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 34. 나아가야 할 길(2) >
기자들의 표정이 당황으로 얼룩졌다.
영웅이라고 띄워줬는데, 왜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영웅이냐니요. 클리스만님의 활약을, 그리고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클리스만님을 영웅이라 부르기에, 저희가 이렇듯 찾아온 것입니다.”
맞는 말이다.
만약 강민혁이 평소의 감정이었다면.
이 세상의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영웅의 이미지를 받아들이고 원하는 말을 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겪은 재앙은, 강민혁의 환상을 깨트렸다.
“저도 방송을 봤습니다. 제가 어떻게 비추어지는지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이번 재앙을 통해서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저와 화이트 매지션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더군요.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무너졌지만, 우리는 저 영웅들처럼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TV 너머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대체 뭘 그렇게 잘했다는 겁니까? 공연장에서 부상자를 구해서? 아니면, 성벽이 무너질 때 내려가서 그들을 막았기 때문에?”
그날.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리고 그중에는, 자신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죽음을 똑똑히 목격했다.
“부상자를 구출하는 과정에는 저 말고도 벤자민 우드 교수님도 있었습니다. 그는 성벽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죽음을 맞이했고, 그런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여기서 제가 뭘 말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다루어 달라는 겁니까?”
“아니요.”
희생자들의 죽음.
그들이 기억되길 바라는 것은 맞다.
하지만 강민혁이 화를 내는 이유는, 사람들이 희망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무너져내린 사건입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재앙에, 저조차도 기껏 한 것이라고는 잠깐 시간을 벌었던 것 뿐입니다. 이게 영웅입니까? 벤자민 우드 교수님이 죽는 모습을, 동급생들이 죽는 모습을, 그리고 엘리샤가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저는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희망적이라고 떠들어대는 겁니까? 우리는 지금 최악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힘으로도 재앙을 막아내지 못했고, 인류가 그렇게 자랑하던 기간트가 무려 8기나 동원되었지만 성벽은 뚫리고 말았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십니까?”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하길 바란다.
희망.
중요하다.
문제는 희망만 바라보다 멀어버린 눈은, 코앞에 다가온 절망을 깨닫지 못한다.
“게이트는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재앙입니다. 그나마 왕실 마법 아카데미라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지만, 다른 곳은 생존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영웅의 탄생이라는 그럴듯한 이야기로 현실을 외면하지 마시고,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 마법이든 뭐든 강해지기 위해서 노력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영웅이라 떠받드는 저는 여러분들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이곳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영국을 넘어선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재앙을 제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재앙의 시작점.
그로부터 2000년이 흘렀다.
그간은 몬스터와의 공존이 가능했을지 몰라도, 지금부터는 아니다.
강민혁이 카메라를 보았다.
모두가, 자신의 얘기를 듣길 바랐다.
“이 사태가 왜 벌어졌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평화로운 시대는 끝났습니다. 우리가 장벽 너머로 넘어가지 않는다면, 언제고 그들이 우리의 터전을 짓밟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니, 동화에서 나올 법한 영웅의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그리고, 여기는 엘리샤의 병실입니다. 당신들이 적어도 희생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인터뷰를 위해 마이크를 들이밀 게 아니라 예의를 지키십시오.”
대화가 끝났다.
일방적인 발언.
잠시 넋을 잃었던 기자들은, 카메라의 영상을 확인했다.
강민혁의 말에 복잡한 심정이 들었지만, 이 영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그들은 바쁜 걸음으로 병원을 빠져나갔다.
영상은 곧바로 공개되었다.
그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일단은 반발하는 사람들.
-웃기네. 자기가 뭐라고 우리한테 훈계를 하는 거지?
-이번 사건에서 클리스만이 희생했다는 사실은 알겠어. 그런데 우리가 이번 사건을 가볍게 여긴다고 단정하는 이유가 뭐지? 몬스터와 싸우기 위해서는 희망이 필요해.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무너져내린 것은 정말 절망적인 사건이지만, 그 아픔과 절망을 안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평화로운 시대가 끝났다니. 우리가 그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들이 발끈했다.
강민혁은 안주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나름 본인들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강민혁의 발언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과는 다르게 인정하는 사람도 많았다.
-난 클리스만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잖아. 최초의 재앙으로부터 2000년
이 흐르는 동안, 인류는 장벽 너머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공생하는 방법을 택했어. 만약 진즉에 결단을 내려 몬스터와 싸웠다면, 인류의 재앙은 이미 해결되었을지도 몰라. 그리고 재앙은 발전해서 게이트를 생성했고, 오늘과 같은 사건이 벌어졌어. 현실에 안주했던 선택이, 2000년이 흘러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거지.
-우리는 클리스만을 비난할 자격이 없어. 클리스만은 재앙의 현장에 있었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몬스터들과 끝까지 싸웠잖아. 그의 말대로 이번 사건을 결코 잊어서는 안 돼.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무너진 것은 세상이 우리에게 보내준 경고고, 이번 사건을 통해 반드시 변화해야만 해.
왕실 마법 아카데미.
마법사들의 미래이자 희망.
그것이 무너진 사건이, 사람들의 가슴에 콱 박혔다.
어쩌면 본인들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몰락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를 알았지만, 강민혁의 말처럼 희망이라는 단어에 몸을 숨기고 말았다. 십수 개의 게이트. 그것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들의 모습은 사람들을 압도했다. 감히 어떻게 대항해야 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 상황에, 그 순간에서 최선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가브리엘 칼데론과 강민혁의 활약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적어도, 지금 이 세상의 사람들은 나약했다.
처음에는 악에 받쳐 몬스터와 싸웠을지 몰라도, 2000년의 안주는 그들의 의지를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다.
세상이 떠들썩했다.
강민혁의 발언.
그로 인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대립했다.
마침 장벽 너머를 공격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가세하면서, 세상이 아주 뜨겁게 달아올랐다.
변화의 시기.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강민혁은 정적인 시간을 보냈다.
재앙 직후.
강민혁의 일상은 한결같았다.
시체를 수습하고, 그들을 땅에 묻고, 엘리샤의 병실을 찾아가 성심성의껏 그녀를 간호해주었다.
정적인 일들.
그러나, 가슴 속에 들끓는 감정은 도무지 가라앉질 않았다.
분명히 며칠 전만 하더라도 살아 있었던 벤자민 우드가, 지금은 땅 아래에 잠들었다.
돌과 콘크리트로 덮인 평평한 무덤.
그 안에 벤자민 우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강민혁은 우두커니 서서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교수님.’
자신과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전장이라는 것은 감정을 급격하게 폭발시킨다.
짧은 순간.
강민혁과 벤자민 우드는 한 명의 부상자를 구출하기 위해서 감정을 교류하였고, 분명히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던 사이가 어느 순간부터는 특별하게 변했다. 그래서 벤자민 우드의 죽음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벤자민 우드의 무덤 너머로는, 수백 개의 다른 무덤이 보였다.
런던에서 조금 떨어진 곳.
영국에서 그곳을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공원을 만들었고, 아직 이곳으로 옮겨지지 않은 시체가 많았다.
추모비는 그들 모두가 잠들었을 때 세워질 터.
강민혁은 상념을 털어내고, 다시 아카데미로 향했다.
할 일이 많았다.
전장을 정리하고, 시체를 옮기고, 다시 그들을 묻고.
강화 전사인 강민혁은 육체적인 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다시 돌아온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참으로 참담했다.
내성 밖은 멀쩡한 곳이 없었고, 무너진 성벽을 치우다 보면 그 안에 뭉개진 시체의 흔적이 보였다. 역겨운 냄새가 풍겼지만 강민혁은 표정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 감정을 꾹꾹 억누르며, 강민혁은 무덤덤하게 그것을 모두 치웠다. 진득거리면서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시체를 뒤적거리며, 혹시 그 시체의 주인을 기억할 수 있는 물품이 있는지를 찾았다.
세상이 제안한 영웅이라는 칭호.
그것을 거절하고, 가장 밑바닥에서 일하는 것을 택했다.
참담했던 순간의 현장을 눈에 담고,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강민혁은 점점 마음이 단단해졌다.
재앙은 강민혁에게도 큰 사건이었다.
감정이 시시각각 변했고,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안정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민혁의 생각은 확고해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그리고 강민혁은, 다시 엘리샤를 찾았다.
간호사는 엘리샤가 재활 훈련장에 있다고 했다.
1인 훈련장에 도착하자, 문 너머로 엘리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끄윽, 끄으윽."
그녀는 울음을 삼켜내고 있었다.
밖에서 혹시 누가 들을까 봐,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의사에게 들었다.
엘리샤의 상태가 어떠한지.
‘엘리샤는 앞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
아바타.
가브리엘 칼데론의 의식을 받아들이며, 6서클 마법사인 엘리샤는 일시적으로 8서클 마법을 사용했다.
그건 초월 각인과는 다르다.
초월 각인은 몸이 한계 이상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법진으로 힘을 보태준다면, 엘리샤는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8서클 마법을 발현시켰다. 8서클의 힘을 6개의 서클로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바타의 패널티는 단순히 탈진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이번 경우는 힘의 차이가 너무 커서 마나가 소멸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서클이 붕괴되고 있었다.
일상생활은 가능하다.
하지만 마법사로서의 삶은 끝났다.
점점 붕괴되고 있는 서클은, 엘리샤가 어떤 노력을 할지라도 결국 처참하게 부서지고 말 것이다.
엘리샤도 알았던 현실.
막상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엘리샤는 매일 재활 훈련장을 찾았다.
어떻게든 붕괴되는 서클을 다시 복구해보려고 했지만, 그녀의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엘리샤의 세상이 무너졌다.
일인전승의 후예로 태어난 그녀는, 의식이라는 것을 가진 시점부터 오로지 마법을 위해 살았다.
그런데 그게 사라진단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날이 갈수록 엘리샤는 피폐해졌다.
“엘리샤.”
“꺼져!”
엘리샤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울었던 것을 들키기 싫었던 모양인지, 고개를 홱 돌리고는 강민혁을 돌아보지 않았다.
“제발 가줘. 그냥 가달라고.”
그녀의 음성은 간절했다.
강민혁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아바타는 본인의 선택이었지만, 그래도 절망적인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강민혁은 뜸을 들였다.
가만히 엘리샤의 감정이 진정되길 기다렸다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 나는 그동안 이 세상에 충실하지 않았어. 얻을 것은 얻되, 이 세상의 안위는 내게 우선순위가 아니었거든. 그런데 이번 일을 겪고서 생각이 달라졌어. 맥없이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 현실이 너무도 절망스럽더라고.”
이 세상.
그 의미를 엘리샤는 정확히 모를 것이다.
강민혁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세상이었고, 그래서 클리스만의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하진 않았다.
그건 아주 큰 착각이었다.
양쪽의 세상은 같은 근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만약 재앙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도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
클리스만?
이제는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진 않을 것이다.
재앙을 알았음에도 희생을 막아내지 못한 그의 계획은, 그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일 테니까.
강민혁이 말했다.
“마법을 포기해.”
잔인한 말이다.
엘리샤의 몸이 흠칫 떨렸다.
슬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
흘러내리는 눈물로 인해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민혁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겠다고 말한다면.”
그간의 고민.
그리고 결심했다.
클리스만의 계획은 이제 절대적이지 않다.
그와의 관계가 계속 지속된다면, 앞으로는 세상의 멸망을 막아내겠다는 계획에 자신의 의지도 개입될 것이다.
강민혁이 말했다.
“내가 너에게 ‘검술’을 전수해줄게.”
수호문.
강민혁은, 이 세상에 새로운 힘을 전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