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135화 (135/197)

135화.  < 34. 나아가야 할 길(3) >

그날, 엘리샤는 강민혁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직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그녀에게 마법은 인생의 전부였고, 겨우 며칠 사이에 포기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마음을 달리 먹었다.

마법사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의사는 재활이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세상일은 상식적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엘리샤는 매일 재활 훈련장을 찾았다. 혹시라도 기적적인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에, 아침부터 밤까지 훈련장을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하면.

그녀의 피부에 마나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아직도 생생하게 마나를 느낄 수 있었지만, 그것을 서클에 쌓으려는 순간 신기루처럼 마나가 사라졌다.

파스스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었다.

서클은 마나를 담는 그릇으로써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마나를 쌓으면 쌓을수록 서클의 붕괴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서클이 복구되길 기다릴 수도 없었다. 서클은 마나로 유지되는 것이고, 마나를 잃은 서클은 어떤 방식으로든 붕괴될 수밖에 없다.

절망적인 나날이였다.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

시간이 빠르게 흘렀지만, 재활의 성과는커녕 서클은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다 끝났어.’

그때는 인정해야만 했다.

정말 한계였다.

더 이상 훈련을 진행했다간, 서클의 붕괴로 심장이 직접적으로 다칠 수도 있다.

엘리샤는 펑펑 울었다.

사람들에게는 강인한 여성으로 알려진 그녀였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순간에도 평정심을 유지할수는 없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퉁퉁 부은 눈은 그녀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었지만, 그녀의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은 사정을 알기에 감히 비웃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강민혁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도, 시간이 흐르고 보면 결코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야.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겪은 세상에서만 모든 일을 판단하지. 나 또한 그러했고, 절벽 밑에 떨어졌던 나는 새로운 삶을 움켜쥘 수 있었어.”

검을 버리고.

강민혁은 마법사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적어도 그는 엘리샤가 어떤 감정인지를 공감할 수 있었고, 강민혁의 조언은 엘리샤의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마법을 포기하라는 말에도 화를 내지 못했다. 그녀도 알았던 것이다. 강민혁이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했기에, 동정심의 눈빛이 아니라 ‘공감’의 눈빛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민에 빠졌다.

그때부터는 재활이 아니라,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내가 새로 시작할 수 있을까?’

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세계다.

평생을 마법의 천재라고 불리던 그녀에게, 검을 가르쳐주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편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마법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강민혁을 경험하면서 검에 대한 편견은 완전히 사라졌다. 검도 마법만큼이나 강했다. 강민혁과 같은 대단한 검사가 직접 검술을 가르쳐주겠다는 것은, 절대 쉬운 결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엘리샤도 잘 알았다. 다만, 검이 마법으로 인해 생겨난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자신에게 마법은 삶의 전부였다.

재활을 중단했다.

방에만 틀어박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은 나를 지켜주다가 죽었어.’

절망적이었던 순간.

엘리샤는 아바타 마법을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고, 사람들은 엘리샤를 보호하고자 목숨을 바쳤다. 엘리샤는 아바타 마법을 사용함으로써 마법사로서의 힘을 잃었다면, 그녀의 마법을 위해서 수십 명의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죽음으로 이루어낸 결과/

안다.

자신이 이대로 포기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래도 자신은 살았지 않은가.

그들을 대신해서, 그 빌어먹을 몬스터들에게 꼭 복수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났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뜨고.

며칠을 그렇게 보내고서야, 엘리샤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강민혁을 찾아가 물었다.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조심스러운 물음.

그 간절한 음성에, 강민혁은 확신을 주었다.

“너라면 할수 있어.”

엘리샤.

한때는 마법의 천재라고 불렸던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삶을 택하는 순간이었다.

엘리샤가 방황을 끝낸 그 시각.

세계 정상(頂上)들이 모인 회담이 진행되었다.

주제는 바로 전쟁.

현재 장벽 너머를 공격하자는 여론이 들끓음에 따라, 그것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필요했다.

미국의 대통령이 말했다.

일국의 수장이자, 본인도 7서클 대마법사인 그는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장벽 너머를 공격하는 것은 무모한 선택입니다. 2000년 전에 몬스터들을 상대로 핵폭탄을 사용한 이후, 장벽 너머는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몬스터들을 상대할 힘을 갖추었다고 한들, 러시아에서부터 한국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대장정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러시아의 척박한 환경이 얼마나 위협적인지는 지난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들이 넘어오는 것 이라면 몰라도, 우리가 넘어가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타당한 말이다.

러시아.

몬스터 랜드라고 불리는 땅은, 재앙 이전에도 척박한 것으로 유명했다.

러시아의 맹추위에 행군에는 많은 문제가 있을 테고, 공간 마법으로 보급을 감당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리고 공간 마법의 좌표도 불분명하다. 장벽 너머의 땅은 인간의 발길이 2000년간 끊긴 상태였고, 그곳에 대한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절대 넘어갈 수 없다.

몇몇 사람들이 반대 의견을 덧붙였다.

결론은 같았다.

위험하다.

장벽 너머를 공격하는 것이, 어쩌면 인류의 명줄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선택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비드가 나섰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총장이자 영국 왕실의 일원인 그는, 이 자리에 참석할 자격이 있었다.

“그래서 언제까지 장벽 안에서 벌벌 떨고 있자는 겁니까? 다들 클리스만의 인터뷰를 보셨습니까? 그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무너진 이상, 이 세상에 안전한 곳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장벽을 넘어가는 것이 위험한 선택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서서히 말라 죽는 것뿐입니다.”

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무너진 그날.

아비드는 달라졌다.

미래의 자원을 육성하다 보면 언제고 재앙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던 그가, 자신의 선택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2000년 전에는 게이트라는 현상이 없었습니다. 아니,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세상은 나름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장벽 너머의 몬스터들이 게이트를 타고 나타나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고, 이번에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몬스터도 출몰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도 새로운 재앙이 닥치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습니까? 재앙은 이미 코앞에 닥쳤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한가하게 앉아서 떠들 때가 아닙니다.”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아비드가 자신의 의견을 열정적으로 피력했다.

의견이 기울었다.

아비드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번 사건은, 아비드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선사했다.

스페인의 수장이 말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선택지는 없습니다. 게이트 너머에서 나타난 악마가 성벽을 무너트린 순간, 방어의 이점은 상실해버렸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전쟁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마침 , 클리스만이 새로운 골렘 제작법을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플루토라는 새로운 힘을 갖춘다면, 장벽 너머에서의 전쟁이 불가능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견을 덧붙이는 사람들.

아침 일찍 시작되었던 회담은, 해가 저물 때까지 지속되었다.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서로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타협점을 찾아갔고, 결국 정상 회담은 하나의 결론을 내리고 끝났다.

“인류가 결단을 내릴 때가 왔군요.”

전쟁.

그들은 마침내, 전쟁을 결심했다.

다음 날.

정상 회담 결과가 대중들에게 발표되었다.

[지금 이 자리를 빌어, 세계 연합은 몬스터와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당장 장벽 너머로 넘어가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인류는 전쟁을 대비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각 국가는 전시 체제로 돌입하고, 미래의 유망주를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전쟁에 투입할 수 있는 병사들을 훈련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클리스만이 공개한 골렘 제작법에 따라 플루토와 골렘 병사, 그리고 보급형 R-1도 제작할 예정입니다. 기간은 약 3년. 우리가 만반의 준비를 끝내는 순간, 몬스터와 인간은 명운(命運)을 건 전쟁을 시작할 것입니다.]

전쟁의 선포.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TV로 세계 연합의 발표를 지켜보며, 강민혁은 담담한 눈빛을 보였다.

‘드디어 현실을 받아들였구나.’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사람들은 재앙이 코앞에 닥쳤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안주가 아니라 나아가는 것을 택했다.

사실 지금보다 훨씬 일찍 결단을 내렸어야 할 문제였다.

장벽 너머.

그곳에 몬스터가 도사리고 있는 이상, 인간들은 결코 평화롭게 살아갈 수 없다.

‘3년이라. 나도 그 안에 준비해야겠지.’

더 강해져야만 한다.

심연의 악마를 상대로 넋을 잃고 바라보는 수준이라면, 3년 뒤에도 강민혁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때였다.

이만 엘리샤를 찾아가려는데, 한 통의 연락이 왔다.

[잠깐 시간 좀 낼 수 있겠나?]

익숙한 번호.

상대는 바로 아비드였다.

아비드와 만났다.

그는 단도직 입적으로 말했다.

“새로운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앞으로 마법 인재를 육성하는 기관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워 메이지를 육성하는 기관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과정에서 검술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검술.

마법과는 동떨어진 힘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서, 아비드는 마법만으로는 장벽을 넘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검술을요?”

“그래. 마법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을 발휘한다고 한들, 마지막 한 마리를 처리하지 못하면 죽고 마는 것이 마법사의 한계지. 하지만 검사는 다르다. 검사는 마법사만큼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대신, 검사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나는 이번 전투에서 너를 통해 그것을 보았고,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법과 검의 힘이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 검술 학과를 편성하고자 한다. 마법을 익히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지.”

아마 반발이 심할 것이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마법사의 미래이자 희망인데, 그곳에 검술 학과가 편성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만큼, 아비드의 의지는 강했다.

제자들이 죽어 나가던 그날.

아비드는 몬스터와 공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선택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자, 그의 가슴에는 사그라지지 않는 불길이 생겨났다.

복수.

그는 몬스터의 멸망을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민혁이 반드시 필요했다.

검술은 낯선 힘이다.

강민혁이 틀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당장 3년 뒤에 전쟁에 도움이 될만한 검사들을 만들어낼 수 없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강민혁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검술 학과의 틀을 잡아드리겠습니다.”

수호문의 비기를 알려줄 생각은 아니다.

수호문의 비기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훈련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검사의 명을 단축하는 기술이다.

고로, 초심자를 위한 기술이 필요했다.

강민혁의 머릿속엔 마침 적합한 것이 있었고, 그걸 알려준다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검술 학과의 교본. 그것이면 속성 과정에 적합하겠지.’

검과 마법의 조화.

강민혁도 공감하는 바이다.

아비드가 자신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면, 강민혁은 기꺼이 그를 도와줄 의향이 있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검술 학과를 어떻게 창설할지.

그리고, 교육은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질지.

강민혁의 설명이 이어지자, 아비드는 속으로 감탄했다.

‘클리스만은 일개 학생이 아니야. 이미 대가(大家)의 경지를 이루었어.’

사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강민혁의 과거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의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강민혁은 남들은 기피하는 검술의 영역에서, 마법사들마저도 능가하는 경지에 오를 수 있던 걸까.

그러자, 의문은 자연스럽게 강민혁의 배경과 연결되었다.

평범하지 않은 배경.

그것이 의문을 해소할 정답으로 보였다.

아비드가 말했다.

“궁금한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화이트 캐슬. 그들과는 무슨 관계지?”

“.........예?”

뜬금없는 소리였다.

갑자기 화이트 캐슬이라니.

강민혁의 표정에, 아비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화이트 캐슬의 힘이 아니었다면 너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없었다. 검사로서의 네가 약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배경이 있었기에 너는 마법사로서 4년간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었다.”

충격적인 진실.

사고 회로가 얽혔다.

그간 강민혁이 궁금해하던 클리스만의 배경.

그것은 바로 가브리엘 칼데론이 이끄는 ‘화이트 캐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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