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 35. 어중간한 재앙, 어중간한 평화(7) >
프랑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랭 로베르는 한 번쯤은 들을 수밖에 없는 이름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쏠리드와 더불어 양대산맥이라고 불렸던 에이글(aigle)이 전쟁을 선포했었다. 파리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전쟁이었고, 당시 에이글은 기습적으로 쏠리드를 공격했다. 그때 엄청난 활약을 보였던 사람이 바로 알랭 로베르였다. 알랭 로베르의 검에 십수 명의 실력자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에이글이 의도했던 것과는 다르게 전쟁은 급속도로 기울어지고 말았다.
쏠리드가 자랑하는 3개의 검 중 하나.
그런 알랭 로베르가 패배했다.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진 알랭 로베르는, 생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사람들은 넋을 잃고 알랭 로베르틀 보았다.
눈앞에 벌어진 현실을, 파리의 사람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쏠리드의 검이 마법사에게 패배하다니.’
공통으로 떠오른 생각.
그냥 패배한 것도 아니다.
강민혁은 이미 앞에서 수백의 적을 상대하면서 체력을 소모한 상태였고, 알랭 로베르는 중간에야 전투에 가담했다. 시작부터 강민혁에게 전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었다. 정정당당한 대결이었어도 당연히 알랭 로베르의 승리를 예상할 텐데, 알랭 로베르는 아무것도 하질 못했다.
“이 새끼가.”
“감히 알랭 로베르님을!”
쏠리드의 전사들이 분노했다.
일제히 달려드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알랭 로베르의 복수가 아니라 쿼드 캐스팅이었다.
“파이어 캐논.”
콰앙-
화르르르륵!
세 개의 화염이 작렬했다.
선두에서 달려들던 강화 전사들이 불길에 휩싸였고, 동시에 사용된 윈드 필드(Wind Field)로 인해서 화염의 위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그건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쏠리드의 전사들이 복수를 다짐했건만, 잠시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에 그들은 이미 마법의 제물이 되었다. 나름 마법을 버텨보겠다고 겹겹이 두른 마나의 방어막은, 6서클의 위력을 뛰어넘는 강민혁의 마법에 피부가 타버리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정적.
현장이 충격에 휩싸였다.
알랭 로베르의 패배에 이은 압도적인 전투력에, 누가 지시한 것이 아님에도 모두 전투를 멈추었다.
덜컥, 겁이 들었다.
괴물.
아무리 많은 숫자가 달려들어도 전부 집어 삼켜버리는 강민혁의 위력에, 그와 싸울 엄두가 나질 않았다. 대체 저 괴물을 어떻게 쓰러트린단 말인가. 상대가 단 한 명이기에 언젠가는 체력적인 한계가 찾아오겠지만,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 시기를 예상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타닥타닥.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가 타올랐다.
방금까지만 해도 살아있던 사람들이, 새카만 재가 되어버렸다.
강민혁에게 집중된 이목.
드디어 무대의 주인공이 바뀌었다.
그리고 강민혁은, 지금의 이 순간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이번 싸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민혁에게 불리하다.
프랑스 파리.
상대의 홈그라운드라는 사실은 끝없는 전투를 의미하고, 강민혁의 방대한 마나도 언젠가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안다.
그런데도 강민혁은 위험한 선택을 내렸다.
만약 알랭 로베르가 나서지 않았다면, 이 끝없는 소모전은 어느 한쪽의 파멸로 이어졌을 것이다.
“너희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있다.”
강민혁이 목소리에 마나를 실었다.
앙투안 발라르의 연설에 강민혁의 말은 듣지도 않던 사람들이, 지금은 얌전하게 귀를 기울였다.
살생(殺生)에는 명분이 필요하다.
강민혁이 생각하는 앞으로의 미래에서 인류는 하나로 뭉쳐야만 한다. 이번 행보는 자신의 무력을 증명함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할 생각이었다. 앙투안 발라르가 그간 어떤 일을 벌였는지, 그리고 자신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파리를 찾은 이유가 무엇인지.
지금부터는 진실을 공개할 시간이다.
“나는 프랑스 마법 협회의 자료를 가져간 적이 없다. 생각해보면 참 웃긴 주장이지. 나는 마법 학계의 발전을 위해서 더블 캐스팅, 마나 동화, 새로운 마법 체계와 같은 것들을 무상으로 발표했다. 그간의 행보만 보더라도 내가 마법적으로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 텐데, 앙투안 발라르는 대체 왜 내가 협회의 자료를 가져갔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이유는 뻔하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앙투안 발라르는 세상의 비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동요했다.
그들에게 앙투안 발라르는 영웅이었다.
그렇기에 맹목적으로 믿었고, 혹시 모를 다른 가능성은 생각지도 않았다.
“내가 스트라스부르를 찾아간 이유는 가디언 마탑의 기밀을 빼돌린 패트릭 고든이라는 프랑스 마법 협회의 인물을 포획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프랑스 정부에 입국 사실을 알릴 수 없었지. 프랑스 마법 협회는 가디언 마탑을 상대로 참 많은 짓을 저질렀다. 패트릭 고든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아낸 첩자만 하더라도 5명이 넘었고, 기자들에게 악의적인 기사를 지시한 정황도 포착했다. 그 외에도 할 말은 많다. 가디언 마탑이 처음 설립되었을 때부터 프랑스 마법 협회는 온갖 방해를 했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밝히지 않고 속으로 감내했다. 우리가 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나?”
숨을 골랐다.
사람들을 둘러보며, 강렬한 시선을 보였다.
“가디언 마탑이 약해서? 아니다. 오늘 보았듯이, 가디언 마탑은 절대 약하지 않다. 그저 화합하길 바랐을 뿐이다. 마법 학계의 발전을 위해 마법을 공개했던 것처럼, 언젠가는 우리가 하나로 뭉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알았다. 프랑스 마법 협회가 경비대에게 나를 공격할 것을 지시한 순간부터, 실낱같았던 우리의 가능성은 완전히 박살 났다.”
강민혁이 마나를 일으켰다.
명분은 깔았다.
증명의 과정은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앙투안 발라르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었던 것처럼, 상황이 뒤집힌 지금 강민혁의 발언권은 강력한 힘을 얻었다. 비난의 화살이 되돌아갔다. 처음에는 강민혁을 악인이라 생각하고 비난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앙투안 발라르에게 비난 어린 시선을 보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앙투안 발라르보다 강민혁의 말이 맞을 수밖에 없다.
마법 자료가 탐난다고 국경을 무단으로 넘기엔, 강민혁은 그간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것이 많다.
강민혁이 말했다.
“나는 내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 프랑스 마법 협회가 앞으로도 우리의 앞길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목숨을 걸고라도 너희와 끝을 볼 것이다. 그러니 선택하라. 그간의 잘못을 인정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죄하든지, 아니면 나와 끝까지 싸울 것 인지를.”
화르르르륵.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화염.
강민혁이 적의(敵意)를 표출했다.
그 강렬한 의지에, 앙투안 발라르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 이 순간.
앙투안 발라르는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의 멘탈이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한 시점은, 강민혁이 7서클 마법을 발현시킬 때부터였다.
‘저건 6서클 마법의 수준이 아니야. 마나의 양과 위력을 봐서는. 어쩌면 7서클 마법일지도 몰라.’
충격적이었다.
7서클.
이게 정말 말이 되는 일인 걸까?
강민혁이 등장하기 전만 하더라도, 마법사들에게 6서클의 경지는 꿈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6서클도 정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7서클은 감히 상상조차 하질 못했다. 어렴풋이 그런 경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으나, 그건 현실이 아니라 아직 망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
강민혁이 7서클 마법을 사용했다.
땅을 뒤집고 세상을 휩쓸어버리는 화염의 폭풍에, 앙투안 발라르조차도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끝났어.’
알랭 로베르가 패배하는 순간.
앙투안 발라르는 자신의 계획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이 자리에서 프랑스 마법 협회의 힘을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강민혁의 힘에 오히려 압도당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떠는 프랑스 마법 협회의 마법사들. 이건 이기더라도 이긴 싸움이 아니다. 만약 장기전 끝에 승리할지라도, 프랑스 마법 협회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그때, 강민혁이 말했다.
“그러니 선택하라. 그간의 잘못을 인정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죄하든지, 아니면 나와 끝까지 싸울 것인지를.”
상대의 의도가 보였다.
만약 여기에서 전자를 택한다면.
프랑스 마법 협회의 위상은 바닥으로 떨어질 테고, 그간 가디언 마탑을 상대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두었던 노력이 한 번에 날아간다. 그때부터는 가디언 마탑의 성장을 막아낼 방법이 없다. 세계 마법 연합의 수장인 프랑스 마법 협회도 쓰러트린 그들을, 대체 누가 막는단 말인가.
그렇다고 후자를 택한다?
그것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
‘장기전으로 간다면 우리가 이길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뭐지?’
상대는 혼자다.
한 명을 쓰러트리겠다고 대부분의 병력을 잃는다면, 그것만큼 멍청한 일도 없다. 자존심을 위해서 끝까지 갈 수는 있다. 그러나 앙투안 발라르로서는 그런 선택을 내릴 수 없었다. 프랑스 마법 협회는 그가 고생해서 이루어낸 세력이고, 세력의 힘이 약해지는 순간 단번에 추락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에서, 힘을 잃어버린 맹수가 살아남을 방법 따위는 없다.
하지만.
‘빌어먹을.’
잘못을 인정하는 것도 문제다.
이 선택으로 인해 앞으로 얕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강민혁의 위협은 효과적이었다.
강민혁이 두려웠다.
홀로 수백의 적을 마주하고 있는 그의 적의가, 상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소모전은 소멸전(梅滅戰)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강민혁은 궁지에 몰린 생쥐가 아니라, 눈앞에 모든 것을 집어삼킬 아주 포악하고 강력한 맹수다.
‘딜레마에 빠졌구나.’
앙투안 발라르의 계획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생각 이상의 힘.
강민혁이 7서클 마법사라는 사실을 공개하는 순간부터, 그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일은 없었다.
알랭 로베르는 끝까지 일어나질 못했다.
아마도 죽었으리라.
그의 죽음이, 앙투안 발라르를 앞으로 떠밀었다.
“...의미 없는 소모전은 나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만하는 게 어떻겠나?”
“나는 제대로 된 사과를 원한다. 그따위 변명 같은 말을 들으려고,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 아니다.”
빠득.
앙투안 발라르가 이를 악물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갈등에 휩싸였던 그는, 결국 현실에 굴복했다.
“그간 프랑스 마법 협회가 했던 모든 일을 사죄하겠다. 강민혁의 말은 사실이고, 우리는 잘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앙투안 발라르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사죄.
이로 인해, 프랑스 마법 협회는 앞으로 내리막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앙투안 발라르의 굴복.
강민혁이 의도한 시나리오나, 그것이 위험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앙투안 발라르는 이대로 포기하지 않아. 병력을 살렸다는 것은, 후일을 도모한다는 뜻이겠지.’
전초제근(前草除根).
후환을 없애는 게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권력의 맛을 본 사람들은 언제고 다시 문제를 일으키겠지만, 강민혁은 일부러 끝을 보지 않았다.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강민혁의 계획에, 앙투안 발라르는 반드시 필요한 퍼즐이었다.
‘언제고 내가 주장했던 재앙은 반드시 닥친다. 그제야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앙투안 발라르의 프랑스 마법 협회는 비난을 받아낼 역할로 적절하다. 재앙은 없을 것이라는 그들의 발언과 행보가 사람들을 한데로 뭉치게 만드는 구심점이 되겠지.’ 강민혁은 계획을 바꾸었다.
설득이 아니라 강제로 사람들을 끌어가기로.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재앙의 시기가 도래한다면, 앙투안 발라르는 재앙의 희생양으로서 강민혁의 명분에 힘을 부여할 것이다.
그들에게 갱생의 기회는 없다.
선을 넘은 순간부터, 그들의 역할은 도구로서 끝난다.
강민혁이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가자.”
낮은 음성.
그 말에, 인파 속에 숨어있던 사람들도 같이 걸음을 돌렸다.
그 숫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인파가 많아서 알아보지 못했지만, 전투가 치러지는 동안 로브를 눌러쓴 사내들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설마.”
“가디언 마탑의 마법사들?”
언뜻 드러난 얼굴.
그중에는 유재명도 있었다.
이번 계획.
프랑스로 향하면서, 강민혁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가디언 마탑의 마법사들을 먼저 프랑스로 보냈다.
만약 앙투안 발라르가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면.
강민혁은 진짜 이 자리에서 끝을 볼 생각이었다.
강민혁을 필두로 자리를 떠나는 가디언 마탑의 모습에, 앙투안 발라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정말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섭구나.’
세간에서는 그를 성인(聖人)이라고도 부른다.
대단한 지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공개하는 그의 모습에, 그는 본받아 마땅한 그런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건 틀린 말이었다.
이런 사람이 성인이라니.
가디언 마탑의 마법사들을 대동하고도, 힘을 증명하기 위해 일부러 혼자서 싸움을 벌인 사람이다.
강민혁은 태생부터가 전사였고, 맹수였다.
강민혁이 남기고 간 공포에, 앙투안 발라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