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133화 (133/197)

133화.  < 34. 나아가야 할 길 >

시작은 한 방송 프로그램으로부터였다.

해당 방송의 PD는 처음에 가브리엘 칼데론의 영상을 편집하기 위해서 현장 영상을 모았는데, 막상 확인한 영상에는 주인공이 따로 있었다. 가브리엘 칼데론은 마지막에 등장해서 상황을 정리하는 끝판왕의 역할이었다면, 그 이전에는 고군분투하는 강민혁이 있었다.

예고도 없이 시작된 방송.

MC가 강민혁을 중심으로 편집된 영상에 설명을 덧붙였다.

[사건은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졸업 발표회가 진행되는 도중에 벌어졌습니다. 갑작스럽게 공격을 당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클리스만은 침착하게 주도적으로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사건을 분석한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때 클리스만의 적절한 대처가 없었더라면 피해는 생각보다 더 컸을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영상은 카메라맨이 현장을 빠져 나가면서 끊겼지만, 당시 클리스만과 고인이 되신 벤자민 우드 교수는 부상자를 구출하기 위해서 현장에 남았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부상자의 인터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파팟.

화면이 바뀌었다.

강민혁과 벤자민 우드가 구한 부상자.

혈색은 좋지 않았지만, 정신을 차린 그가 조심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당시의 상황이 잘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쓰러지기 직전에 저를 구하기 위해서 달려드는 벤자민 우드 교수와 클리스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벤자민 우드 교수는 정말, 세상이 참 잔인한 것 같습니다. 그런 훌륭한 분을 데려가다니요. 둘의 희생이 없었다면, 저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겁니다.]

사내가 눈시울을 붉혔다.

이후부터 영상은 강민혁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조각조각 나누어진 화면에서 강민혁의 행적을 따라갔고, 강민혁은 결국 부상자를 성벽 안으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PD의 방송 욕구에 불을 지른 장면이 연출되었다. 심연의 악마로 인해 성벽이 무너져내린 상황에서, 강민혁이 성벽 위로 뛰어올라 지휘관과 대화를 나누더니 갑자기 성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MC의 목소리도 격양되었다.

[당시 성벽이 붕괴되는 바람에, 몬스터들을 막기 위해서는 성벽을 복구할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클리스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지로 몸을 던졌습니다. 방송을 준비하며, 지금 이 장면을 얼마나 많이 되돌려보았는지 모릅니다. 겨우 검 한 자루. 클리스만은 부상자를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카메라맨이 촬영한 영상은 성벽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끝이었고, 이후부터는 CCTV 영상으로 대체되었다. 높게 설치된 탑에 있는 CCTV라 전장의 치열함을 완전히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강민혁에게 들이닥치는 검은 물결의 모습은 똑똑히 보였다. 베고, 또 베고. 강민혁이 점점 피로 물들어갔다.

[보십시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클리스만은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홀로 수천의 몬스터를 상대했습니다. 내성에서 벌어진 최후의 항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중심에는 클리스만이 있었습니다. 생존자들이 말하길, 정말 포기하고 싶을 때면 항상 클리스만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마지막 전투.

R-1을 착용한 강민혁은 성벽 위를 활보하였다. 마법사들도 마나가 모두 떨어져서 근접 무기로 싸우고 있는 그 시점에서, 강민혁이 보여주는 포스는 어마어마했다. 전쟁의 신이 이러할까. 마법만이 이 세상의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강민혁의 무력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재앙 속에 희망이 피어났다.

강민혁이라는 단단한 버팀목이 있었기에, 생존자들은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가 있었다.

영상이 마무리되었다.

MC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마지막 멘트를 말했다.

[가브리엘 칼데론은 이번 사건의 영웅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클리스만과 같은 영웅의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그의 희생을 기억해야만, 앞으로도 인류는 몬스터들의 위험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방송은 끝났다.

그리고 방송 직후, 사람들이 난리가 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만약 내가 저 상황에 있었다면, 클리스만처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던질 수 있었을까? 아마 불가능했을 것 같아.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글을 올리는 내 손이 이렇게 떨리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어. 클리스만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성벽 아래로 뛰어 내렸을까?

가슴이 먹먹했다.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성벽을 뛰어내린 판단도 대단했지만, 강민혁은 기어코 성벽이 복구될 때까지 그 자리에서 버텼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나는 클리스만의 이름을 알고 있었어. 아마 나 같은 사람들이 많겠지.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행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결투 대회에 참가했던 클리스만의 활약상을 보았을 테니까. 당시 클리스만의 검술은 정말 엄청났어. 그러나, 나는 클리스만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았어. 조금 싫었거든. 마법을 배우는 내 입장에서, 검으로 마법사를 쓰러트리는 클리스만의 모습은 달갑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그런데 지금은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 사람이었는지를 알 것 같아. 클리스만이 희생했기 때문이 아니야. 결국 우리는 몬스터에 대항하기 위해서 힘이 필요한 상황인데, 나와 다르다고 해서 클리스만과 같은 사람을 싫어했었다니. 진짜 내가 너무 싫어지는 하루네.

세상에 재앙이 닥쳤다.

공포, 슬픔, 분노와 같은 복합적인 감정 앞에서, 그간의 편견은 사르르 녹아내릴 수밖에 없었다.

영웅은 위기의 순간에 등장한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클리스만이라는 영웅은, 게이트의 재앙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사실 영웅이라는 것은, 위기가 아닌 사람들의 간절함이 만들어낸 존재일지도 모른다. 괜찮다는 희망을 불어 넣어줄 존재.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무너져내린 상황에서도,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 사람들은 그렇게 영웅을 찾았다. 재앙이 닥친 절망적인 상황에서, 영웅이라는 존재는 공포를 밀어내고 사람들은 하나로 뭉치는 힘이 있다.

강민혁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다.

강민혁말고도 희생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가장 부각되는 활약을 보여준 강민혁을 영웅으로 삼았다.

이후에는 살이 붙었다.

두려움을 잊기 위해, 재앙의 기억을 떨쳐내기 위해.

사람들은 영웅을 부각시켰다.

-클리스만은 졸업 발표회에서 새로운 골렘 제작법을 공개했어. 기존의 체계보다 출력이 무려 2배나 높은 데다, 플루토는 이번과 같은 재앙이 벌어져도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강력한 병기야. 사실 다들 알잖아. 기간트의 제작법이 얼마의 값어치를 하는지. 클리스만은 그런 지식을 사람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공개했어. 그는 진정한 의미의 영웅이야. 클리스만을 중심으로 플루토의 개발을 착수한다면, 우리는 오늘과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어.

클리스만.

그 이름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강민혁의 이름을 외쳤다.

처음에는 영국에서만 퍼져나가던 이름이, 어느 순간부터는 전 세계가 입을 모아 강민혁을 찬양했다.

화이트 매지션과 강민혁.

절망 속에 탄생한 희망이었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강민혁은 영웅이 되었다.

사람들로서는 그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그래야, 영웅이 활약하던 영상에서 죽어가던 사람들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엘리샤가 깨어난 시각은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였다.

“.....여기가 어디야?”

“병실이지.”

“아."

강민혁의 대답에, 엘리샤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잠시 잊고 있었다.

성벽이 무너질 것 같은 상황에, 엘리샤는 아바타 마법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 그로 인한 리스크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평생을 쌓은 마나를 모두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지만, 당시 엘리샤에게 그런 리스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엘리샤가 웃었다.

“왜 세상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그런 표정을 하고 있냐?”

".........."

강민혁은 말이 없었다.

미안했다.

엘리샤는 눈을 뜨는 순간, 본인의 서클이 텅텅 비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서클의 붕괴가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애써 웃음을 보이는 엘리샤의 모습을 바라보자니, 자신의 초대에 흔쾌히 응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쓰라렸다.

만약 자신이 초대하지 않았더라면.

엘리샤는 본인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아바타 마법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릴 일도, 이러한 고통을 겪을 이유도 그녀에게는 없었다.

“미안해.”

“뭐가?”

“널 초대해서. 내가 괜한 짓을 했어.”

“야. 그딴 소리 할 거면 꺼져. 우리 사이에 졸업 발표회에 초대한 일이 잘못했다고 말할 정도의 일이야? 그리고 난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안 해. 난 네 졸업 발표회를 보고 싶어서 참석했을 뿐이고, 아바타 마법을 사용한 것은 내 의지로 인한 선택이었어. 너도 알잖아. 그때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는 걸.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내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아바타 마법이라는 최후의 수단조차 사용하지 못했을 테니까.”

엘리샤는 강한 여자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오히려 강민혁을 꾸짖었다.

강민혁이 입을 달싹였다.

말하고 싶었다.

재앙을 예상하고 있었다고.

엘리샤, 너의 배경을 이용하기 위해 초대한 것이라고.

그러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수천의 몬스터를 상대로 목숨을 거는 것은 행했던 강민혁이, 무거운 입을 떼는 것은 하지 못했다.

참담한 기분이었다.

강민혁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말, 정말 미안해.”

“이 새끼가 진짜.”

엘리샤가 화를 내더라도, 그 말밖에 할 게 없었다.

강민혁은 안다.

다른 사람들은 엘리샤를 단순히 불쌍하게만 볼지 몰라도, 강민혁은 인생의 전부였던 것을 잃어 보았던 사람이다. 겉으로 보는 것과 내면의 고통은 다르다. 엘리샤의 속은 시간이 지날수록 썩어들어갈 테고, 사람들을 위해 행한 일이지만 그녀의 삶은 천천히 망가지게 될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생각이 많았다.

강민혁은 결국 엘리샤를 두고 병실을 나왔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면 나가라는 말에, 강민혁도 잠시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때였다.

“잠시만 들어가겠다니까요.”

“절대 안 됩니다.”

“아니, 우리가 뭐 환자에게 해라도 가한답니까? 그냥 상태 좀 직접 확인해보자고요. 그래야 우리가 국민들에게 생생한 현장을 전달해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 이게 우리만 좋자고 하는 일입니까?”

밖에서 들리는 시끌벅적한 소리.

아까부터 거슬렸다.

병실 안.

엘리샤의 앞에서라 그곳에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강민혁의 감각은 그들이 하는 말이 정확히 들렸다.

강민혁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더니,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모퉁이 너머에는 취재진이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명확했다.

강민혁을 발견하자, 그들은 환한 얼굴로 말했다.

“클리스만님이다!”

“클리스만님!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클리스만님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대단합니다. 혹시 잠시 인터뷰할 시간을 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강민혁은 지금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대상이다.

사람들은 영웅이 필요했다.

절망을 잊기 위해서는, 강민혁이라는 사람의 발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점이다.

그래서 취재진이 병실을 찾았고, 이곳은 엘리샤의 병실인데도 그녀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엘리샤는 핑계겠지.’

그들은 엘리샤의 취재를 말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강민혁이 매일 엘리샤의 병실을 방문하기 때문일 것이다.

엘리샤는 큰 희생을 감당했다.

그러나 가브리엘 칼데론과 강민혁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바람에, 그녀에 대한 관심도는 상대적으로 옅었다.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속이, 뜨겁게 들끓었다.

‘진짜 거지 같네.’

정말 짜증이 났다.

그렇지 않아도 몰려드는 취재 요청이 신경을 자극하고 있던 참이었다.

사람들에게 영웅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안다.

그런데.

지금은 일단 이번 사건을 되짚어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방비할 때가 아니던가.

아니면 적어도, 자신과 같은 사지 멀쩡한 사람이 아니라 이번 사건에 희생된 사람들을 챙겨야 한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했었다.

자신에게 향하는 관심.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순간, 기자가 마이크를 건넸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영웅으로서 한 마디 해주십시오.”

끝까지 이런 식이다.

방금 결정을 내렸다.

어떻게 할지.

강민혁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왜 당신들의 영웅입니까?”

이 세상의 사람들.

그리고 자신 또한, 이번 사태에 반성할 필요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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