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139화 (139/197)

139화.  < 35. 어중간한 재앙, 어중간한 평화(3) >

화악-

의식이 확장되었다.

클리스만의 몸으로 경험했을 때처럼, 자신이 서 있는 땅을 제외하고는 온 세상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흐읍?!”

강민혁이 눈을 부릅떴다.

엄청난 압력이 강민혁을 덮쳤다.

균열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가 강민혁에게 감당할 수 없는 압력을 선사했고, 뇌조차도 일그러지는 것만 같았다. 이전과는 다른 전개였다. 시련의 탑에 도전했을 때는, 사람들의 얘기와는 다르게 강민혁은 금세 공간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시작 단계부터 호흡이 곤란할 정도였고, 붉게 달아오른 강민혁의 얼굴은 한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주었다.

“후욱, 후욱.”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이대로 계속 버티고 있다가는, 뇌가 곤죽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대체 왜지?’

기억을 더듬었다.

시련의 탑 생존자들은 이런 말을 했었다.

“그건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종류의 압력일 것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시련의 공간은 도전자에게 강력한 압력을 선사하며, 그 압력에 정신이 붕괴하기 전에 도망쳐 나와야만 한다.”

안다.

강민혁도 생존자이기에, 공간의 압력이 선사하는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가 무엇일까?

혹시, 안정되지 않은 거친 기운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아니야.’

균열의 공간.

차원 너머의 세상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빅뱅이 일어나는 것처럼 주변에 생겨나는 변화는, 시련의 탑이 이곳과 ‘같은 성질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만약 공간으로 인한 문제점이 아니라면, 강민혁으로서는 의심이 되는 문제점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육체의 차이.

클리스만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점이 이러한 결과를 낳았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이대로는 안 돼.’

핑-

“크윽."

머리가 울렸다.

조금만 더 있으면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기분.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팽팽 도는 머리는 방향 감각을 상실했고, 바닥에 주저앉는 바람에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행방불명이 되거나, 미치광이가 된 채로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그들과 똑같은 전철을 밟을 수도 있는 상황. 강민혁은 본능적으로 월하 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월하 심법은 이 세상에서 비롯된 힘이야. 혹시, 그것이 이 고통을 해결해줄지도 몰라.’

도박이었다.

사실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뇌가 나누어졌다.

두 개의 뇌를 동시에 움직이며, 빠르게 월하 심법을 운용해서 주변의 압력을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집중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다. 압력이 주는 고통에 몇 번이고 정신을 잃을 뻔했지만, 강민혁은 이를 악물고 주변의 기운에 동화되었다. 몸이 파르르 떨렸다. 감당할 수 없는 압력에 몸이 들썩였지만, 천천히 움직이던 기운이 서클에 닿는 순간 기적적인 일이 벌어졌다.

화악-

주르르륵.

코피가 흘렀다.

머리가 맑아지며, 서클이 개방되었다.

활짝 열린 서클.

그것을 중심으로 주변의 마나가 흡수되기 시작했다. 마나는 서클에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서클을 마나가 오가는 통로로 사용했다. 강민혁으로서는 감히 그 마나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인간이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의 마나였고, 그러한 현상이 압력의 고통을 누그러트렸다.

동화.

강민혁이 균열의 공간에 빠르게 적응했다.

이 세상에서 ‘이물질’이라고 판단되었던 것이, 마나의 통로로 사용됨으로써 공간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후우.”

숨이 안정되었다.

달아오른 얼굴도 혈색을 되찾았고, 강민혁은 안정적으로 주변의 마나를 받아들였다. 사실 이로 인해서 어떤 변화가 생겨날지는 모른다. 하지만 당장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기에, 강민혁은 공간에 몸을 맡기는 선택을 내렸다. 그렇게 빨아들인 마나는 제멋대로 움직였다. 서클 안에서 강하게 회전하다가, 혈관을 타고 몸 구석구석을 돌았다. 마치 강민혁의 몸이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강민혁의 의사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고통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월하 심법을 중단할지라도, 처음처럼 고통이 극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때부터였다.

강민혁의 몸이,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연이었다.

차원의 마나.

순수함의 결정체인 그것이 몸 안을 활보함에 따라, 서클의 크기가 넓어지고 더욱 단단하게 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혈관에 쌓인 노페물이 마나에 닿자 모두 사라졌다.

강민혁이라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몸에 축적되었던 부정적인 기운이 모두 사라지는 순간이었고, 차원의 마나는 강민혁의 몸을 공간에 적합한 상태로 만들어갔다. 태초(太初)의 형태. 강민혁은 몸의 변화를 부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긍정적인 변화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차분하게 변화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투둑, 투두둑.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떨어졌다.

피부가 녹아내렸고, 바닥에는 피부에서 흘러나온 검은 액체가 웅덩이를 이루었다.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그러나, 강민혁의 표정은 안정되었다.

고통은 전혀 없었다.

머리카락과 피부는 새로 자라났고, 상쾌한 기운이 전신을 감쌌다.

육체의 재구성.

환골탈태(換骨奪胎)의 시작이었다.

부정적인 기운이 모두 사라짐으로써, 강민혁의 육체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마침내 강민혁이 눈을 떴을 때는, 월하 심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압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대체.”

놀라웠다.

환골탈태라니.

그건 전설에나 존재하는 경지였다.

강화 전사들 중에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 그런 현상을 겪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는 있지만, 실제로 성공했다는 케이스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강민혁은 지금 환골탈태를 통해 새로운 육체를 얻었다. 서클의 경지가 상승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서클은 대해(大海)를 품을 수 있을 정도로 넓고 단단해졌고, 마나를 한번 운용하자 어떠한 막힘도 없었다.

불순물.

그것은 마나가 움직이는 것을 방해한다.

그런데 환골탈태를 통해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하자, 강민혁의 몸은 마나에 특화된 육체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단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강민혁의 단전은 애초에 마나를 담는 그릇으로는 부적격했고, 환골탈태를 했다 할지라도 근본이 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법사로서는 정말 이상적인 육체를 갖추었다. 마나를 이 정도로 받아들이는 육체라면, 캐스팅 속도와 마법의 파괴력은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해질 것이다.

엄청난 기연.

강민혁의 도박이 통했다.

정말 운이 좋았다.

‘만약 클리스만의 몸으로 먼저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나는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미쳐버렸을 거야.’

월하 심법.

이 세상의 힘을 다루는 방법을 알았기에 강민혁은 압력을 버틸 수 있었다.

우연이 반복되는 필연이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만큼은, 클리스만조차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곳과 밖은 시간의 흐름이 달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급하게 서둘러서 밖으로 나갈 필요성은 없다.

강민혁은 다시 월하 심법을 운용했다.

활짝 열리는 서클.

주변의 마나에 동화되는 상황에, 강민혁은 이전과는 다르게 그 기운을 받아들이고 느낄 수 있었다.

서클에 마나가 회전했다.

회전하고, 또 회전했다.

그렇게, 강민혁은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들었다.

강민혁이 한참 공간에 동화되고 있는 그때.

재수가 없는 놈은 앞으로 넘어져도 뒤통수가 깨진다고 했던가.

담당자는 10억을 벌어서 희희낙락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연구팀의 팀장이 직접 현장을 찾아왔다.

“여, 여기는 무슨 일로?”

“무슨 일이긴. 미쳐버린 생존자를 분석해보니, 그 녀석이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 균열의 너머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다고 말했어. 그렇다면 차원의 균열이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겠지. 지금 당장 균열을 살펴볼 예정이니, 그간 조사한 자료와 CCTV 영상을 가져와.”

“...알겠습니다.”

담당자가 고개를 숙였다.

‘씨발, 하필이면 이럴 때 찾아오다니.’

담당자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솔직히 팀장이 직접 내려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너무 위험한 작업이라 조사를 포기하고 있던 상태였는데, 느닷없이 현장을 확인하겠다고 내려오다니.

문제는 10억이라는 돈을 받고 안에 사람을 들였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안에 들어간 사람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자신의 목이 날아갈 터. 담당자의 얼굴에 불안함이 떠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 강민혁이 나온 CCTV 영상을 날려버렸다는 것이다.

담당자는 황급히 자료를 대령했다.

그러나 그는, 팀장이 매우 깐깐한 성격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야, 나랑 장난쳐?”

“예?”

“어제 있었던 CCTV 영상이 날아갔잖아. 이거 어디 갔어?”

CCTV.

그것은 단순히 감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균열 외부에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런데 일정 시간의 영상이 사라진 상태. 팀장의 날카로운 눈빛이 담당자를 향하자, 담당자는 흔들리는 눈빛을 애써 감추며 변명했다.

“그, 그게 어제 시스템 오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파일이.........."

짜악!

“컥!"

담당자의 뺨이 날아갔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팀장이, 그의 멱살을 움켜쥐며 말했다.

“이 새끼가 지금 개수작을 부리네. 이곳에 설치한 시스템이 애들 장난감인 줄 알아? CCTV가 한두 개도 아니고, 그것들이 동시에 일정 시간에만 작동이 중지되었다고? 너 내 성격 알지? 진짜 한바탕 뒤엎는 꼴 보기 싫으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실직고해.”

담당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균열 연구팀 팀장.

그의 성격은 아주 유명했다.

연구자 특유의 괴팍함이 절정에 달한 사람이었고, 그에게 잘못 보이면 목숨이 날아가는 건 일도 아니다.

예전에 그의 소속 연구원이 그에게 반항했다가, 그는 물론이고 가족까지 행방불명이 되는 사건이 있었다. 모두가 그의 소행임을 알았지만, 연구팀 내에서 그의 영향력이 강하다 보니 아무도 의구심을 제기하지 못했다. 현재 프랑스 정부는 실력자를 우선시했다. 팀장의 실력이 프랑스에서 제일로 인정받는 한, 적어도 그의 영향력은 일개 담당자가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담당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로 인해 징계를 받을지라도,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그렇게 드러난 진실.

얘기가 진행될수록, 팀장이 흥미롭다는 기색을 보였다.

사건의 전말은 간단했다.

균열에 흥미를 보인 사람이 있었고, 출입을 대가로 10억을 제시했다는 진부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

연구팀 팀장, 루도빅 바텔리(Ludovic Batelli)가 생각에 빠졌다.

‘80만 유로(10억 6,660만)나 지불해서 차원의 균열에 직접 들어갔다니. 이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인 건가?’

무려 10억이다.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고, 이 정도의 돈을 쓸 정도라면 분명히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스트라스부르에 형성된 차원의 균열은 이전에 연구하던 것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래서 미치광이 생존자가 나온 이후로는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런 날파리가 붙었다면 의심할 필요성이 있었다. 차원 너머는 아직 개척하지 못한 영역이다. 어쩌면 10억을 지불했다는 그 사람이 의문을 해결해줄 단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담당자에게 CCTV 영상을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예상대로 CCTV 영상은 폐기되지 않았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 일정 부분을 잘라내기는 했지만, 혹시 몰라 그 부분을 따로 저장해두었다.

재생되는 CCTV 영상.

한 인물이 나타났는데,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누구지?’

분장한 강민혁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담당자와 균열로 향하는 강민혁.

그리고 망설임 없이 뛰어내리는 강민혁의 모습을 바라보며, 루도빅 바텔리는 확신을 내릴 수 있었다.

‘역시. 이 녀석은 뭔가 알고 있어.’

확실했다.

연구자로서 평생을 살아온 그로서는, 아는 것도 없이 저렇게 뛰어내리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루도빅 바텔리가 말했다.

“지금 당장 경비대에 연락을 넣어. 이 녀석이 나타나면 곧바로 포박해야 하니까, 좀 괜찮은 녀석들로 보내라고 해.”

사실, 강민혁에게 진실을 알아낼 방법은 없다.

균열에 들어간 잘못을 물을 수는 있지만, 그것과 지식을 알려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공권력(公權刀)이 있는 것이다.

이곳은 프랑스 땅이다.

없는 죄도 만들어서, 진실을 술술 불어내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루도빅 바텔리는 그날부터 차원의 균열 근처에 머물렀다. 강민혁이 밖으로 나올 경우 경비대를 동원해서 곧바로 포박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그는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설마 잘못되었나?’

미치광이 생존자는 안에서 몇 시간 있지도 않았다.

이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면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기에, 점점 희망이 사라져갔다.

그리고 약 열흘 정도 지났을 시점.

마침내, 차원의 균열에서 무언가 나타났다.

“준비해.”

착-

전투를 준비하는 강화 전사들.

루도빅 바텔리의 얼굴이, 곧 진실을 알아낸다는 희열로 물들었다.

그런데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이 있었다.

열흘.

밖에서는 길다고 할 수 없는 그 시간이, 차원의 균열에서는 얼마의 시간을 의미하는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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