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 35. 어중간한 재앙, 어중간한 평화(2) >
협상이 결렬되고.
강민혁은 강화 전사들을 찾아갔다.
세계 마법 연합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가디언 마탑에 협력하겠다고 나서는 마법 세력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차선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강화 전사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체면이 구겨질 것을 염려해서 도전조차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희는 가디언 마탑과 그 어떠한 일도 도모할 생각이 없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 찾아온 겁니까? 당신은 비무행을 통해서 강화 전사들의 위상을 바닥에 떨어트렸습니다. 그런데 같이 대응 훈련을 진행하자는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습니까?”
문전 박대.
강화 전사들은 사나운 기세를 보였다.
강민혁이 비무행에서 강화 전사들을 쓰러트리면서, 사람들이 강화 전사를 바라보는 인식이 조금 달라졌다. 그로 인해 강민혁은 공공의 적이 되었다. 강화 전사들로서는 강민혁과 타협하는 것보다는, 항상 그래왔듯 세계 마법 연합과의 관계가 편리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 마법 연합은 그래도 주제를 아는 편이었고, 두 세력의 공생 관계는 100년간 이어졌으니 말이다.
국제적 왕따.
강민혁의 행보에, 악의적인 기사가 퍼져나갔다.
[가디언 마탑의 초라한 행보]
[..가디언 마탑의 마탑주인 강민혁이 최근에 마법 협회와 강화 전사들과 접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강민혁이 내세우는 명분은 혹시 모를 재앙을 대비해서 ‘대응 훈련’을 같이 진행하자는 것이지만, 그것은 말뿐인 명분에 불과하다. 가디언 마탑은 마법 학계에서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 집단이다. 당연히 그들은 고립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문제들이 발생하자 강민혁이 직접 나서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비무행으로 강화전사들을 적대하고, 창단식에서 세계 마법 연합을 비난한 사람이 바로 강민혁이다. 세상을 적으로 돌린 그의 말로가 초라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다.]
악의적인 기사.
아마도, 세계 마법 연합의 입김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세계 마법 연합은 협상이 결렬되자, 강민혁이 먼저 ‘대화’를 요청했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그것은 마치 고립된 상황을 견디지 못해서 강민혁이 나선 것처럼 보였다. 언론 플레이로 인해서 악의적인 기사가 들끓었지만, 강민혁은 주변 세력들과 대화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다행히도 애초에 협력 관계에 있는 세력들은 흔쾌히 훈련에 응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그중에는 한국 마법 협회도 있었다.
그들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강민혁과의 파워 게임에서 패배하면서, 그들은 세계 마법 연합에게 등을 돌리는 선택을 내렸다.
어쩔 수 없는 선택.
그렇게 예상 범위 안에서만 협력을 약속받았는데, 의외의 세력이 있었다.
강민혁의 소문을 들은 이준호가 찾아와 말했다.
“재앙을 대비한 훈련을 진행한다고 들었어. 그 매뉴얼을 검토해보고, 괜찮다고 판단되면 우리도 훈련에 참여할게.”
바로 수호문이었다.
비무행의 대상이었지만, 그들은 지난 과거는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수호문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세상을 수호하겠다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상황에 따라 누구든 포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수호문은 금방 협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만큼 강민혁의 매뉴얼은 좋았다. 강민혁은 직접 재앙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클리스만의 세상에서 제작한 매뉴얼도 참고했다.
웃긴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수호문이 가디언 마탑과 훈련을 진행하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가 발표되었다.
[수호문의 처량한 동정심]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다. 궁지에 몰린 가디언 마탑의 행보에, 수호문이 마지못해서 그들의 손을 잡아주는 선택을 내렸다. 수호문은 이번 선택을 두고 “가디언 마탑과의 미래를 생각한 결정이 아니라,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 말인즉, 그들은 가디언 마탑과 협력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래도 한때는 수호문의 후계자였던 강민혁에 대한 동정심으로 보이며, 수호문 외에 가디언 마탑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세력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사의 의도는 명백했다.
강민혁을 깎아내렸다.
세계 마법 연합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강민혁이라는 사람을 길들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실 강화 전사들로서는 강민혁은 매력적인 인물이다. 잘만 활용하면 그 가치가 높겠지만, 마법 학계에서 서로 치고받는 상황에서 굳이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방관이야말로 그들에게는 최상의 선택이었고, 그렇게 가디언 마탑을 깎아내리는 기사가 확산되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가디언 마탑.
망하기 직전의 가디언 마탑 등등.
온갖 유언비어가 퍼졌다.
그리고 그 기사들을 확인한 강민혁으로서는, 허탈한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계획했던 것과는 다른 행보였다.
원래는 힘을 갖추고 세계 마법 연합과 대화를 진행할 생각이었으나, 재앙을 겪고서 마음을 달리 먹었다.
‘자존심이 중요한 게 아니야.’
그래서 타협을 택했다.
이른 타이밍에,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건 틀린 선택이었다.
이미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기득권들로서는, 손을 내미는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잘못 판단했어. 나는 이미 그들에게 낙인이 찍힌 적이야. 내가 눈엣가시 같은 사람들에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재앙을 가지고 대응 훈련을 제안했으니 수작을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들은 고립으로 인해 가디언 마탑이 반드시 무너진다고 확신하고 있어. 조금이라도 숨구멍을 열어주고,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가디언 마탑에게 득이 된다고 생각해.’
그들은 가디언 마탑이 무너지길 바란다.
애초에 적의를 가지고 있기에, 협상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하아.”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화도 났다.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고 해서, 마치 승자처럼 거만하게 행동하는 그들의 모습이 우스웠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재앙의 시작점을 잊어버렸다.
그때는 치열했다.
처음 보는 몬스터라는 존재에 마법사와 강화 전사라는 구분 없이,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 머리를 맞대야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로부터 100년이 흘렀다. 재앙은 딱 감당할 만한 수준에서 유지되었고, 어중간한 재앙으로 인해서 어중간한 평화가 100년이나 지속되었다.
사실, 각 세력의 수장이라는 사람들은 몬스터와의 싸움이 잘 기억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높은 의자에 앉아, 살만 뒤룩뒤룩 찐 채로 밑에 사람들에게 명령만 내리는 입장이었을 테니 말이다.
인간이란 그렇다.
클리스만의 세상에서 2000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강화 문명의 사람들도 똑같은 전철을 밟았다.
‘결국 직접 경험해야 정신을 차린다는 건가.’
세상이 경각심을 가지는 시점.
그것은 지난 역사가 증명한다.
강민혁과 같은 사람이 목소리를 높일 때?
정부에서 지원을 약속했을 때?
아니다.
바로 재앙 직후다.
폭발 사고가 일어나고, 비행기가 추락하는 등의 갖가지 사고가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그로 인해 죽어 나간 사람들을 보며 ‘아, 조심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그와 관련된 사고를 대비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인다. 폭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폭발 물질을 조심하게 다루고,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 꼼꼼하게 정비를 함으로써 사고를 미연에 방지한다.
지금도 그러한 상황과 같은 맥락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재앙의 시작점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 아니다.
2세대 혹은 3세대였고, 그들로서는 100년 전에 벌어진 재앙이 어떠했는지를 공감하지 못한다.
과거는 과거고, 현실은 현실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힘들다.
여전히 몬스터로 인해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헌터들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가 멸망할 정도의 재앙은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들이 느낀 감정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것이지, 세상이 당장 멸망할 것 같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뭉쳐지지 않은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목소리를 냈다.
‘타협은 불가능해.’
처참한 현실이었다.
강민혁은 자신이 경험했던 미래의 재앙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왔다.
매뉴얼을 만들고 직접 뛰어다녔으나, 소득은 없었다.
‘결국 방법은 가디언 마탑이 강해지는 수밖에 없어. 가디언 마탑에게 발언권이 생긴다면, 자연스럽게 동조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겠지. 지금은 가디언 마탑이, 그리고 내가 강해지는 것만 생각하자.’
타협을 포기했다.
약 한 달.
그 시간 동안의 노력은, 그렇게 사람들의 비웃음만 사고 물러나는 것으로 끝났다.
가디언 마탑은 훈련에 열을 올렸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마탑의 시스템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강민혁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 시각.
강민혁은 고영철을 통해 다른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차원의 균열을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클리스만의 세상에 차원의 균열이 있었던 것처럼, 강화 문명에서도 동일한 것이 있을지도 몰라.’
게이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련의 탑.
강민혁은, 정신의 세상에 들어가는 통로를 찾았다.
‘클리스만의 몸으로 시련의 탑을 경험했을 때, 나는 마법사로서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었어. 그때는 클리스만의 몸이라 정신적인 성장만 이루었지만, 진짜 내 몸으로 경험한다면 다를지도 몰라.’
그건 가설이었다.
매우 위험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시련의 탑은 이미 그 효과가 검증되었지만, 이 세상의 균열은 어떠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강해지고 싶었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무너져 내렸을 때.
강민혁은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클리스만의 육체는 강했으나 강민혁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심연의 악마가 성벽을 무너트리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제야 강민혁은 현실을 직시했다. 자신의 힘이 생각보다 초라하고, 가브리엘 칼데론 정도의 경지에 올라야만 그래도 게이트 너머의 존재들과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5개의 서클을 형성하고 나름 강해졌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니, 한심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도박이 필요했다.
위험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짧은 시간에 강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제 세상에 어떤 재앙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차분하게 성장 단계를 밟아나갈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강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어.’
이미 경험했던 것.
섣부름은 화를 부르지만, 아는 길을 활용하는 건 다른 문제다.
이 세상에서는 미지(未知)의 세계라 할지라도, 평행우주라면 강민혁의 방법은 가능성이 있다.
며칠 뒤.
마침내 고영철은 조건에 부합하는 장소를 찾았다.
[네가 말한 균열을 찾았어. 그런데, 문제가 있어.]
세상일은 항상 순탄하지 않았다.
균열의 위치.
그곳은 한국이 아니라, 바로 ‘프랑스’에 위치해있었다.
균열의 시작점은 프랑스에 위치한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라는 곳이었다.
그곳에 싱크홀(sinkhole) 현상이 있었는데, 그 안에 차원의 균열 같은 것이 형성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사실 게이트가 아니더라도 차원의 균열은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프랑스 정부는 크게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생성된 차원의 균열은 이전과 조금 달랐다. 강민혁이 경험했었던 시련의 탑처럼, 균열 안으로 들어갔던 사람이 미치광이가 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렇기에 정부 관리하에 그곳은 출입 금지 구역이 되었다.
탐사를 위해서 조사팀이 배정되었으나, 워낙 난해한 영역이라서 어떻게 손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강민혁은 일단 신분을 숨겼다.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마법 협회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사실 해당 국가를 대표하는 마법 협회의 경우에는, 정부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없다.
혹시라도 자신의 신분이 알려진다면 정부가 나서서 방해할 터.
강민혁은 가명을 사용해서 싱크홀을 담당하고 있는 조사팀과 접촉했다. 어차피 강민혁에게 필요한 것은 이곳에 대한 권한이 아니라, 단 한 번만 경험하면 되는 일이다. 담당자에게 출입을 대가로 한화로 10억에 달하는 금액을 제안했고, 담당자의 흔들리는 눈빛은 결국 출입을 허락했다.
다행이었다.
아직 균열의 가치를 모르기에 가능한 일.
그리고 스트라스부르가 독일 국경과 밀접해 있어, 강민혁의 행적도 프랑스 정부에 발각되지 않았다.
“이쪽입니다.”
싱크홀 담당자.
그가 강민혁을 안내했다.
분장한 얼굴로 인해서, 그는 강민혁이 소문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이윽고 거대한 공간이 나왔다.
바닥에 뻥 뚫린 공간에는, 아직 정제되지 않은 거친 기운이 넘실거리며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다.
담당자가 말했다.
“이제까지 5명의 인원이 조사를 위해 안으로 들어갔는데, 4명은 행방불명이 되었고 마지막 1명은 미쳐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조사는 끝난 상태입니다. 저런 위험천만한 공간을 대체 어떻게 더 조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는 혹시라도 이 안에서 몬스터가 출몰할까 봐 경계하는 것인데, 대체 왜 이런 곳을 보자고 그 많은 돈을 지불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야 뭐 정말 감사할 일이지만, 이번 일은 절대 프랑스 정부에 말하면 안 됩니다.”
그는 신신 당부했다.
강민혁은 알겠다고 말했고, 차원의 균열로 다가갔다.
‘시련의 탑보다 더 거칠어.’
시련의 탑.
그곳은 세월이 흐르며 기운이 안정되었다.
그런데 이곳은 그곳과 달랐다.
시련의 탑과 비슷한 공간이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훨씬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의 망설임.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기회가 있다면 직접 쟁취해야겠지.’
자신의 성장은 비정상적이었다.
항상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성장했고, 이제와서 정석의 길을 걷겠다고 체면을 차릴 생각은 없다.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강민혁은 언제든 목숨을 걸 수 있다.
강민혁의 삶은 항상 투쟁의 연속이었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이 간절할 때였다.
‘들어가자.’
확.
곧바로 뛰어내리는 강민혁.
그러자, 차원의 균열이 그대로 강민혁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