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 35. 어중간한 재앙, 어중간한 평화(5) >
툭-
전화가 끊긴 상황.
앙투안 발라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상황이 재밌게 흘러가네.”
얼추 돌아가는 상황이 보였다.
강민혁은 분명히 차원의 균열에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비밀리에 프랑스에 들어온 것일 텐데, 막상 발각되니 프랑스 마법 협회의 책임으로 떠넘겼다. 매우 부실한 핑계다. 하지만 강민혁의 말처럼 프랑스 마법 협회로서는 딱히 변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프랑스 마법 협회는 그간 가디언 마탑을 상대로 불법적인 일을 많이 저질렀고, 패트릭 고든은 스트라스부르 태생이 맞다. 폭로전으로 간다면 프랑스 마법 협회가 불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가디언 마탑은 최근 행보로 이미지가 바닥에 떨어진 상황이야.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진흙탕 싸움으로 간다면, 결국 이득을 보는 것은 가디언 마탑일 테지.’
의도는 명백했다.
강민혁은 판을 키워서, 프랑스 마법 협회의 잘못을 부각시키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
“결국 너의 미천한 경험이 여기에서 드러나는구나.”
앙투안 발라르가 웃었다.
의도는 괜찮았다.
정말 폭로전으로 이어진다면, 프랑스 마법 협회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질 터.
강민혁의 행보는 지금 대중의 시선을 이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밟고 있는 땅이 프랑스의 영토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건 분명히 악수(惡手)였다.
‘한국이었다면 강민혁의 작전이 적절하게 먹혔겠지. 가디언 마탑에 귀를 기울여줄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았을 테니까. 그러나 이곳에서는 아니야. 프랑스의 국민들은, 강민혁이 아니라 우리를 믿겠지.’
그림이 그려졌다.
강민혁은 강하다.
사람들의 말대로, 세계 최강의 마법사는 강민혁이라는 사실을 앙투안 발라르조차도 인정하고 있다.
비무행에서 보여주었던 모습.
강화 전사들을 차례로 쓰러트리는 강민혁의 활약에, 그가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마도 강민혁은 잘잘못을 가리기 위해 비무행과 비슷한 방식의 대결로 상황을 끌어갈 확률이 높다. 프랑스 마법 협회 최고의 마법사를 강민혁이 쓰러트리는 순간, 강민혁의 발언권은 힘을 가지고 불리하던 가디언 마탑의 상황이 단번에 역전될 테니 말이다.
아주 이상적인 시나리오.
그렇기에 앙투안 발라르조차도, 강민혁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네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1대1 대결?
웃기는 소리다.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그렇게 날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앙투안 발라르는 곧바로 수하에게 연락했다.
“지금 당장 동원할 수 있는 협회의 마법사들을 모두 집결시켜. 전쟁이다. 이번 기회에, 가디언 마탑이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처참하게 짓밟을 것이다.”
강민혁이 파리 땅을 밟는 순간.
그는 돌이킬 수 없는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다.
강민혁은 넝마가 되어버린 옷을 대신해서 새 옷을 챙겨입고, 곧바로 프랑스 마법 협회의 본거지인 파리로 향했다. 파리에는 프랑스 마법 협회뿐만 아니라, 프랑스를 대표하는 강화 전사 단체인 쏠리드(solide)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그렇게 도착한 파리.
프랑스 마법 협회로 향하는 길에는, 어떻게 알았는지 이미 수많은 인파가 득실득실 몰려든 상태였다.
“강민혁이다!”
“정말로 나타났어!”
“이런 나쁜 새끼!”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알아듣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하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였다. 이 많은 인파가 자신이 나타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프랑스 마법 협회가, 일부러 대중들을 모았다는 의미일 터. 강민혁은 수많은 사람이 보이는 적의 어린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앞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서 프랑스 마법 협회로 걸음을 옮겼다.
그 끝.
그곳에는 프랑스 마법 협회가 미리 마중을 나온 상태였다.
앞에는 앙투안 발라르가 있었고, 그의 주변으로 이백여 명이 넘어가는 마법사들이 자리를 지켰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앙투안 발라르는, 강민혁의 등장에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쓰레기 같은 녀석. 그런 일을 벌이고도 파리에 발을 들일 생각을 하다니.”
파리로 향하는 동안.
앙투안 발라르는 이미 사람들을 모아놓고 밑밥을 깔았다.
그것은 본인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그리고 강민혁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그런 종류의 발언이었다.
"너는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연구 자료를 탈취하기 위해서 무단으로 프랑스 영토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경비대가 너를 저지하려고 하자, 감히 프랑스 땅에서 경비대를 공격하는 중범죄를 저질렀지. 그들은 지금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네가 한 행동은,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여론을 몰았다.
사람들이 분개했다.
자국의 경비대가 공격을 당했다는 사실에,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야유가 강민혁을 압박했다.
"나는 네 욕심이 언제고 화를 불러일으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리 대비하고 있었지만, 네 녀석은 기어코 선을 넘었다. 프랑스 마법 협회는 프랑스의 국민들을 위해 헌신한다. 그런 우리로서는, 더 이상 네 녀석의 만행을 좌시할 수 없다.”
강민혁에게 발언권은 없었다.
말을 할 기회도, 말을 할 여유도 주지 않았다.
이곳은 앙투안 발라르가 만든 무대였다.
미리 계획된 멘트를 말했고, 인파들 사이에 숨어있는 프랑스 협회의 사람들이 분위기를 주도했다.
"우우우우-!"
“강민혁을 처단하라!”
“저 녀석을 이대로 보내주어서는 안 돼.”
프랑스.
혁명의 나라.
들끓는 그들의 피는 앙투안 발라르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피식.
강민혁이 웃었다.
어쩜 이렇게도, 그는 예상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그는 호전적인 사람이고, 자신에게 도전을 걸어오는 것을 좌시할 만큼 만만한 인물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 없다.
그중 하나.
프랑스 마법 협회가 본인들의 이득만을 위해서 행동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프랑스에서는 영웅의 대우를 받는다. 생각해보라. 프랑스 국민들이 몬스터의 위협을 받았을 때, 그들을 구해주는 사람이 누구겠는가. 적어도 파리에서는 프랑스 마법 협회와 쏠리드는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다. 이곳은 프랑스 마법 협회의 본거지고, 강민혁은 악역의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다.
안다.
알고도 파리에 발을 들였다.
앙투안 발라르가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강민혁’을 엄벌할 것이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분위기.
강민혁은 죄인이 되었다.
진실이 어떻든 간에, 앙투안 발라르는 일단 분위기를 주도하고 강민혁을 무너트리려 하고 있었다.
이것은 세력 간의 대결이 아니다.
프랑스에 위해를 가한, 강민혁의 처벌식.
1대1 대결이라는 말은 나올 수 없었다.
다수가 일개 개인을 압박하더라도, 오히려 국민들의 환호를 받는 자연스러운 그림이 연출되었다.
앙투안 발라르.
세계 마법 연합의 수장인 그의 정치력은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순식간에 상황을 주도하고 판을 만들어내는 그의 능력은, 반대되는 입장에 있지만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모양이니..”
낮게 깔리는 목소리.
마나를 실은 강민혁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선명하게 박혔다.
“지금은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마나를 끌어 올리는 강민혁.
앙투안 발라르의 계획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이백여 명.
이 많은 마법사를 보고도, 강민혁이 설마 직접 싸우겠다는 의사를 밝힐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미친 새끼.’
잠깐의 망설임.
그때, 강민혁은 이미 몸을 날렸다.
“공격해!”
앙투안 발라르가 소리쳤다.
마법사들이 황급히 마법을 발현시키자, 강민혁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블링크.”
파밧.
마법사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법은 상대의 좌표를 입력해야만 확실하게 공격할 수 있다. 그런데 공간 마법은 그들로서는 너무나도 낯선 영역이었고, 블링크로 사라진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마법사들이 모여있는 중심부에, 강민혁이 나타났다.
“파이어 월.”
화르르르르르륵!
“헉!”
“강민혁이다!”
그들이 대응할 겨를도 없었다.
강민혁에게서 일어난 불길이 주변을 불태웠고, 마법사들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불길에서 벗어났다. 그것은 매우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들의 캐스팅이 모두 무산되었고, 강민혁은 다음 공격을 행할 시간적인 여유를 얻었다.
“화우.”
화륵!
화르르륵!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불꽃.
그것이 마법으로 변했다.
대응할 겨를도 없이, 사방에서 파이어 볼이 작렬했다.
콰앙!
화르르르르륵!
“크악!”
마법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벌써 십수 명의 마법사가 전투 불능에 빠져버렸고, 그러한 모습에 나머지 마법사들이 독기를 내비쳤다. 이백 대 일의 대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 마법 협회가 밀리는 모습은 보여줄 수 없다. 그들의 마법이 발현 되는 순간, 이번에도 강민혁은 블링크로 마법사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팍!
빠지지지지직!
“크아아악!”
마법의 좌표가 엉켰다.
강민혁을 공격하려던 것이 같은 프랑스 마법 협회의 마법사를 공격했고, 강민혁은 적들을 방패 삼아 자신의 안전을 확보했다. 마법사들로서는 전혀 생소한 전투 방식. 이백이라는 숫자가 오히려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사람들이 뒤엉켜 있는 상황에서, 한 명만 공격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빌어먹을!”
마법사들이 욕을 내뱉었다.
강민혁만을 공격할 수 없었다.
그 정도로의 컨트롤이 가능한 사람은 소수밖에 없었고, 결국 수적 우위를 제대로 살릴 수가 없었다.
“이런 쥐새끼 같은 녀석!”
“라이트닝 스피어(Lightning Spear)!”
치지지직!
프랑스 마법 협회의 5서클 마법사들이 전면에 나섰다. 그들의 마법 컨트롤은 상당히 뛰어난 수준이었고, 혼란한 상황에서도 강민혁을 정확히 노리는 것이 가능했다. 문제는 정확도가 높다 할지라도 강민혁이 당해준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강민혁은 블링크로 마법을 피해버리거나, 근처에 있는 마법 협회 인물의 목덜미를 잡아채서 고기 방패로 사용해버렸다.
퍽!
빠지지직.
부르르 떨리는 협회 인물의 몸.
그러는 사이, 강민혁의 마법은 또 다시 그들에게 재앙을 선사했다.
“룬 플레어.”
“화우.”
화르르륵!
콰콰쾅!
일방적인 전투였다.
마치 양 떼 사이에 늑대를 풀어놓은 것처럼, 강민혁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선보였다.
무빙 캐스팅.
더블 캐스팅.
공간 마법.
서클의 상관관계 등등.
강민혁은 프랑스 마법 협회 마법사들은 사용하지 못하는 이점들이 많다. 그것이 모두 발휘되자,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 세상의 마법사들은 난전(亂戰)에 강하지 않다. 클리스만의 세상에서는 마법사들도 코앞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익숙하지만, 강화 문명의 마법사들은 강화 전사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먼발치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온실 속의 화초들이다.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전투.
마법사들이 우수수 나가떨어졌다.
황당할 정도로 일방적인 상황에, 앙투안 발라르는 말을 잃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잠시 착각했다.
한 명의 마법사.
그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머릿수로 찍어누를 수 있다고.
그러나, 강민혁의 마법은 특별했다.
수적 우위를 오히려 역으로 활용하는 모습에, 앙투안 발라르는 이대로는 안 된다고 판단을 내렸다.
삑-
“지금 당장 같이 강민혁을 공격합시다.”
무전을 보냈다.
상대는 바로 쏠리드의 전사들.
그들은 프랑스 마법 협회와 협력 관계에 있었고, 앙투안 발라르의 요청에 일부 병력을 보냈다.
그들이 나섰다.
쏠리드의 전사들이 달려드는 모습에, 강민혁의 웃음이 짙어졌다.
‘내 마법이 어디까지 통할까.’
프랑스 마법 협회.
쏠리드.
파리에 도착하면, 그들 전부를 상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상했다.
그런데도 도망치지 않았다.
가디언 마탑의 부정적인 인식을 반전시키려면, 상식을 벗어난 임팩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로.
‘오늘, 내가 어떤 마법사인지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기억 너머.
강민혁이 차원의 균열에서 있었던 시간을 떠올렸다.
밖에서는 겨우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강민혁에게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하나의 깨달음.
강민혁은,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다.
클리스만의 지식.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이며, 강민혁은 마법에 관한 자신의 재능이 남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화 문명에서 5서클 마법사는 ‘대마법사’라고 불린다.
남들은 평생을 공부해도 그 경지에 올라갈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데, 강민혁은 겨우 1년 만에 5개의 서클을 형성하는 괴물 같은 성장을 보여주었다. 클리스만의 지식이 성장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마법 문명에서도 경이로울 정도의 성장 속도는 강민혁의 재능이 이루어낸 일이다.
그런데.
강민혁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17살이 되도록 검을 익혔던 강민혁의 육체는, 마법을 배우기 위한 그 어떤 기초 작업도 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강민혁은 태생부터가 마법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지만, 검을 익히면서 본인의 운명과는 어긋나는 시간을 보냈다. 그걸 본인은 알지 못했다. 강민혁은 검사로서의 경험이 마법사로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도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10년이 넘어가는 검사로서의 시간은, 강민혁의 육체를 마법사보다는 검사에 어울리도록 기반을 갖추었다.
검사의 육체를 한 마법사.
성장에 제동이 걸렸다.
강민혁이 빠르다고 생각했던 지금의 성장 속도도, 강민혁에게 숨겨진 재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환골탈태가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단전의 마나.
아직도 사용할 수 없다.
그 미약한 힘으로는, 클리스만의 몸으로 사용했던 3m에 달하는 오러를 발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마법사로서는 다르다.
검사로서 적합했던 육체가 새로이 탄생하며, 강민혁의 육체는 마법사에 걸맞은 육체를 얻게 되었다. 마나를 받아들이는 방식, 서클로 향하는 통로, 서클의 크기와 강도 등등. 모든 것이 변했다. 10년의 세월 동안 어긋나있던 길이 다시 원래의 자리를 찾으며, 강민혁은 진실을 마주했다.
‘아.’
한 번의 회전을 했을 때.
마나의 움직임이 예전과 달랐다.
폭발적이면서도 아주 안정적으로 서클에 회전하는 마나를 느끼며, 강민혁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진짜 재능.
그것이 드러났다.
마나를 회전하면 할수록, 강민혁의 재능이 폭발했다.
클리스만이 강민혁을 택한 이유.
그것은 남들보다 ‘뛰어난’ 정도라서가 아니다.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괴물 같은 재능을 타고 났기에, 차원을 너머 강민혁이 선택을 받았다.
서클이 요동쳤다.
그 강력한 힘에 이끌려, 새로운 서클이 형성되었다.
하나.
두 개.
강민혁은 그렇게, 바깥세상에서 열흘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7서클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