아악!”
블러드 밴시가 문제였다.
그것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밀리진 않았을 것이다.
“빌어먹을.”
천호명이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라면 독일 마법 협회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결국 그 방법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생각해보면 정말 웃긴 일이다.
강민혁은 남들은 과하다고 말하는 상황을 대비하면서도, 그보다 더욱 최악의 상황에 대해서도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준비한 것으로도 막아낼 수 없는 상황이 닥칠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제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버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부터 천호명 대마법사님에게 하나의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건 위험한 힘이다.
하지만 사용해야만 한다.
강민혁이 도착할 때까지 필요한 시간.
그때까지만 버티면 강민혁이 모두 해결해주리란 믿음이 있기에, 천호명은 선택을 망설이지 않았다.
“정령 빙의.”
확-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마나.
천호명.
그는 운디네(Undine)와의 계약에 성공했고, 지금은 그 힘을 현세에 소환했다.
강민혁이 준비한 안전장치.
천호명이 전력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